트랜스퍼
흰 국화 한 송이 들고
사진 속 너를 본다
너와 나의
거리距離
모르는 곳에서
모르는 곳으로 가는 동안만이
우리들의 길 또는 생애다
정해진 길 없는 길
건너고 건너도
결코 다가설 수 없는 사랑도
전쟁과 장사일 뿐*
원래 없는 것이니 모래 더미의 싸움일 뿐
안녕
부디 잘가요
가장 흔한 말이
왜 가장 슬픈 말인지
흰 국화 한 송이 들고
사진 앞에
고개를 숙이는 이 자리
*크리스티앙 보뱅. [지극히 낮으신](1984BOOKS,2023) (P.16)
무화과 먹는 밤
비밀 연애가 이렇게 생겼을까
무화과!
애벌레처럼 부드럽고 깊은 속살
절망 기쁨 달콤한 죄
소곤소곤 씹히는
겉은 얇지만 속삭임 같은
알알이 박혀있는
정신병동회복실 창가에 놓인 과일
너 없으면 죽을 것 같은
은밀한 동굴
과일 속에 핀
농밀한 문장
쉽게 헤어날 수 없는
그 끝은 몰라도 돼
둘만 아는 보라빛
무화과를 먹는 밤
(P.36)
홍수 속에 마실 물이 없어요
홍수 속에 마실 물이 없어요
하수구에서 올라온 흙탕물을 밟고
우산도 없이 서 있는사람들을 보세요
물 좀 주세요
감정의 부유물이 많이 섞인 소다수 말고
시원한 물 한 잔 마시고 싶어요
홍수 속에 시집 서점으로 들어가요
대형마트에 시를 납품한 후
기득상권 속에 겨우 끼어든 시인의 얼굴들이
키를 맞대고 서 있어요
동네 장마당에서도 좀 팔려야 한다며
위로와 교훈으로 내숭 떠는 시집도 있네요
장사꾼의 내비게이션을 장착한 후
겁장이 시인들이 언어를 물총처럼 쏘네요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날아다니며
어떤 것은 과장된 가치와 역할을 말하고
어떤 것은 난장에 나온 민예품처럼 낡아
"이거 무슨 물건이죠?"
"그걸 모르시다니... 꼰대?"
"아니 네가 꼰대?"
블랙리스트보다 블랙홀이 더 두려워요
날카로운 칼로 시를 파내시나요
시는 충동이자 충돌
사람이 사랑이 완벽할 수 없듯이
이슬보다 땀이 더 뜨거우면 안 돼요
백지가 더 빛나요
사랑시집은 퇴폐와 멸망이 담긴 상처 박물관
자 쏠테면 쏴라! 홀딱 벗고 기어가는 별
홍수 속에 마실 물이 없어요
제발 마실 물 좀 주세요 (P.44)
산티아고 순례길*
나를 만날 수 있는 것은
나뿐인가
하늘 아래 가득한 질문 하나
*스페인 갈라시아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학 '말하는 돌의 정원'에 있는 한국어 석비.
2023년 3월 17일에 조성되었다. (P.71)
시인의 말
끝내 저항하고 질문하는
찌그러진 존재로서의 시인의 젊음을
나는 사랑한다.
잘 익은 고통, 잘 익은 사랑과 상처보다
가시 돋친 야수의 격렬하고 쓰디쓴 호흡을
나는 사랑한다.
사람에게서 나오지만 자연의 비명 소리
이것이 시일까.
흐르는 물을 손으로 움켜쥘 수 없듯이
처음이 곧 마지막인
생명은 뜨거움과 아픔만이 증거이다.
나는 나에게 말한다.
됐어!
그 끝은 몰라도 돼.
2025년 새바람 속에서
문정희
1947년생 시인, 문정희 시인의 뜨거운 시집을 읽으며 벅차고 기쁜 그런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