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이 마음에 들어 읽게 된 책이다.'절망이 벤치에 앉아 있다'라니, 뭔가 기분이 묘하다. 그렇게 무작정 읽게 된 작품인데 의외로 좋았다. 말 그대로 '몰두'하면서 읽었던 것 같다. 내가 시집에 이렇게 진심이었나 싶을 정도로 말이다. 저자인 '자크 프레베르(Jacques Prévert, 1900년 2월 4일 ~ 1977년 4월 11일)'는 프랑스의 유명한 시인이자 영화 시나리오 작가이다. 우리나라에선 샹송 <고엽(Les feuilles mortes)>을 쓴 작가로 유명하다. 자크 프레베르의 시는 다른 작품들과 달리 '명확한 단어'로 쓰여있다. 즉, 시에서 흔히 보이는 어렵고 난해한 시적 언어가 거의 없다. 보통 이런 경우 시가 밋밋해지기 마련인데, 자크 프레베르의 시는 그렇지 않다. 오히려 시적 상황이 더욱 생생하게 우리 눈앞에 보인다. 게다가 명확해서인지 시를 읽는데 큰 장애물이 없다. 관련 지식이 없어도 누구나 쉽게 읽고 이해할 수 있다.
자크 프레베르의 시들은 대체로 짧고 강렬하다. 문장 하나하나마다 여러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것 같다. 시의 주제도 그리 거창하지도 않고 삶의 기쁨과 주변에 있는 것들을 향한 따뜻한 시선이 엿보이는 시들이 많다. 때문에 그의 시를 보면 '읽는다'기보다는 '느낀다'는 게 뭔지 알 수 있다.
그리고 짧으면서 강렬한 시가 많아서 그런지 개인적으로 일본의 '하이쿠(俳句)'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이쿠 역시 5,7,5 음으로 짧으면서도 큰 울림을 준다. 또한 격언 내지 명언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한다.
이런 시적 특징 말고도 자크 프레베르의 시에서는 어린이들의 순수함을 파괴하는 어른들을 비난하는 얘기가 많다. 그에게 있어 어른은 '콘크리트'와 같이 딱딱한 사고방식에 묻혀 사는 사람이며, 그런 어른들이 '새'이자 '행복'을 추구하는 어린이들의 상상력과 동심, 그리고 순수함을 파괴하고 있다. 앞서 나온 <바른 길>에서도 그렇고, 위의 <열등생>라는 시가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자크 프레베르의 시에서는 주로 연속적인 움직임이 자주 보인다. 반복과 연속이 계속되면서 마치 영화의 연속 스틸컷을 보는 것 같다. 위의 <메시지>라는 시가 대표적이다. 이걸 연속적인 장면이라 생각하고 읽게 되면 마치 '찰칵 찰칵'하는 소리와 함께 인물이 움직이는 것 같다. 자크 프레베르가 영화 시나리오 작가이기도 해서 그런 걸까? 이것 역시 인상적이다.
여담으로 유머러스한 시도 있었다. 프랑스 왕정을 비꼬는 듯한 <멋진 가문>도 그러한데, 왕들의 이름이 하나같이 '루이 XX세' 이러니까 이걸 두고 비꼰 거다. 그 밖에도 주기도문을 변형해서 오히려 하느님보고 하늘에 계속 있으라고도 말한다. 굳이 신이 없어도 우리는 이곳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으니, 와 봤자 쓸데없다고 말이다.
전체적으로 자크 프레베르의 시집, <절망이 벤치에 앉아 있다>는 시를 좋아하는 걸 떠나서 문학을 어느 정도 좋아하는 사람이면 최고인 책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명언이나 짧지만 인상적인 글들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더욱 재밌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누누이 말했지만 이해하기 쉬운 시이기 때문에 아마 누구나 거부감 없이 읽을 수 있으리라 본다!
알리칸테
탁자 위에 오렌지 한 개
양탄자 위에 너의 옷
내 침대 속의 너
지금의 감미로운 선물
밤의 신선함
내 삶의 따뜻함
바른 길
매 킬로미터마다
매년마다
머리가 꽉 막힌 늙은이들이
콘크리트처럼 굳은 몸짓으로
어린애들에게 길을
갈 길을 가리킨다.
메시지
누군가 연 문
누군가 닫은 문
누군가 앉은 의자
누군가 쓰다듬은 고양이
누군가 깨문 과일
누군가 읽은 편지
누군가 넘어뜨린 의자
누군가 연 문
누군가 아직 달리고 있는 길
누군가 건너지르는 숲
누군가 몸을 던지는 강물
누군가 죽은 병원
열등생
그는 머리로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가슴으로는 그렇다고 말한다
그는 제가 좋아하는 것에는 그렇다고 하고
그는 선생에게는 아니라고 한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서고
선생은 그에게 질문을 한다
별의별 질문을 한다
문득 그는 폭소를 터뜨린다
그리고 모든 것을 다 지워버린다
숫자도 단어도
날짜도 이름도
문장도 함정도
선생님의 위협에도 아랑곳없이
우등생 아이들의 야유 속에서
모든 색깔의 분필들을 집어 들고
불행의 흑판에
행복의 얼굴을 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