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정체성의 일관된 서사를 만들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애쓰는가. 비교적 ‘나‘에 가까운 행위를 선택하며, ‘나답지 않다고 생각되는 행위는 버리거나 반복하며 정체성을 유지해나간다. 그러나 이것은 말을 바꾸면 수많은 ‘나‘답지 않은 것들을 희생시켜가며 매우 빈약한 ‘나‘다움을 간신히 유지해나간다는 말과 같지 않을까.
우리 시대의 권력은 ‘억압하면서 오는 것이 아니라 ‘생산‘하면서 다가온다는 점일 터이다. 자본이라는 권력은 각 개인에게 ‘너는 충분히 너자신을 네 뜻대로 움직일 수 있다‘는 ‘자유의 이름‘으로 다가왔고, 이러한 자유주의적 신화는 억압이 아니라 강렬한 유혹으로 이 시대 개인의 내면을 사로잡았다.
"물론 진실은 언제나 건강한 자들이 아니라 앓는 자들의 편에 있다."
우리는 이미 20세기 초, 프로이트가 마주했던 히스테리자에게서 고통과 쾌락이 동시에 존재할 수 있음을 확인하지 않았는가. 히스테리자는 몸의 고통 때문에 괴로워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코 그 고통이 멈추는 것도 바라지 않는다. 고통이 쾌락을 산출하는 근거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주이상스‘ 이다.
"시를 자아와 세계의 동일시라는 상투어로 정의하는 관행은 오래되고도 끈질긴 것이다. 이를 자아의 세계화(투사)라 부르건 세계의 자아화(동화)라 부르건 자아는 세계 전체를 틀 짓는 강력한 근거였다. 그러나 상기했듯이 이로써 세계의 실상을 드러낼 수 없다."라고 정리하며 이제는 ‘자아 중심의 시론‘ 대신 ‘주체 중심의 시론‘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역설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