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파시즘 사회에 놓인 과제들, 그리고 민주주의 장애물 신오적(新五賊) 해체를 위한 논의
2026년이라는 시대는 1970년 폐간 이전의 《사상계》의 논조와 다를 수밖에 없다. 냉전이데올로기에 기생하여 국민대중을 자신들의 사적 이익을 위해 찍어 누르던, 폭력을 지배수단으로 하던 공포시대에서는 문자 그대로 이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저항 정신이 바탕이었다. 독재 권력이 횡행하던 시대에서 민주주의 기반의 사회로 이행했다는 관점에 비록 많은 착오가 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김누리 교수(중앙대 독일연구소 소장)의 말처럼 ‘제도로서의 파시즘’적 형태에서 비교적 건전한 민주주의 법제도로 이행되었으니 절반은 옳은 이해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태도로서의 파시즘’까지 사라진 것은 아닌 상태에 여전히 놓여있기에 이 사회에 비판 정신의 뿌리가 다른 것은 아닐 것이다.
“수구란, 낡은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대체로 외세와 영합하여 기회주의적으로 행동하는 정파를 지칭한다. 한국정치의 비극은 좋은 보수가 없었다는 데에 있다.”
이러한 지형에서 사상계에 거는 독자들의 기대는 이 사회의 새로운 질서 구축을 위한 다양한 상상들에 기초한 요구일 것이다. 그렇다고 과거를 깡그리 지워버리자는 것이 아니라, 이정옥(대구카톨릭대)교수와 김누리교수의 지적처럼 “계승하면서 동시에 극복한다”는 의미로서의 지양(止揚), 즉 “과거와 만날 때 지양하면서 현재와 만날 때 비판하고, 미래와 만날 때 상상해야 하는” 것이라는 의미에서 말이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극복했다고 여겼던 파시즘, 권위주의와 독재의 잔재가 여전히 태도로서 잔존하며 이 사회의 온갖 누추함과 볼품없음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따라서 권력비판과 자본비판이라는 성숙한 시민적 역량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게 요구되는 시절이기도 하다. 인간 역사는 바로 이 지양을 망각했을 때 벌어지는 야만의 출현이 없었던 적이 없었음을 입증하고 있듯이.
■ 우리사회 민주주의의 장애물, 신오적(新五賊)의 해부
법피아, 검피아에서, 핵마피아, 종교마피아, 언론마피아, 재벌마피아에 이르는 우리 사회를 더럽히는 다섯 마피아가 온전한 민주주의 실현의 거대한 장애물이 되어 이 사회의 미래를 향한 발걸음을 지체, 역행시키고 있다. 사상계 통권 212호(2026.5~6월호)가 그래서 신오적(新五賊)의 실체를 꼼꼼하게 해부하여 그 실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어 국민대중의 현실의 직시를 돕고, 나아가 미래의 삶을 설계하는 토대로 삼고 있음은 시의적절한 기획이라 할 것이다. 사법부와 검찰의 행태와 그 역사적 기회주의와 파렴치는 구태여 거론하지 않겠다. 지면을 채운 글들은 아마 많은 지성인들이 이미 헤아리고 있는 바이니까 말이다. 특히 주목을 끈 글은 내가 알지 못했던 전력(電力)과 관련한 에너지 마피아에 대한 글인데, 매번 거론되는 한전의 거대한 적자 누증, 해마다 몇 차례씩 오르던 전기요금의 이면에 놓인 불의한 메커니즘을 비로소 직시하는, 내 천박한 ‘에너지 문해력’이 깨어나도록 하였기 때문이다.
“이익의 사유화와 손실의 사회화는 마피아 기본 작동원리이다.”
아마 우리들이 사용하는 전력의 상당량을 민간 전력사들이 생산하는, 다시 말해 사적이윤을 위한 기업들이 전기요금을 가져가고 있다는 사실을 대다수 국민은 알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1981년 전두환 군부독재정권이 특정 기업이 발전소를 건설하여 운영할 수 있도록 전기사업법을 개정하면서, 그리고 추가 개정을 통해 민간 에너지 대기업에 특혜적 지위를 공고히 해줌으로써 시작된 에너지 마피아의 탄생에 근거한다. 각설하고 그 핵심은 민간 에너지 대기업에 발전 설비와 일정 수익을 보장해주는 구조로 설계된 정경유착 요금 산정원칙의 토대인 “무위험 수익 창출”이 가능토록 만든 법률이다. 너무도 중요한 앎이라서 그 요금 메커니즘의 두 요소를 책에서 그대로 옮긴다. 계통한계가격(SMP)과 용량요금(CP)이라는 것인데, 민간발전재벌의 수익을 국민전기요금으로 보장해주는 정교한 법적 장치다.
“SMP는 전력시장에서 거래되는 전력의 시간대별 가격으로 그 시간에 가동되는 가장 비용이 높은 발전기(LNG 발전기)의 변동비를 기준으로 책정. 자신의 실제 발전기와 무관하게 이 SMP로 정산되기에 저(低)원가 발전기를 보유한 사업자에게 막대한 이윤을 남겨주는 구조이고, 용량요금(CP)은 발전소가 실제로 전기를 생산했는지의 여부와 관계없이 전력거래소에 보고된 공급가능 용량에 따라 지급되는 고정 보상금이다.” - 「에너지 마피아가 에너지를 죽인다」 , (주)행복한동행이앤지 유치종 대표의 글에서
여기에 정산조정계수라는 더욱 모순된 구조를 더하여 한전과 한전자회사인 공기업은 만성적자에, 반면 민간대기업은 절대적 수익으로 환호작약하는 기현상이 40여 년간 지속되고 있다. 이익되는 것만 누리고 손실을 야기하는 것은 왜곡하여 배제해버려 순수 알짜만 누리는 체리피킹(Cherry Picking)의 형태로 공공의 혈세에 기생하여 수익을 약탈하는 실상은 가히 재앙적 쳬계임을 목격하게 한다. 이권 카르텔로 짜여진 회전문인사로 관료와 기업, 언론, 사법의 결탁으로 송전망 독점을 물론 탈원전 재생에너지 정책의 조직적 방해, 국가를 상대로 한 헌법소원과 행정소송 등으로 그악하게 사적이익을 국민혈세인 공기업에 전가하는 부조리는 당혹스러움을 멈추지 못하게 한다. 너무도 몰랐던 내 무지, 무관심, 낮은 에너지 문해력이 몰고 온 참사이다.
이와 더불어 전력 과잉생산이 대규모 정전사태를 몰고 있다는 사실과 그 속사정도 국민들이 알아두어야 할 중대 정보일 것이다. 전력부족이 정전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과잉생산이 만들어낸다는 현실이다. 즉 단일 송전망으로 인한 과부하를 통제하기 위해 출력을 제한 할 수 있는 재생에너지 전력 생산을 비롯, 가스와 석탄 발전의 출력을 제한하는 것인데, 이것이 해마다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원자력 발전의 출력 제한의 경직성에서 비롯된 전력수요 변화 대응에 고질적 문제가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우라늄의 핵분열 수준을 인간이 원하는 만큼 즉시 조정하는 것이 불가능한 까닭에 원전 출력을 감발하는 것이 유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에너지 마피아가 에너지를 죽인다」 라는 (주)행복한동행이앤지 유치종 대표의 글은 내 부족한 에너지 문해력을 기르는데 날카로운 자극이 되었다.
청정에너지, 저렴한 전력 생산원가를 주장하는 원자력 지상론자들의 거짓 주장들의 실체가 발가벗겨진다. 재생에너지와 원자력 에너지의 오랜 갈등의 수면 아래 암약하는 원자력 마피아들의 그 끈질긴 자기이익 증대의 탐욕이 공공의 현실과 미래를 갉아먹고 있다. 212호 사상계는 이들 신오적의 해부만으로도 더불어 살아가는 오늘의 시민들에게 사회 정의를 향한 충분한 영감과 “생각의 창고”를 채워 줄 것이라 여겨진다. 언론이나 재벌마피아 또한 심대한 민주주의 장애이지만 더 이상 이들에 대한 부연 설명이 불필요 할 만큼 대중적 공감이 형성되어있으리라 생각되어진다. 심층적 내용은 책에 미룬다. 다만 신오적의 한 영역인 기독교마피아의 실체는 눈여겨 볼 새로운 이해를 제공하고 있기에 간략하게 약술해본다.
마침 병행하여 읽고 있던 책인 미국의 대표 역사저술가인 바바라 터크먼이 쓴 『A Distant Mirror(먼 거울)』의 14세기 중세 말이라는 탐욕과 폭력이 휩쓸던 야만의 시대에 이들 현상의 온상지였던 기독교의 망령됨의 복사판인 듯한 작금의 개신교 세력이 보이는 자본에 대한 탐욕과 언론의 선동, 사법권력의 비호 아래 벌이는 영적 테러리즘은 그 더러운 방식조차 닮아있음을 보게 된다. ‘역사는 반복되지 않지만 인간 행동은 항상 반복 된다’는 볼테르의 인간본성 불변에 대한 진술을 입증하듯 기독교의 파멸적 부패를 작동시키는 인간의 행태는 정말 변하지 못하는 것임을 부정할 수 없게 된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타인의 인격과 삶을 파괴하는 테러리즘, 복음은 기득권을 수호하기 위한 치명적 흉기로 사용되며, 타자를 향한 증오와 배제를 신의 명령으로 포장하는 주문(呪文)”으로 쓰고 있다. 한국의 개신교는 야만의 끝을 위해 질주하던 타락이 만연했던 중세 기독교의 판박이다. 아마 지금도 이단이라고 자신들의 도그마에 순응하지 않는다고 린치를 가한다고 하면 많은 사람들은 믿지 않을지도 모를 일이다. 뻐젓이 21세기 한국사회에서 벌어지는 이 해괴한 개신교의 막장 놀음판, 여기에 결탁한 언론과 사법 권력의 행태는 차마 눈뜨고 보는 것이 역겨울 따름이다. 이들 더럽고[汚], 그릇된[誤], 끼리끼리 밀어주고 끌어주며 서로의 이익을 추구하는 이 사회 오적((五賊)들의 탐욕의 고리를 끊어내고 상서롭고 이로운 공동체를 회복하는 일은 오늘 우리들의 과제가 아닐 수 없다.
“고집 세고 우둔한 벽창우(碧昌牛)의 주장이 강단(剛斷)이나 의기(意氣)로
포장되어서도 안 되고, 명백한 오류의 왜곡이 있을 수 있는
다양한 견해의 하나로 용서되거나 포장되어서는 안 된다.”
- 서예가 김병기 선생의 곡학아세(曲學阿世)하는 현실의 비판 글에서
요사이 그릇된 역사관과 탐욕스러운 더러운 마케팅으로 왜곡을 일삼는 인간이 다른 견해의 표현일 뿐이라며 역사부정을 마치 정당한 표현의 자유라고 주장하는 모습에서 틀린 것을 다른 것이라고 호도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저 틀린 것이고 잘못된 것이다. 사람을 죽였으면 그것이 살인죄이지 다른 다양성의 모습이라고 긍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듯, 5.18 광주시민혁명은 군부의 무고한 시민 학살에 대한 저항이었다. 시민의 무차별 학살을 한낱 돈벌이를 위한 장사치의 상업이벤트로 조롱할 수 있는 다름이라는 다양성의 소재가 아니다. 이러한 양태는 정치적 쟁투가 벌어져도 대자보 한 장 붙지 않는 오늘의 대학의 현실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후기 파시즘 사회에 놓인 한국의 현실 - 우리 자신을 아는 것으로부터
그래서 “우리나라 지식인들 다 어디 갔나요?”라는 끔찍한 사태에도 불구하고 비판하는 지식인들이 보이지 않는 오늘의 현실에 대한 냉소적 비판의 물음이 등장하는 것일 게다. 김누리 교수가 인용하는 테오도어 아도르노의 “학자의 본분은 급진적으로 사유하고 급진적으로 비판하는 것이다.”라는 말처럼 무관심에 근거한 침묵의 오리무중과 타협은 정치가들의 몫이지 학자의 몫이 아니라는 말이다. 지식이란 비타협적 비판의 역할을 지녀야 하는 것이다. 지식의 산실로서 대학과 학자는 사라지고 지위 획득을 위한 자격증 발부를 위한 지식생산 방법론에 매몰된 기능자 양성 공간이 아니라는 말이기도 하다.
고작 양비론으로 기회주의적 눈치만 살피며 중용, 중도의 논설로 지식인입네 하며, 자기 정당화를 주장하는 위선적 지식인들의 무리가 침묵하고 눈감는 사회는 아무렴 정의로운 사회는 분명 아닐 것이다. 이정옥, 김누리 교수의 대담기록은 오늘 우리 사회를 냉철하게 돌아보게 하는 기획으로 많은 사람들이 읽어보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파시즘이 남긴 최악의 유산은 파시즘과 싸운 자들의 내면에 남은 파시즘이다”라는 브레히트의 경고의 말은 오롯이 오늘의 한국사회 우리들에게 전해진다. 한국은 군사독재에서 민주주의로 이행한 사회가 아니라는 진단은 뼈저린 반성의 울림으로 다가온다. 엄청난 착각! 진정 한국사회는 파시즘, 오랜 독재정치 사회를 벗어난 것일까? 아니라고 선언한다. 권위주의 문화, 군사문화가 청산되지 못하고 사회 전 부문에 독버섯처럼 자라고 있다. 12.3 계엄사태는 여전히 이 사회에 잔재하는 파시즘을 증거한다. 아도르노가 대표하는 프랑크푸르트학파는 후기 파시즘, 즉 한국사회와 같은 전기 파시즘 사회에서 후기 파시즘으로 이행된 사회의 네 가지 형태(특징)를 설명하고 있는데, 지금 한국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신오적을 비롯한 기득권 카르텔을 비롯한 이에 부화뇌동(附和雷同)하는 사람들의 면모를 보여준다.
그 첫째는 자신을 무조건 ‘강자와 동일시’하는 성향이다. 광화문에서 성조기를 흔드는 사람들의 심리, 그들의 사대주의적 노예근성이 바로 이러한 강자동일시의 예일 것이다. 이의 거울효과이기도 한 ‘약자 혐오’는 그 둘째 성향이다. 약자 공격으로 돈을 버는 작태들의 만연, 선진국 중 유일하게 차별금지법이 없는 나라라는 수치스러운 사실이 그 예이다. 셋째는 ‘폭력성의 미화’다. 깡패들이 싸우고 패는 부류의 영화들이 천만 관중을 끌어 모으는, 유독 폭력의 미학을 향유하는 대중의 취향은 파시즘의 내면화의 무의식적 발현일 것이다. 마지막은 ‘동조강박’이다. 어처구니없는 집단행동에 당당히 반대 의사를 밝히는 개인이 없는, 의사들의 집단적 이기적 행태에 대해 해당 집단 내에 어떻게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는 인간이 없을까? 다수에 무조건 동조하려는 이러한 강박적 태도는 파시즘의 전체주의 성향을 청산하지 못한 우리 시대의 어두운 그늘이다.
스스로 우리들의 내면을 살펴 볼 일이다. 우리사회는 일찍이 보수라는 정체성을 지녀보지 못했다. 오직 사적 이익이라는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탐욕과 폭력의 집단은 있었지만 “진정 공동체를 중시하고, 역사를 중시하고, 문화를 중시하는 보수 정파”를 갖지 못했음은 정말 안타까운 현실이다. 역사를 부정하고, 공동체를 분열시키며, 사대적 발상의 매판 기회주의자들은 보수가 아니다. 이제 수구를 정치 무대에서 퇴장시키고 합리적 진보가 등장할 공간을 위해서 민주당은 좋은 보수가 되어야 할 시간이다. 정식 복간되어 세 번째 출간되는 사상계 212호는 우리의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준엄하고 냉철한 담론들과 논의들이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생각창고의 구실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물론 여전히 자리잡아가고 있는 과정임이 도처에서 드러나지만 응원한다.
■ 인공지능 기반 전쟁이 만들어 낸 것(무책임과 증발된 정의)/ 패권이 사라진 공위기(空位期: interrgnum)의 세계 지형이 몰고 오는 것들
끝으로 미국과 이스라엘의 이란 침공 첫날 이란 남부 샤자레흐 타에베흐 여자초등학교에 세 차례 가해진 폭격으로 168명의 어린이와 14명의 교사가 현장에서 사망케 한 미 중부사령부가 사용한 인공지능 메이븐 스마트 시스템의 서두른 사용이 초래한 오류와 책임성에 대한 분석 논평인 문아영 피스모모 대표의 글은 인공지능 기반 전쟁이 만들어낸 새로운 윤리적 지형으로 인한 정의와 책임의 귀속 구조에 대해서 묻고 있다. 분산된 책임, 증발한 정의, 무고한 죽음에 대해 차가운 군사적 용어인 ’부수적 피해‘라고 얼버무리는 국제규범 공백 사태에 우리의 시선과 사유가 오늘 어디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지 일깨운다. 더불어 K-방산이라는 살상을 팔아 얻는 이윤에는 열광하면서도 그 살상을 통제할 책임에는 눈감아버리는 우리들의 윤리의식에 대해서도 반성토록 한다. 과연 이스라엘과 미국의 폭력, 무법적 폭력성을 비난할 수 있는지 되묻게 한다. 이러한 물음은 우리 정치사회의 폐쇄 조직의 하나인 국가안보분야에 대한 자성으로 이끈다.
국방, 국가안보라는 이름으로 법 바깥, 민주주의 예외지대에서 책임을 회피하는 밀실 구조는 이대로 괜찮은 것인가? 그것의 원천을 해체해야 하는 것 아닐까. 독립된 시민 감시기구의 설립을 통해 장막 뒤에서 그 판단근거가 무엇인지 투명하게 이뤄져야 12.3과 같은 퇴행적인 시대착오적 헌법 파괴적 행태가 반복되지 않을 것이며, 권력의 안위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저질러지는 위험을 제거 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된다. 사회학자인 우에노 지즈코와 문화인류학자인 조한혜정의 상호 서신 교환을 통한 시대비평의 나눔은 오랜 역사를 지니고 계속되어 온 잘 알려진 학문적 승화의 예이다. 그네들의 여성 정책 담론 또한 주목할 글이다. 또한 막무가내식 트럼프의 외교정책 행태인 일명 ‘돈로 독트린(Donroe Doctrine)’으로 시작되는 미국 중심의 패권주의의 실체 분석을 통해 수렁에 빠진 패권주의적 종말의 실상에 대한 짧은 시사(時思)의 글도 이 세계에 끼칠 영향에 대한 개괄적 환경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아무쪼록 미래세대를 위한, 또한 문명 전환의 응답을 사유하는 시간이 되어주는데 손색이 없는 이 잡지는 많은 청년 세대를 비롯한 민주 시민 모두가 가정에 두고 짬짬이 읽고 작은 실천으로 이어지는데 분명 일조할 것임을 확신한다. 정말 좋은 사회의 구현을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