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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아
  • 자살
  • 에두아르 르베
  • 14,400원 (10%800)
  • 2023-03-10
  • : 12,301

이 책은 에드아르 르베(Édouard Levé, 1965~2007)가 2007년 10월 15일 자살하기 며칠 전에 출판사 P.O.L에 송고한 유작이다. 아니 유작이라기보다는 문학적 유서이다. “한 사람의 삶을 응축”한 “글과 삶의 방향을 일치시키는 작가의 선택”이라는 편집자의 말은 일생을 끝장내기에 앞서 이글을 써내려갔을 르베의 의지와는 다른, 마치 이 글을 자살의 실천을 증언하는 글처럼 만들어버린다고 여겨진다. 이와 달리 “죽음이라는 소강상태가 자신의 삶의 고통스러운 동요를 이겼음”에 대한 이해의 요구이고, 남겨진 사람들을 위한 애석함이며, 삶을 보다 강렬하게 인식하도록 하는 다독임의 유서라고 이해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자살』이라는 책을 읽으며 죽음이라는 끝에 이를 때까지 살아야 할 이유를 발견하기 위해 읽고 있다는 것은 모순처럼 들릴 수 있겠지만, 한 인간이 자기 살해를 더는 회피할 수 없도록 한 이유 속에서 그것에 이르지 않을 틈을 찾아낼 수 있기를 바라는 간절함이 있기 때문이다. 르베는 자신의 죽음 이후에 자신의 삶을 이야기할 제3의 목소리로 “그저 살고 싶다는 욕구가 더는 동기를 부여할 수 없다는 사실로부터 온 것”이었음을, 또한 “삶의 부조리함을 수용하고”, 그 부조리함 속에서 완결된 것들의 일관성을 실현할 수 없음을 인식한 자가 “죽음을 통해 자기 삶의 일관성을 부여”하고자 한 실현임을 그저 드러내 보여주고자 한 것으로 읽힌다. 때문에 그 어떤 설득의 장황한 설명도 없으며, 감정적 광기의 열정도 없다. 삶을 구성했던 일련의 사건들에서 아무런 의미도 찾을 수 없게 된 자의 이 곳이 아닌 그 어떤 저곳, 진정 생명력이 들끓는 곳, 죽음이 삶을 구현한다고 믿은 자의 하나의 완성으로서의 실천적 행위였음을 그저 시선으로 쫓을 수 있을 따름이다.

 

“떠남으로써 음성(陰性)적인 아름다움에 안착”한 르베의 삶의 편린들에 집요하게 달라붙은 명석한 고독을 따라가다 ‘절망적 확신 속에는 이미 반항이 있다’는 카뮈의 말, 생에 대한 희망의 찬가가 얼마나 허약한 웅변인지를 생각한다. 죽음이라는 부조리 앞에서 그 부정성을 명료하게 인식하며 끊임없는 투쟁의 성실함, 그 자체만으로 인간의 마음을 가득 채울 수 있음을 희망차게 역설하는 카뮈의 부조리한 인간의 세계로의 복귀는 아무런 유혹의 힘도 발휘하지 못한다. 메마른 불모의 길에서조차 생의 희망을 길어 올리는 그 초인이 지닌 꺾이지 않는 희망은 대체 어디서 출현하는 것일까? 공허로 더욱 가득해지기만 한다. 인간 개체와 세계 사이의 불일치, 삶을 끝장내는 죽음이라는 원초적 부조리를 삶에 껴안고 그 불화를 온 몸으로 견뎌내며 살아내야 한다는 카뮈의 영웅적 삶이 과연 생의 의미가 될 수 있을까?

 

르베는 자신이 자살에 이를 수밖에 없음을, 내면의 생김새, 취향, 사교 관계, 일화적 사건들의 장면들을 통해 진실로 원하지 않았음에도 죽음을 추월할 수밖에 없는 인간을 묘사한다. 그는 삶을 부정하지 않았지만 “미지에 대한 확고한 취향이 있었음을, 다른 쪽에 무엇인가 존재한다면 여기보다 나으리라 확신”했음을 말한다. 그는 이 생에서 의미를 찾는 것을 체념한다. 이 생의 부조리함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부조리를 받아들인 자가 그 부조리에 굴복하는 것은 진정 부조리한 인간이 아니라고 카뮈는 비난하지만 그 부조리함을 수용하는 것은 불가항력이기에 부조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부조리한 인간의 긑판왕인 『성(城)』의 측량기사 K 조차도 반복되는 실패의 여정을 거듭하고 마침내 도덕과 논리, 정신의 진실들을 저버리고 자신의 비정상적인 희망이라는, 부당함과 증오의 뒤에 무관심한 얼굴을 한 신의 은총이라는 사막 속으로 들어가려 하지 않았는가? 그래서 카뮈는 이를 부조리에 굴복하고 신의 세계라는 비약으로 향했다고 카프카의 소설을 부조리의 소설에서 제외하려한다. 인간은 어디까지 그 모순의 생을 이어가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생의 끝은 죽음이다. 죽음은 부조리든 모순이든 그 어떤 것도 무의미한 산 자들의 언어일 뿐이다. 그 죽음이 자살이 되었건 병사이건, 사고사이건, 자연사이건 간에 그저 동일한 끝이라는 점에서 같다. 카뮈는 자유의지를 말하지만 그 자유의지라는 것이 과연 인간에 속하는 것인지 정말 논란이 많은 개념이다. 끝의 시간을 선택하는 것, 이것이 운명에 저항하는 가장 부조리한 극한의 몸짓 아닐까?

 


르베는 자신의 자살을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어쩌면 진화의 우발적인 흔적인, 결함이 있는 고리였을 것이다. 다시 꽃이 피는 운명을 지지 않은 일시적인 변칙”이라고. 그렇다면 이것은 모순으로 가득한 자연의 당위이다. 그는 자신을 제외한 누구도 죽음보다 큰 삶에 대한 의욕을 줄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는 자신의 자살에 대한 이유를 열거해본다. 산다는 것의 피곤함과 그를 따라다닐 흔적에 대한 거부감, 공허함, 그리곤 자살하는 데 이유가 있을까라고 묻는다. 어느 순간부터 죽음은 삶의 죽음이었으며, 자살은 “죽음의 삶의 구현”이라고 믿게 된 인간에게 일생이라는 유한한 시간은 소용이 없어진다. 그는 희망을 주는 환상들(영원성에 대한 믿음 등)을 거부한다. 그는 어쩌면 폐허의 미학에 매료된 것인지도 모른다. 의도되지도, 관리하지도 않아 “무너진 이후에도 여전히 서 있는 폐허의 아름다움”은 앞선 떠남의 음성적 아름다움과 닮아있다. 르베에게는 자살이란 이처럼 부조리의 철저한 긍정이지 카뮈의 말처럼 부조리의 부정이 아니다.

 

“흐린 날씨, 겨울, 비, 혹은 추위를 불쾌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럴 때 자연은 자신의 기분에 일치되는 것처럼 보였”으며, 이러한 성향은 그의 유폐가 이상하게 보일 것을 걱정하지 않도록 보호의 조건이 되어주었다. 나는 그 어떤 종교적 도덕적 논리나 현상학적 정당성의 변이나 실존주의자들의 죽음의 부정적 혐오에도 불구하고 세상에서 자신을 지워버리는 자들의 행위를 반박하고 싶지 않다. 이 유서의 마지막에 아내와 지인들이 느낄 외로움과 공허함에 대한 애석의 표현이 있으며, 물론 이 유감의 표현은 우리들의 마음을 쓰라리게 하지만, 결국 이러한 타자의 죽음에 대해 느껴지는 고통도 사라지고 말 것이다.

 

그는 자살의 이기적 측면을 부정하지 않는다. 아마 자살을 앞둔 그에게 가장 고심을 안겨준 것이 가족과 공동체에 대한 책임이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삶은 죽음을 이기지 못했다. 내일을 기대함으로써 오늘을 소모하는 연기(延期이자 演技)는 아마도 그에게는 가장 큰 고통이었을 것이다. 그는 자살을 통해 자신을 완전히 지움으로써 자신의 자유를 확인하려했는지도 모른다. “정말로 인간에게 진지한 철학적 유일의 문제는 인생이 굳이 살만한 것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것”이라고 말했던 카뮈의 선언처럼 이 질문 뒤에는 우리들에게 삶의 진정한 가치를 살아내던가, 아니면 결정적 행위로서 끝장내던가 하나의 선택을 하라고 말한다. 어떤 결정을 내렸는가? 살아내기로 했는가? 그렇다면 세계의 부조리함에 넋두리는 소용없으니 그 모순을 안고 반복되는 실패와 실의가 고통을 안길지언정 저 시지포스처럼 “캄캄한 산의 광물조각 하나도 하나의 세계”임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자유를 입증하는 인간의 신성을 보여주기 위해 자신을 지우는 것이 어찌 문제가 될 수 있겠는가? 나는 르베의 이 아무런 자기 정당화도 없는 글에서 더 이상 살아내야 할 이유를 발견하는 일을 그만두기로 했다. 다만 고통을 살아내는 것이 가능하리라는, 그리고 사회적 책임감에 대한 작은 균열을 보았다는 것으로 만족하련다. 인간은 정말 항상 잘못 판단하는 존재인가? 정말 최악은 무엇인가? 존재의 강약과 광협은 어떻게 인식되는 것일까? 내 존재의 가벼움과 협소함이 더 없이 강렬한 감정으로 다가올 때 우리는 대체 어떤 선택을 하여야 하는 것일까? 르베와 카뮈를 함께 읽으면서 이 두 결정적 길의 하나를 선택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들은 이 사이에서 멈칫거리며 영원히 오지 않을 그 부조리의 끝을 부정하며 사는 것일 게다. 그 영원성의 환상을 머금은 채. 뒤척이다 희미한 빛을 느끼며 깨어있음을 자각하곤 다시 이 세계에서의 저주스러운 반복을 이어간다. 르베의 실패없는 치밀한 결행의 순간이 당분간 내게서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

 

르베의 아내가 서랍에서 발견한 그의 삶이 응축된 14쪽에 이르는 삼행시 중 몇 구절을 옮기며 맺는다.

 

피곤은 나를 진정시키고

권태는 나를 낙담시키고

고갈은 나를 멈춰 세운다

 

도착하는 것은 나를 사로잡고

보관하는 것은 나를 안정시키고

파괴하는 것은 나를 가볍게 한다

 

나이는 나를 엄습하고

젊음은 나를 떠나고

기억은 나에게 남는다

 

행복은 나를 선행하고

슬픔은 나를 뒤 따르고

죽음은 나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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