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안 부루마의 다른 책들처럼 이 책 역시 아주 좋은 책이다. 하지만 새책은 꽤 오랫동안 절판 상태이고, 중고로 작년에 구해 놓았다가 최근에야 읽기 시작했다. 하지만 앞부분을 읽다가 뭔가 이상해서 원서를 찾아보았다. 아이고, 번역이 엉망이구나! 처음부터 끝까지 오역을 찾아내는 것은 내 시간과 에너지를 고려할 때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그럴 필요성도 느끼지 않는다. 그래서 번역이 이상하다는 점을 처음 눈치 챈 대목의 앞뒤로 두어 쪽만 살펴보았다. 그 결과가 다음과 같다.
(pp.21-22) 도쿠가와 바쿠후의 이데올로기는 신유교였고, 특히 중국 철학자 주희가 12세기에 주창한 보수적 성향의 유교였다. 일본은 주희의 사상에서 권위에 대한 절대적 복종과 자연섭리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The ideology of the Tokugawa bakufu was neo-Confucianism, a particularly conservative strand of Confucianism devised in the twelfth century by a Chinese philosopher named Chu Hsi, who stressed the importance of natural order and, in the Japanese interpretation, absolute obedience to authority. ==> 오역이다. 주희는 자연의 섭리를 강조했는데, 일본인들은 이를 권위에 대한 절대적 복종으로 해석했다로 옮겨야 맞다.
(p.22) 많은 유학자들, 또는 유자(儒子)는 한학자이자 교사였다. 서양의 가르침은 그들 믿음의 핵심을 부정하므로 그들의 지위에 대해 직접적인 위협이 되었다. 따라서 그들의 관심은 서양의 사고를 소개하되 통제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하는 것이었다. Many of these Confucianists, or jusha, were teachers and doctors of Chinese medicine. Western learning, which contradicted some of their most cherished beliefs, was a direct threat to their status, so it was in their interest to see its promoters cut down to size. ==> 오역임. 우선 한학자이자 교사가 아님. 선생이자 한의사들(정확하게는 중국의학자들)이었다가 맞음. 그리고 통제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하는 것이라는 번역도 틀렸음. cut down to size는 어떤 사람이나 일을 별 볼일 없는 것으로 깎아내리는 것, 폄하하는 것, 절하(切下)하는 것을 뜻함. 서양 학문을 의도적으로 깎아내렸다는 뜻임.
(p.22) 폰 지볼트는 많은 일본 제자들에게 정성을 기울였다. A voracious collector of things Japanese, von Siebold had many devoted Japanese disciples. ==> 오역임. 지볼트가 일본 제자들에게 정성을 기울인 것이 아님. 지볼트를 스승으로 따르는 열성적인 일본 제자들이 많았다는 뜻임.
(pp.22-23) 글로비우스는 3년 후 감옥에서 죽었다. while Globius died in prison three years later, possibly by his own hand. ==> 누락. 아마도 자살한 것으로 보인다는 내용이 빠졌음.
(p.23) 가장 좋은 방법에 대한 이론을 발전시킨 인물이다. 제자를 해외에 내보내 공부시키려 했다는 죄목으로 감옥에 갇혔다. His teacher, Sakuma Shozan, who had developed theories, based on his Western knowledge, on the best ways to defend Japan against foreign incursions, was imprisoned for encouraging his pupil to study overseas. ==> 한 문장을 억지로 끊었다가 이상한 번역이 되었음. 사쿠마 쇼잔은 ... 이론을 발전시킨 인물로, 제자를 해외에 내보내...식으로 연결해서 옮겼어야 함.
(p.23) 출옥 후에 유럽스타일의 완장을 얹은 말을 타고 가다가 반 서양 광신자에 의해 살해당했다. After his release, he was murdered by anti-Western fanatics for riding his horse on a European-style saddle. ==> 오역임. 서양식 완장 얹은 말을 타고 가다가 암살당한 것이 아니라, 서양식 완장을 얹고 말을 탔다는 이유로 살해당한 것임. 이런 식의 오역이 정말 안 좋은데, 번역문을 읽으면 특별히 이상한 곳이 없다고 느끼니까 그냥 넘어가게 됨. 하지만 사실은 완전 오역.
(p.23) 그러나 대부분의 란가쿠샤들, 심지어 페리의 개항 요구에 타협적 해결책을 주장했던 사람들은 거의 정치적인 반역자가 아니었다. 대부분 정치적 업무를 수행하기에는 너무 조심스럽거나 너무 무관심했다. 거의 모두가 열렬한 애국자였고, 중국 중심의 개화 반대론을 비난함으로써 신유교의 복종 규칙을 믿었다. But most Dutch scholars, even those who advocated a compromise solution to the foreign crisis provoked by Perry’s arrival, were hardly political rebels. Most were too careful, or too indifferent, to be involved in political affairs. Almost all were ardent patriots anyway, who believed in the neo-Confucian rules of obedience even as they criticized Sino-centric obscurantism. ==> 사실 번역서의 이 대목을 읽다가 이상해서 원서를 찾아본 것임. ‘중국 중심의 개화 반대론을 비난함으로써 신유교의 복종 규칙을 믿었다’고? 아무리 되풀이 읽어도 뭔가 이상했음. 원서를 찾아보니 아니나 다를까, 오역! 하지만 난학자들은, 페리 제독의 도착으로 야기된 외국발 위기에 대해 적당히 타협해야 한다는 주장을 지지하는 이들조차 정치적 반도라고 보기는 어렵다. 대개 그들은 정치적 사건들에 대해 지나치게 조심스럽게 대하거나 지나치게 (정치적 파장 따위에는) 무관심했다. 난학자들 거의 대부분은 어쨌거나 열렬한 애국자들로, 중국 중심의 개화반대론을 비판하면서도 주자학에서 주장하는 권위에 대한 복종을 신념처럼 믿었다. 뭐 이런 얘기. 그러니 ‘비난함으로써 (...) 믿었다’는 괴상한 대목으로 인해 이 번역서의 번역이 엉망이라는 점을 알게 된 셈.
(p.23) 무역과 협상을 주도한 중재자들도 The keenest promoters of trade and compromise ==> 오역. (제한적이나마 개방을 통해) 무역을 하고 타협을 하자고 열성적으로 주장하던 이들도.
자, 이 정도로 엉망이다. 옮긴이 최은봉 교수(이화여자대학교 정외과 교수이자 한국사회역사학회 회장 역임)는 이대를 졸업하고 미국 OSU에서 박사를 땄다고 적혀 있다. 와... 놀라울 정도로 영어 독해 실력이 엉망이다. 번역서에서 한 구절이 이상해서 그 앞뒤로 두어 페이지를 찾아보았을 뿐인데, 저렇게 많은 오역이 나왔다. 뭐 별로 어려운 영어도 아니다. 그렇다면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이대 나와서 미국에서 정치학 박사까지 딴 교수의 영어실력을 의심해야 할까, 아니면 표현에 대한 고민이나 정확한 번역에 대한 의지 따위는 쓰레기통에 던져버린 채, 대충 번역해서 출판사에 던진 것일까, 그도 아니라면 혹시 대학원생들에게 번역시킨 뒤 넘긴 것일까? 모르겠다. 정답이 무엇이건 정말 창피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도대체 소위 교수란 작자들은 (나도 교수지만) 이띠위 번역을 왜 하는 것일까? 이런 책조차 제대로 번역하지 못하는 우리나라의 수준은 왜 이리 참담할까?
이 책의 원서는 Amazon에서 트레이드 페이퍼백과 킨들 eBook으로 판매 중이다. 처음 출간된 지 꽤 시간이 흘렀지만 Modern Library에서 계속 찍어내고 있다. 훌륭한 책은 이렇게 절판되지 않고 계속 나온다. 이안 부루마의 통찰이 궁금한 사람은 원서를 찾아보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