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읽는 도스토옙스키다. <지하로부터의 수기>는 도스토옙스키를 처음 접할 때 읽기 좋은 책이다. 개인적으론 <죄와 벌> 못지않게 작가의 사상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지하로부터의 수기>는 총 2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주인공은 '나'이다. 그는 퇴직 관료로서 줄곧 지하에서 살고 있었는데 독자들을 향해 자신이 누구인지, 왜 이곳 지하에 홀로 틀어박혀 있게 되었는지를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마흔 살 정도 먹은 주인공은 예전엔 관료였지만, 먼 친척으로부터 많은 유산을 물려받게 되자 다니던 직장을 때려치우고 지하 골방에 고립된 채 살아간다. 첫 장면부터 스스로를 '병자'라 칭하는 '나'는 독자들에게 인간의 이상과 그 거짓됨을 역설한다. 1부에서는 이러한 '나'의 주장이 계속되는데, 여기서 인상 깊었던 점은 주인공의 화법이었다. 그는 처음에는 긍정하다가 나중에 가서는 거짓말이었다며 부정한다. 딱 결론을 내리지 않고 자꾸만 자신의 진술을 번복하는데, 읽는 사람 입장에선 이만큼 답답한 게 없다. 그래서 몇몇 사람들 중에는 1부를 읽고 도대체 이게 뭔 소리인지 모르겠다며 불평하는데, 사실 이는 화자가 줄곧 주장하고 있는 '사상'을 잘 파악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정확한 건 아니지만, 내 생각에 주인공이 자꾸 말을 바꾸는 건 그의 망상과 과장하며 말하는 습관 때문도 있지만, 이런 그의 양면성은 '나'가 주장했던, 그러니까 인간은 이성적인 것 같아도 동시에 비이성적인 존재라는 주장을 보여주는 사례이자 행동적 특성이라고 본다. 작중 '나'는 인간이란 자신의 이익에 따라 행동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뻔히 자기에게 득이 되는 상황임에도 일부러 변덕을 부려 '의식적으로' 불리한(안 좋은) 선택을 하기도 한다고 주장한다. 충분히 좋게 흘러갈 일을, 욕망과 감정에 휘둘려 어리석은 선택을 한다는 거다. 겉보기엔 말도 안 되는 일인 것 같지만, 실제로 삶을 살다 보면 우리는 범죄자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이런 비이성적인 행동과 선택을 하는 걸 본다.
이어서 '나'는 자기를 포함한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한낱 피아노의 부품, 기계의 한 부품이 되기 싫어서 일부러 반항을 저지른다고 말한다. 쉽게 말해 보통의 존재가 아닌, 좀 더 남들과 다른 특별한 존재가 되고 싶어 정해진 길을 벗어난다는 것이다. 여기서 나온 게 바로 '2+2=4' 공식이다. 원래 수학은 이성적이고 답이 정해져 있다. 4가 아닌 모든 것은 틀렸다. <지하로부터의 수기>가 나온 당시 러시아에선 뒤늦게 산업화가 태동하고 있었다. 더욱이 발전하는 산업화를 계산에 필수였던 수학과 과학이 자연스레 중요시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세상은 불확실한 '인간'이 아닌, 정확한 답이 정해져 있고 체계적인 수학과 과학에 점차 의지하고, 믿게 되었다. 그도 그럴 게, 공식만 잘 따르면 실패할 일도 없고 그냥 정해진 대로 움직이면 되니 말이다. 더 이상 사람들은 생각할 필요가 없다. 인간적인 문제 때문에 고민하고 괴로워할 필요도 없다. 점차 사람들은 스스로를 '이성적'이라 생각하게 되었고 이성을 추앙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모두가 '똑같이' 정해진 답에 따라 정해진 길을 간다(앞서 말했듯, 2+2=4이다. 다른 답, 다른 길은 없다. 4만이 정답이다). 그렇게 인간은 그 사람 존재 자체가 아니라, 국가나 사회 구성원으로서 '숫자'에 불과하게 되었다. 지하 생활자인 '나'는 이것을 비판한다. 과연 인간은 그저 숫자에 불과할까? 정말 인간이라는 존재를 수치로 환산할 수 있는 걸까?? 그리고 과연 우리에게는 모든 걸 계산하고 분류할 수 있는 능력과 '이성'을 갖고 있는 걸까??? 지하 생활자는 스스로를 지하에 가둬놓음으로써 이러한 주장이 틀렸음을 몸소 보여준다. 또한 자신의 주장이 절대적으로 맞는 건지 쉽게 단언하지 않는다. 인간은 아무리 '2+2=4'라는 공식, 즉 이성이 있더라도 자기 맘대로 이를 부정할 수 있으며, 스스로가 숫자가 아님을-한낱 개미가 아님을 보여주기 위해 반항할 수 있는 존재다. 왜냐하면 인간에게는 '삶'이,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삶과 '자유'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주인공인 지하 생활자는 훌륭한 사상가인 걸까? 한 마디로 존경받을 만한 인물인 걸까?? 나는 아니라고 본다. 그의 주장에는 일리가 있는 부분도 있지만 사상을 떠나서 지하 생활자에겐 본질적인 것이 없다. 바로 앞서 말한 '삶'이다. 지하 생활자에겐 문제의식만 있을 뿐, 이를 해결하기 위해 꼭 필요한 '삶'과 '자유'가 없다. 그는 고립되어 있으며 혼자다. 극단적인 집단주의도 나쁘지만, 극단적인 개인주의 역시 옳지 않다. 거기다 지하 생활자는 가능성만 얘기하지, 실제로 행동하지 않는다. 그는 자기가 항상 '벽' 앞에 멈춰 서 있다고 말한다. 남들은 그런 벽 앞에서 몸을 돌리지만, 지하 생활자는 소극적인 저항으로서 벽 앞에 서서 버틴다. 하지만 그뿐, 지하 생활자는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사상은 거창하나 실상은 겁쟁이인 것이다. 2부의 젊은 시절 이야기에서도 알 수 있듯이, 지하 생활자는 현실에서는 그저 가난하고 옹졸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다.
거기에 더해, 초반부에 말했던 지하생활자의 사상은 인간 개인의 소중함을 보여주지만, 이를 극단적으로 추구할 경우 자칫 오만함에 빠지기 쉽다. 자기 자신은 그 누구보다 소중하나, 다른 사람은 그렇지 않다. 그들은 바보에 멍청이니까 무시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이럴 경우 대개 사회에서는 물론이고 주변인들로부터 소외되는데, 지하생활자 역시 이런 케이스에 속한다. 그는 젊었을 적에 관청에서 근무했을 때도 그렇고 마흔이 된 지금까지 누구와도 제대로 어울린 적이 없다. 타인을 끊임없이 의심하고 무시한다. 이런 지하생활자에겐 당연히 삶도 없고, 자유도 없다. 자신이 살고 있는 지하처럼 암흑과 고립만 있다. 놀랍게도 이런 현실은 지하생활자가 그토록 외친 사상과 완전히 정반대이다. 그렇기에 주인공인 '나'는 사상가라기보다는 문제적 인간에 가깝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하생활자의 사상이나 삶이 완전히 틀렸다고는 할 수 없다. 2부에서 창녀 '리자'와의 이야기를 보면 그에게도 구원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사랑'이다. 도스토옙스키에게 있어 인간이란 지하생활자처럼 비열하고 모순적이며, 문제적 존재인 것 같다. 그리고 그 존재에게 가장 필요한 건 사랑이라고 본 듯하다. 이성의 범주를 넘어선, 모든 것을 뛰어넘는 사랑만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는 거다. 마지막 장면에서 지하생활자는 자신의 비참한 현실을 목도한 리자를 매몰차게 대하지만, 리자는 그런 그를 아무 말 없이 안아준다. 이때 지하생활자가 울면서 했던 고백 - '나는 착한 사람이 되고 싶었어!'라는 말을 통해 악질적인 인간 역시 사랑을 원했음을, 그가 외쳤던 사상도 결국엔 타인을 향한 사랑을 갈구하고자 했던 일종의 '반항'이었음이 드러난다.
결론적으로, <지하로부터의 수기>는 도스토옙스키의 다른 작품들에 비해 짧고 거칠지만 도스토옙스키만의 사상을 제대로 느낄 수 있었던 책이었다. 도스토옙스키를 처음 접해보거나, 혹은 이미 충분히 알고 있는 분이라고 다시 한번 읽어보시는 걸 추천드린다. 번역 자체도 괜찮기 때문에 강추한다!
나는 병자다.. 나는 못된 인간이다. 영 매력이라고는 없는. 인간이다.
예컨대 내게는 친구 하나가 있다.. 아니, 그는 여러분의 친구이기도 하다. 그자와 친구 아닌 사람을 찾는 것이 더 빠를 것이다! 여하튼 그는 어떤 일을 벌이기에 앞서 자신이 이성과 진리에 따라 행동해야 하는 이유를 유창하게 늘어놓을 것이다. 어디 그뿐일까? 으레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추구해야 할 이익이 무엇인지 열변을 토하며, 자기 이익이나 참된 미덕의 의미조차 모르는 바보들을 실컷 비웃으며 질타할 것이다. 그리고는 정확히 15분 뒤, 별다른 계기도 없이, 자기의 모든 이익보다 더 강한 어떤 내적 충동에 이끌려, 방금 자기가 한 말과는 정반대로 행동할 것이다. 방금 했던 말과 정반대 입장을 취하며 이성의 법칙을 거스르고 자기 이익에도 반하는, 한마디로 모든 것에 반기를 들 것이다.- P53
다시 말해 인간은 그가 누가 됐든 간에 이성과 이익을 좇아 행동하지 않는다. 인간은 언제 어디서나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기를 원한다. 심지어 자신의. 이익에 반하는 것을 원할 수도 있으며, 때때로 반드시 그렇게 해야만 한다(이것이 내 지론이다).- P59
어쩌면 인간에게는 자기에게 가장 이로운 것보다 더 소중한 무언가가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 논리를 따르자면, 모든 이익을 다 합친 것보다도 더 중요하고 더 이로운, 그런 궁극의 이익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닐까. 인간은 그 이익을 위해 필요하다면 이성, 명예, 평온, 번영 같은 모든 법칙을 기꺼이 거스를 것이다. 한마디로 그 모든 아름답고 유용한 것들을 저버리면서까지, 자신에게 가장 소중하고 근원적인 이익을 얻으려 할 것이다.- P54
한마디로 막다른 벽에 다다르거나, 끔찍하지만 달리 도리가 없거나, 빠져나갈 구멍이 없으며 난 결코 다른 사람이 될 수 없다고 느끼는 데서 쾌락을 느낀다. 설사 다른 누군가로 변할 시간과 믿음이 남아 있더라도 당신은 스스로 변하기를 원치 않을 것이며, 매번 양보해 변하고 싶다 한들 실제로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이다. 사실상 변할 만한 구석이 없기 때문이다.- P29
난 그저 입으로 나불대고 머릿속으로 꿈만 꿀 뿐이야. 정말 내가 원하는 건 뭔지 알아? 너희 모두 지옥에나 떨어지라는 거야. 그게 다야! 날 좀 내버려둬. 성가신 꼴만 안 볼 수 있다면, 난 지금 당장 누가 푼돈만 쥐여 줘도 온 세상을 팔아치울 테다. 봐, 세상이야 망해버리든 말든 내가 이깟 차 한 잔을 못 마실 것 같아? 세상 따위 당장 망해버리라지! 차만 마실 수 있으면 그만이라고 말할 테야. 이제 알았어? 그래, 난 파렴치하고 비열하고 이기적으로 게을러터진 놈이야.- P217
그 이상한 일이란 다름 아닌, 리자가 그토록 내게 모욕당하고 짓밟히면서도 내 상상 이상으로 훨씬 많은 것을 이해하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녀는 이 모든 독설을 견디며, 진정 사랑에 빠진 여자가 으레 가장 먼저 직감하게 되는 단 하나의 진실을 꿰뚫어 보았다. 바로 내가 끔찍하도록 불행하다는 것이었다. (중략) "날 왜 내버려 두질 않는 거야. 나도..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어!"- P220
소설에는 영웅이 필요한 법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일부러’ 반영웅에게서 볼 법한 모든 특성을 모아 놓았고, 무엇보다도 이 모든 것은 극도로 불쾌한 인상을 자아낼 것이다. 우리는 모두 삶으로부터 단절되어 있고 모두 다리를 절룩거리는 처지이기 때문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모두 불완전한 것이다. 심지어 지나치게 단절된 나머지 현실의 살아 숨 쉬는 삶을 혐오하고, 누군가 우리에게 그것을 일깨워 주려 하면 참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우리는 현실의 살아 숨 쉬는 삶을 거의 노역이나 무슨 복무처럼 여기기에 이르렀고, 다들 책에 적힌 대로 사는 것이 훨씬 낫다고 속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도 왜 우리는 이따금 소란을 피우는 것일까? 무슨 이유로 부질없는 고집을 피우고, 무엇을 요구하는 것일까? 우리 스스로도 알지 못한다. 정작 부질없는 요구가 이뤄지면 오히려 우리에게는 독이 되고 말 텐데 말이다.- P229
우리에게 이를테면 더 많은 자율성을 주시라. 우리의 손을 풀어주고 활동 범위를 넓히고 감독을 소홀히 해보시라. 그러면 우리는.. 맹세컨대 다시 구속해달라고 간청할 것이다.
여러분은 필시 내가 하는 말에 화를 내고 소리치고 발을 구르며 이렇게 말할 것이다.
‘당신 자신에 대해서만, 지하실에 있는 당신의 그 비참함에 대해서나 말할 것이지, 감히 ‘우리 모두’라고 말하지 마시오’
신사 숙녀 여러분, 부디 양해하시기를. 나는 ‘우리 모두‘라는 말로써 나 자신을 합리화하려는 것이 아니다. 특히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당신들이 감히 절반도 밀고 나가지 못한 것을 극단적으로 밀어붙였을 따름이다. 더욱이 당신들은 자신의 비겁함을 분별력으로 포장하고 자신을 기만하며 위로했다. 그러니 어쩌면 내가 당신들보다 더 살아 숨 쉬고 있는 셈이리라.- P229
자, 한번 똑똑히 살펴 보시라! 지금 ‘살아 숨 쉬는 것’이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그것이 무엇이며 어떻게 불리는지조차 모르지 않는가? 당장 책이 없다고 가정해 보라. 우리는 즉시 혼란스러워하며 길을 잃을 것이다. 어디에 의지해야 할지, 무엇을 붙잡고 버텨야 할지 모를 것이다. 무엇을 사랑하고 증오해야 할지, 무엇을 존경하고 경멸해야 할지조차 알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고유한’ 인간이 되는 것조차, 진정 제 살과 피를 지닌 인간이 되는 것조차 고역으로 여긴다. 우리는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을 부끄럽고 수치스럽게 여기며,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는 기상천외한 ‘보편적 인간‘이라는 틀에 자신을 욱여넣으려 안간힘을 쓴다.- P2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