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에 글을 안 쓴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 그동안 많이 반겨주던 분들에게도 미안할 정도로 말이다.
그래도 서재에는 조용히 들어온다. 그러다가 비의 딸님의 리뷰를 보았다. 고시원에서 생활을 하며, 노량진, 고시원, 시험 이런 글들을 보면 쉽게 지나치지를 못 한다. 저게 내 얘기일까? 내 마음을 이야기할까? 하는 기대감에 보게 된다.
'환영'은 그렇게 눈에 들어온 소설이다. 이 소설은 리뷰가 80개 써질 정도로 많은 관심을 받은 소설이다.
줄거리는 이렇다. 윤영은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남편과 고시원에서 만나 아이를 낳았다. 그녀가 고시원에 오게 된 것은 여동생이 빚을 지고 떠났기 때문이다. 결국 남편과 옥탑방에서 살림을 차리지만, 공부를 하겠다고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남편, 다시 돈을 달라고 하는 식구들, 장애인 아기 등 무엇하나 그녀에게 희망적인 것이 없다. 그리고 어렵게 취직한 왕백숙집에서 돈을 위해 윤영은 결국 매춘을 하게 된다.
소설을 읽으며, 나에게 불쾌감을 주는 윤영과 그 등장인물들에 대해 곰곰히 생각했다. 그리고 그들과 싸우고 싶었다.
윤영은 갑자기 찾아온 시어머니를 피해 공사판 여인의 집에서 잠을 잤다. 그 여인은 윤영에게 이 곳은 햇빛이 들지 않으니 알람이 없으면 한 없이 잔다고 말했다.
내가 있는 이 곳 지하 고시원은 바로 앞 건물의 빛이 방으로 쏟아진다. 마치 달밤에 누가 나에게 조명을 비추는 것 같다. 바로 앞에 건물도 고시원이다. 대략 다섯 걸음 앞에 있다. 그리고 내가 보이는 시선의 한 2층 높이부터 방 창문들이 보인다. 그리고 12시가 넘으면 그곳에 불이 켜진다.(누가 켜는 지는 아직도 모르지만)
몇 달은 그래도 버텼다. 어둠이 익숙해 지면 다음에 그 공간을 갸냘픈 빛이 가득 채웠다. 그럼 눈은 그 빛에 익숙해 지고, 방이 밝아진다. 결국 누워도 잠이 잘 오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이런 고난에 지지 않는다. 다음 날 만물상에서 검은 비닐 봉지를 사서 창문에 완벽하게 틈 하나 없이 붙였다. 그 결과 낮에도 밤에도 창문만 닫으면 나는 바깥 세상과 완전히 격리 되었다.
그렇게 '공사판 여자의 알람 없으면 못 깨는 방'을 나는 만들었다.
윤영이가 나에게 물었다. 너는 나처럼 공부를 하지도 않고 얘만 보는 남편을 위해 돈을 벌어 봤냐고 말이다. 뭐라 대답해야 할까 고민했지만, 나도 그녀가 락스 때문에 시린 눈을 안고 백숙집 화장실을 청소하는 것처럼 그런 경험은 해 보았다고 말하고 싶다.
작년 여름 한참 더울 때, 더 이상 돈이 나올 곳이 없어서 일을 시작했다. 공부도 돈이 있어야 한다. 내가 있는 고시원 근처의 피시방이었다. 나도 윤영이처럼 불안했다. 그녀는 33살에 일을 구하기 힘들었다. 나 역시 그랬다. 36살의 나이에 알바 자리를 찾기 힘들었다.
주말 야간으로 일을 시작했다. 금요일 밤 9시부터 다음날 아침 8시까지 그렇게 일요일까지 반복이다. 카운터에만 앉아 있다가 책 한 줄이라도 더 볼 수 있겠지란 기대와 달리, 오자마자 피시방 앞 인도를 청소한다. 카운터에 앉마마자 들어오고 나가고 손님이 끝이 없다. 손님이 나가면 그 자리에 가서 먹은 음료, 음식을 치우고, 키보드를 퉁퉁 쳐서 먼지를 빼고 모니터 닦고, 그리고 자리 밑에 있는 과자 및 기타 모든 것들을 청소한다.
그것의 반복을 새벽 4시까지 한다. 그리고 손님이 덜 움직이는 것 같다고 느껴지면 약 100평 가량의 홀을 쓸고 대걸레로 닦는다. 빗자루가 짧아서 허리를 숙이고 쓸어야 하는데 다 끝나면 허리가 아프다. 마지막으로 화장실은 락스를 뿌리며 닦아야 한다. 락스의 시린 냄새 때문에 눈도 따갑다. 흡연실의 담배통까지 청소한다.
이 때쯤 되면 배 고픈 손님들이 컵라면을 주문한다.
컵라면은 정수기 물을 붓고, 뚜껑을 뗀 채로 전자렌지에 돌린다. 그래야 빠르게 익어서 손님들이 먹기가 편하다. 난 교육을 받았음에도 알바를 시작한지 며칠이 안 돼 바쁜 나머지 손님의 컵라면을 뚜껑을 떼지 않은 채 전자렌지 돌렸다.
여러분은 절대로 그러지 마시길. 컵라면의 뚜껑은 불이 붙는다. 갑자기 확하고 말이다. 어두운 조명의 피시방 안에서 그 불은 너무나도 환하게 주변을 비추었다. 마치 기적의 불꽃처럼 말이다. 전자렌지 앞 쪽에 앉아 있던 손님들도 마우스를 떨어트릴 정도로 놀라고 조금 떨어져 걸레질하던 나도 놀랬다.
급하게 컵라면을 꺼내 불을 끄고, 손님에게는 새로 컵라면을 해 주었다. 그리고 불이 붙었던 컵라면은 아까워서 버리지 못 해 내가 먹었다. 그리고 혼자서 실실 웃었다. 윤영이가 옥탑방 계단에 앉아 최악을 생각하며 혼자 웃듯이 나도 웃었다.
새벽까지 밤을 세고 아침을 맞이 하면 멍하고, 제 정신이 아니다. 돈도 좋지만 이러다가 골병들 것 같아서 3달 만에 그만 두었다.
윤영이의 자조적인 웃음이 보이는 것 같다. 자기는 남편을 위해, 아기를 위해, 그리고 가족들을 위해 짐승 같은 놈들이 위에 올라타는 것도 참고 버텼는데 나는 저 정도의 일에 힘들어 하니 말이다.
그런데 나는 윤영이를 만날 수 있다면 그녀의 남편에 대해 조금이나마 얘기해 주고 싶은 것이 있었다. 윤영이는 남편에게 화를 내고 모욕을 했다. 밥상을 엎거나, 핸드폰을 머리에 던지거나, 자는 얼굴에 흙을 뿌렸다. 하지만 그래도 남편은 바보같이 미안하다고만 했다.
나는 그게 참 마음 아팠다. 윤영이의 분노는 이해된다. 하지만 그녀가 남편과 더 솔직하게 얘기해서 서로 없고 힘들지만 격려해서 그 상황을 극복할 수는 없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나도 남편처럼 고시공부를 하고 있다. 공부를 할 때 가장 무서운 것은 공부가 되고 안 되고 문제가 아니다. 내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한 없이 갸냘픈 존재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나 역시 내가 결과를 내기를 나이든 우리 부모님은 한 없이 기다리고 계시다. 남편도 부담감을 심하게 느꼈을 것이다. 성공에 대해 집착할 수록 공부가 더욱 안 된다. 그게 스트레스로 이어지곤 한다. 내가 그랬으니 말이다.
윤영이는 무서운 희망이라고 했다. 하지만 무서운 희망은 없고, 희망은 무섭지 않다. 희망이 있지만 그걸 향해서 발버둥치고 가지 못하면 그것은 이 소설 제목처럼 환영에 불과하다.나도 속이고 남도 속이는 환영으로 바뀌어 버리는 것이다.
그녀의 남편에게 속상했던 것은 왜 희망을 환영으로 만드냐는 것이다. 기다리고 있는 가족들이 있다면 그리고 힘든 현실이 있다면 그는 거기서 일어서야 했다. 그것은 누구에게도 나눠야할 짐도 아니고, 그리고 누구에게도 힘들다고 말할 필요도 없다. 그건 자신의 몫이거든. 짊어져야 한다. 그리고 누가 뭐라든 그걸 짊어지고 걸어가야 한다.
그녀의 남편은 그러지를 못 했다. 그녀가 나가서 돈 버는 거에 안주해 버린 것이다. 그러니 그녀가 무슨 모독을 해도 그는 받아 들인 것 같다.
난 그녀의 분노도 이해한다. 마치 내 안에 그녀와 남편이 같이 사는 것처럼, 이렇게 어렵게 돈을 벌어서 공부를 하는 거면 고시원에 들어오면 퍼질 게 아니라 졸린 눈을 비벼가며 코피 터지게 공부해야 한다.
그런데 난 그게 안 되었다.너무 피곤해서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그러면 누워있는 내 몸을 향해 윤영은 막 욕을 한다. 왜 그러냐고 말이야. 무기력한 남편과 윤영이 항상 밤이면 뒤엉켜 내 속에서 대화를 한다.
이 소설을 통해서 나는 내 안의 비참한 것들과 마주할 수 있었다. 내가 어렴풋이 생각했던 것들이 윤영이와 그 남편을 통해서 구체적인 살아 있는 인물로 나타났다고나 할까?
작가에게 너무나 고맙다. 하지만 소설을 쓴 작가의 인물상에는 반대한다. '환영'에서 모든 인물은 반성도 없고, 개혁도 없고 마치 불행의 바닥으로 달리듯이 쭉 가버린다. 난 인간은 그렇게 고정적인 형태로 가버리는 삶을 살 수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렇다고 무조건적인 해피 엔딩의 소설을 바라는 것이 아니다.
루쉰 선생은 희망은 없다고 말하면서도 걸어가는 것으로 길이 생기듯 희망 역시 걷는 속에 생긴다고 하였다.
인간의 삶은 변화한다. 그리고 변할 수 있다. 새벽에 고시원에 앉아 홀로 울 때도 있지만, 난 내가 변할 수 있고, 그리고 그 결과를 낼 수 있다고 여긴다.
이 소설이 나의 어둠을 비춘다면 거기에 지지 않기 위해 그 반발력으로 내 속의 빛이 뿜어져 나옴을 느낀다.
윤영이도 남편도 그리고 소설 속의 모든 인물이 부분적인 내 자신이다.
그리고 그런 내 자신과 더불어 그것과 싸우려는 내 자신이 있다.
이 둘의 조화를 통해 나는 다시 일어선다. 그리고 싸우러 가는 것이다.
나는 누구보다 참는 건 잘 했다. 누구보다도 질길 수 있었다. 다시 시작이었다.
밑에 사진은 고시원 담벼락에 대학생들이 재능기부를 해서 그려준 그림이다. 보고 있으면 왠지 흐뭇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