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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아

분석 비판하려는 관념에 장악된 그늘진 정신의 무게에 짓눌린 나를 느낄 때면 이유리 작가의 작품을 찾아 읽게 되었다.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작가의 소설들은 제 아무리 힘겨운 삶에 직면한 인물일지라도 그 무게를 오히려 가벼운 무엇으로 인식하게 할 만큼 명랑하고 경쾌한, 기분 좋은 정조(情調)의 발랄한 생기로 전환시킨다. 그 작품들의 통통 튀는 밝은 기운을 내 마음에 잔뜩 흡수하고 싶은 기대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작가의 소설을 읽을 때에 나는 분석하는 마음을 저 멀리 떨쳐버리고 문장들과 이야기가 발산하는 젊음의 생동감, 그 미완의 풍부한 가능성에서 피어나는 유쾌함과 명랑함의 분위기를 만끽한다.

 


이 작품집은 작가의 소설집 『비눗방울 퐁』에 실려 있는 세 편의 단편소설로 재구성된 단편선집이다. 선집의 표제작 「내게 남은 사랑을 드릴게요」의 첫 문장은 “내게는 텅 빈 집과 아픈 고양이, 그리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사랑이 남았다”로 시작된다. 수진은 연인 성재와 이별했지만 “짐짝처럼” 사라지지 않고 남아 그녀를 고통스럽게 하는 사랑, 그 남는 사랑을 팔기로 한다. 남편의 외도로 사랑을 잃은 친구 영인이 수진에겐 필요없는 사랑을 사겠다는 제안을 하고, 수진은 냉큼 받아들인다. 감정전이센터를 찾아 기증자 수진은 수령자 영인에게 전이할 감정을 떠올리고 사랑이라는 감정을 전이한다. 감정이라는 것이 영인의 남편 민후의 말처럼 “무슨 장기 이식 하듯 누구 것을 빼서 다른 누구에게 넣는다고 그게 진짜 자기 것”이 되겠는가.

 

사랑이 끝난 자리, 사랑을 잃은 자리에 남거나 비어버린 곳은 어떻게 처리되어야 하는 것일까. 우리들 대부분은 “그 슬픔을 꼭꼭 씹어서 소화시키는”, 그래서 약이 되고 “마음의 굳은살”이 되는 시간의 신비에 의존한다. 사랑이란 이미 누군가의 감정으로 채워지는 것이 아님을, 어쩌면 발칙한 상상의 나래를 펴 이 진실을 음미해보고자 하는 것이 아닐까?

 

「그때는 그때 가서」 화자의 이름도 수진인데, 아쿠아리움에서 청소 아르바이트를 한다. 이름을 들으면 누구나 알 만한 대학에서 산업디자인을 전공하고 엉덩이가 근지러워 여러 회사를 옮겨 다니며 자유를 갈구하는 인물이다. 수진의 이 직업을 제대로 된 직장이라고 여기지 않는 그녀의 연인 정우의 기준에서는 “보편적이고 평범한 삶”이 아니다. “작물을 심고 그 수확으로 겨울을 나야하는 중요한 땅에 꽃씨를 뿌리고 그저 놀기를 좋아”하는 수진으로부터 정우가 떠난 것이 당연한 것일 수 있음을 알지만, 네 “머릿속은 꽃밭이라”는 정우의 말을 곱씹을수록 화가 치밀어 오른다. “속물적인 새끼.” 어찌 욕까지 악의 없이 무해하게 들리는 것일까.

 

이 소설은 내게 미소와 활력이 필요할 때면 앞으로도 두고두고 펼쳐 읽을 작품이 될 것 같다. 아니 이유리 작가의 소설들은 언제든 꺼내 볼 수 있게 책장 보이는 곳에 꽂아 둘 것이다. 바로 그러한 소설의 대표작이 이 작품 「그때는 그때 가서」이다. 아쿠아리움에서 일하면서 가장 좋은 것이 해파리 보는 것이라는 수진은 “투명한 몸을 물의 흐름에 맡기고 목적도 욕심도 없이 그저 흘러 다닐 뿐”이기에 “흩날리는 꽃처럼 꿈결처럼 움직이는 모습”, 그 자유로운 생의 모습에 매료되었기 때문이다.

 

새벽 다섯 시부터 개장시간인 여덟 시까지 그녀가 터득한 숙련된 노하우로 손발이 맞는 파트너 예순다섯 살 김선자씨와 잽싸고 날렵한 청소일은 결코 대강대강 하는 일이 아니다. 그녀는 동작 하나하나에 노하우가 담겨있다고 자신의 일처리에 어떤 긍지마저 느끼는 듯하다. 하지만 정우에겐 “그따위 것은 누구나 시키면 할 수 있는 일이고, 비싼 돈 주고 대학까지 나와 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할 것이라고 수진은 말한다.

 

“수진아, 제발 어른답게 생각하고 살아. 쟤들은 해파리고 넌 사람이잖아. 쟤들은 집도 있고 때 되면 누가 밥을 주지만 넌 아니잖아.” 정우와 다투거나 싸우고 난 다음 날, 청소를 일찌감치 마치고 해파리 수조 앞에 있으면 뒤이어 일을 마친 김선자씨는 휴대폰에서 맞춤의 음악을 틀어놓고 목청껏 노래를 시작한다. 여진의 <그리움만 쌓이네>에서부터 김연자의 <아모르 파티>에 이르는 그 절묘한 생의 풍악이 드리웠던 그림자를 거두어간다. “꿍짜라작작 쿵짜라작작 쿵작쿵작 / 산다는 게 다 그런 거지 / 누구나 빈손으로 와” 해파리 수조 앞에서의 이 이상하지만 결코 “유해하지 않은 무해한 이상함”의 광경이 눈앞에 그려진다. 젊은 여자와 늙은 여자 둘의 이 이상한 순간이 내겐 더없이 아름다워 보이기까지 한다. 산다는 게 뭐 있나. 다 그런 거지.

 

【민음 북클럽 에디션, 소설집『비눗방울 퐁』속 세 편의 선집】


어떻게 살아야 하나, 어떻게 사는 것이 삶인 것인가. 미래를 위해 하기 싫은 것을 끈질기게 참아가며 살아야 하나, 아니면 자유로운 비둘기와 해파리처럼 살아가야 하나. 수진은 김선자씨에게 조심스레 묻는다. “그냥...어떻게 살아야 될지 모르겠어서”, “돈은 많이 모으셨어요?”라고 말해버린다. 그때 “참. 나도 그걸 알면 좋을 텐데, 미안해요, 몰라서“라며, 수족관 앞에서 자신이 노래 부르는 이유를 설명한다. ”꼭 지구를 앞에 놓고 부르는 것 같아요. 동그랗고 새파랗고, 그 안에 뭔가 살아있는 것들이 오글오글 돌아다니는 게 그렇지 않아요? (...) 나는 그렇게 생각하면 기분이 좋더라구요.“ 뭐 그렇게 살면 되지.

 

수진은 정우가 말하는 현실 감각이라는 것과 해방 된 삶에 대한 생각을 오가지만, 김선자씨의 말 속 ‘뭔가 살아있는 것들의 오글거림’, 그것이 어쩌면 삶의 진짜 모습 아닐까. 지금 이 순간에 열심인 삶, 바로 그것을 즐기는 삶, 그렇다면 그 미래라는 것이 무어 그리 대수롭겠는가. ”그때는 그때 가서 생각하면“ 된다. 많은 수진들을 응원한다. 21세기를 살아가기 위해 갖춰야 할 그런 것 따위가 무어있겠는가. 생활비 조달에도 빠듯한 월급날 단 한 번 배달앱을 켜 맛있는 것을 먹는 호사(?)는 부려도 괜찮다. 무책임한 소리라 나무라는 목소리도 있을지 모를 일이지만 삶이라는 길에 정답이라거나 보편이나 정상이라는 것이 어디 있나, 살아있음을 만끽할 수 있는 그런 삶이면 족한 것을. 바로 그 살아있음의 감정이 죽어버리는 삶을 살아가기에 삶이 삶 같지 않은 것 아니겠는가. 파란 수조 불 빛 속에 부드럽게 유영하는 둥근 해파리의 모습을 닮은 이 땅의 수진이들을 위한 유쾌 발랄한 생의 축가 같다. 만면에 웃음을 머금고 읽게 만드는 이유리표 소설이다. 그래서 이 각양의 형태를 지닌 생의 슬픔이 한껏 기분좋게 가벼워진 것을 느끼게 된다.

 

“그냥 콩 하고 귀엽게 넘어진 게 아니었다.

발을 헛디디면서 두 바퀴쯤 허공에서 구르고는

그대로 천변 아래로 처박혔다.” -「달리는 무릎」에서

 

「달리는 무릎」의 문장이다. 새벽 택배 상하차 아르바이트를 하는 화자(話者)가 늦은 밤 달리기를 하다가 그만 하얀 무릎 뼈가 드러날 정도로 다친 것이다. 요즘 내가 부쩍 좋아하는 묘사들이 귀여움인 것은 순수에 대한 향수인 것만 같다. 물론 이 작품도 귀여움이 발산하는 명랑함이 작품 전체의 정조(情調)를 에워싸고 있다. 아홉 바늘을 꿰맨 무릎에 반 깁스를 한 채 자고 났을 때 무릎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듣게 된다. “나는 너를 내내 기다렸다고. 너 같은 사람을”, 시스템의 결정으로 공동체에 덜 기여한다고 선택되어 무한대에 가까운 조각으로 쪼개져 우주 전체에 흩뿌려진 존재의 이 낯선 목소리는 너 같은 사람의 운동에너지를 흡수하여 중력을 벗어날 추진력을 모아야 함을 말한다.

 

그리고 “기준 외의 것들은 다 없애고 간다는 그 어느 날의 우주 시스템의 생각이란 것”에 대해 비난하는 화자의 분개에 마침내 무릎 속 외계 존재 자신도 시스템에 맞서 싸워야 함을, 그래서 싸움이 끝나고 자신이 되고 싶은 성취를 이루면 돌아와 알려주리라 약속한다. 인간 사회에서 떨려 나갈지도 모를 나는 “자격증이든 시험이든 그놈의 적성이라는 것을 찾아서” 바쁜 일과를 보내야 하기에 하루 두 시간의 달리기만을 통해 운동에너지의 흡수를 돕기로 한다. 이윽고 나의 무릎 속 외계 존재가 중력을 벗어날 운동에너지를 거의 모았을 때 그 마지막 흡수를 위한 도움의 달리기를 한다. “좀 더 빨리!”

 

“그때였다. 무릎에서 푸슝, 하는 소리가 들렸다.”, “저기요, 갔어요?”, 대답 없는 우주 존재와의 이별, 손차양을 하고 올려다보는 하늘의 별을 보며, “시스템이 옳았다면, 불필요한 존재들이 사라진 자리에 필요롭고 쓸모 있는 것만 남아 모든 것이 잘 돌아가고” 있다면 “채 싸우기도 전에 져버릴 것을 오랫동안 걱정했지만” 그 외계 존재의 결심에 초를 칠까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음을, 자신의 처지와 비교하며 비참해질까봐 말하지 않았음을 떠올리는 화자의 고달픔이 경쾌한 언어로 이 세계의 현실 위에 무겁게 내려앉는다.

 


외계의 존재라는 이 환각, 혹은 환상의 존재는 화자인 ‘나’의 반영, 나의 소망의 목소리인 것만 같다. 고된 일을 마치고 늦은 밤에 홀로 뛰던 천변의 달리기는 어느덧 외롭지 않은 두 존재의 달리기로 공동의 목표를 위한 행위가 된다. 그리곤 이 이별이 비록 기약없는 이별이긴 하지만 언젠가 시스템과의 싸움에서 이겨 돌아올 기대를 가진 응원과 기대를 품은 이별이기에 슬픔의 그늘과 달리 밝게 빛난다. 처박힘에서 일어나 자신만의 목표를 향해 달려갈 에너지를 얻는 그 마지막 혼신의 질주들을 진심으로 응원한다. 이유리표 소설들의 이 밝은 에너지인 명랑함, 환한 빛을 비추는 이 발랄함의 정조가 세대를 넘어 모든 인간들에게 살아있는 존재로서의 웃음과 더불어 생의 무게를 한없이 가볍게 해준다. 세 편 모두 이별이 있지만 그것은 상처로 머물지 않고 무한한 가능성의 찬란한 색으로 물들고, 사랑의 핑크빛 숨결처럼 더없이 포근한 생의 위로와 기쁨이 되어 우리들 방황하던 정신을 토닥인다. 이유리 전작주의(全作主義)자가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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