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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아

《헨리와 준》의 아나이스 닌과 《악령》의 스타브로긴 

- 악마와 그 주변을 맴도는 것의 차이에 대해서

 

“아나이스 닌은 우리 대부분이 감히 인정하거나 생각조차 하지 못할 일들을 저질렀다.”

 

소설가 킴 크리잔(Kim Krizan)은 아나이스 닌(Anais Nin;1903-1977))에 대한 전기소설 속에서 거침없는 여성의 욕망을 드러냈음을, 시대적 당혹감으로서 위와 같이 썼다. 그것은 엘렌 식수가 말한 “반(反)로고스적 무기가 단련되게끔 글쓰기”로서 “여성 억압의 표현에 스스로 갇히지 않은, 텍스트들 속에서 페니스가 순환하는“ 섹스트(sextes)의 출현에 대한 긍정과 부정이 교차하는 사건으로 이해되었음을 상징하는 것이었을 게다. 그러나 이것은 시대의 전경(全景)으로서의 시선이지, 아나이스의 텍스트 자체는 이러한 시대적 요구를 발판으로 자신의, 한 여자로서의 자기 자리의 발견을 향한 고투, 자각을 향한 수행(遂行)적 걸음이었음을 발견해야 한다.

 

【출처: The Anaïs Nin Foundation】


1. 아나이스 닌을 말하고자 하는 동기에 대해서

 

우리의 독서시장에는 1931년 10월부터 1932년 8월까지에 이르는 아나이스 닌의 헨리 밀러와 그의 두 번째 아내 준과의 에로틱한 모험의 내용이 담겨진 《헨리와 준》 정도로 알려져 있다. 이 일기를 읽은 독자들, 일부 평자들은 도덕적 규범이 붕괴된 한 여인의 성적 편력 행위의 묘사들에 빠져 아나이스가 찾아 헤매는 것이 무엇인지를, 즉 그녀가 왜 이 글쓰기를 실행하고 있는가를 망각하고 마는 듯하다. 나 또한 “나는 창녀처럼 그에게 본능적으로 충실했다. 그와 함께하지 않으면 쾌락을 느낄 수 없다” 라는 문장처럼 유부녀가 뭇 남성들을 옮겨다니며 자신의 성적 쾌락을 마치 자아발견의 행로인양 위선을 떨어대는 자기 정당화의 궤변으로 읽기도 했다.

 

그러나 작품 속 빈번하게 등장하는 도스토엡스키의 《악령》속 스타브로긴의 몰인격, 악의 화신이 헨리와 준, 그리고 자신과 비교되는 성찰의 말들을 보며 이 텍스트를 완전하게 잘 못 읽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녀가 묘사하는 성적 쾌락의 장면들은 단지 자기 욕망을 여실히 드러내는 것일 뿐, 그것이 글쓰기의 목적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아나이스가 “헨리를 생각하면 나는 다리를 벌리고 싶다” 라고 쓰는 것, 마치 드러내지 말아야 할 것이 드러났음에 현혹당한 읽기로 본질을 읽지 못하는 우를 저질렀다는 자각이었다. 이 글을 쓰고자 한 충동은 여기서 시작되었다. 아나이스라는 여인이 이 일기를 씀으로써 추구하려는 것이 무엇이었을까, 왜 이렇게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그로인해 그녀가 발견한 것은 대체 무엇인가에 대한 규명으로서의 읽기로 전환된 것이다. 스타브로긴과 아나이스, 헨리, 준의 도식(圖式)이 가리키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가 그 해명이 되어 줄 것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아나이스 작품들에 대한 문학적 폄하의 시선을 불식시키고, 그녀의 문학적 업적을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로 삼아보자는 취지였다는 말이기도 하다. 《헨리와 준》은 아나이스 닌이 자신의 문학적 명성이 절정에 이르기 시작했을 때 다듬어진 일기의 일부분으로 1966년(63세)에 첫 출판되어 자아 발견의 여정을 통찰력 있게 그려냈음을 문학적 업적으로 찬사 받은 작품이다. 이 작품에는 실제 일기 속 여러 인물들이 삭제되어 순탄치 않은 편집과정을 거쳐 탄생한, 소설적 윤색이 더해진 일기라 할 수 있다. 물론 1932년에 출판한 《D.H. 로렌스 비전문 연구서》를 필두로 1939년에 소설 《인위의 겨울(The Winter of Artifice)》, 1944년 단편소설집 《유리 종 아래에서》가 발표되며 비평가들로부터 호평을 얻어냈지만 문학적 명성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후 1950년대 내내 《내면의 도시들》, 《불의 사다리》, 《알바트로스의 아이들》, 《네 개의 방이 있는 심장》, 《사랑의 집에 들어온 스파이》 등의 소설을 발표하며 독자층을 점진적으로 확대해 냈으며, 1964년 소설 《콜라주》가 그해 타임지 최고 도서로 선정되면서 독보적 여성 작가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즉 오랫동안 갈망해왔던 문학적 명성을 얻게 된 것이다. 1971년 공쿠르, 메디치 등 프랑스 4대 문학상의 하나인 세비네 상의 수상, 1974년 노벨 문학상 후보에 올랐으나 수상에는 실패했지만 1974년 미국 국립 예술문학 협회 정식회원으로 선출되며 그녀의 문학적 업적은 공인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1970년대라는 시대는 여전히 이 여성적 글쓰기에 대한 반감과 옹호가 상존하고 있었음의 반증일 것이다. 이 같은 글쓰기를 수행한 후배 작가 아니 에르노가 2022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것은 어쩌면 숱한 아나이스들이 맺은 결실 일 것이다. 아나이스는 폄하 또는 비하와 격하 대상의 작가가 아니다. 즉 그녀는 《악령》 속 스타브로긴처럼 이 세계에 악을 전염시키는 위험하거나 배제되어야 할 인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 이렇게 생각하는 지 스타브로긴과 아나이스를 비교하며 그 차이 속에서 이 여인이 발견하고자 고통스럽게 애쓴 것의 자취를 우리는 찾을 수 있을 것이다.

 

2. 도스토엡스키의 《악령》 속 스타브로긴은 어떤 인물인가

 

아나이스가 악의 화신으로 대입하는 《악령》의 스타브로긴이라는 인물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아보는 것이 우선일 것 같다. 스타브로긴은 “내 삶의 법은 내가 만든다”는 태도를 지닌, 이 세계의 모든 확고한 신념이 무너진 뒤 남은 공허에 가까운 인간이다. 그에게는 하나님도, 전통의 도덕도, 외부 권위도 자신을 규정하지 못한다고 여기며 자기 의지만이 기준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선과 악을 초월해 있다고 믿는 이 인물은 영웅적 행위와 타락한 행위 사이에 본질적 차이가 없으며, 스스로 도덕 바깥에 선 존재라고 믿고 싶어 한다. 한 마디로 아무것도 믿지 않으면서 자기 의지만 믿는 태도의 인간이다.

 

이 인물을 악령, 악의 화신으로서 두려운, 아니 무서운 인간으로 말하는 이유는 아무것도 믿지 않는 의지란 것이 실제 아무런 방향성도 없는, 삶의 의미를 조직해주지 않는 욕망과 결단으로서의 의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처럼 그 어떠한 교리나 신념을 설파하지 않음에도 그의 공허와 카리스마가 주변 인물들의 과격 사상과 행동을 촉발하는 중심점이 되는 데 있다. 의미와 믿음이 빠져나간 자리를 차지한 텅 빈 공백, 이것이 개인과 사회를 얼마나 위험에 빠지게 만드는지를 표상하는 것이 도스토옙스키가 구현하고자 한 핵심적 시선이다. 이를 정리하면, 도덕을 상대화하고, 자기 의지를 절대화하려 하지만 결국 공허와 양심의 반격 앞에서 붕괴하는 인물이고, 그래서 그의 신념은 어떤 적극적 이상이라기보다, 믿음의 상실이 낳은 허무주의적 자기숭배라고 보는 것이 가장 정확한 존재다. 그래서 《헨리와 준》에서 헨리가 아나이스에게 “당신은 물론 나르시시스트야, 이 일기가 존재하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지.”라고 말하는 것, 바로 그것에 닿는다.

 

그렇다면 헨리가 농담처럼 뱉은 지적처럼 아나이스는 스타브로긴의 텅빈 공허로서의 의지를 수행하며 악의 덧을 마구 뿌려대는 팜므파탈인가? 스타브로긴처럼 스스로를 선악을 초월한 인간인가라고 묻게 되면 아나이스는 바로 그러한 스타브로긴의 매혹과 파괴성을 감지하고 그것을 자기 안에서 미학화하고 관계화하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다름을 발견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스타브로긴이 공허한 의지의 중심이라면 아나이스는 그 공허 주변을 맴돌며 그것을 감수성, 욕망, 자기 서사로 번역하는 인물로 해석할 수 있다. 결국 스타브로긴은 소설 속에서 준과 헨리 중 누구인가라는 점에 귀착된다고 할 수 있다.

 


3. 《헨리와 준》의 자기해석자로서의 아나이스

 

“헨리가 말한다. (...) 그녀를 처음 만난 날, 준은 내가 자신을

팜므파탈로 생각해 주기 바란다고 했어. 나는 악마성으로부터 영감을 얻어.

도스토옙스키가 그랬던 것처럼, 나도 악마에 몰두해 있지.”

 

“준이었다면 헨리가 글 쓰는 것을 방해했을 것이다, 난리를 피웠을 것이고,

화려한 팜므파탈의 모습을 드러냈을 것이다. (아나이스)”

 

아나이스는 스타브로긴적 매혹을 맴도는 인간이라고 해석했다. 그것은 아나이스가 준에 대해 말하는 문장에서 다시금 확인되는데, “악을 낳고 범죄를 일으키지만 스스로는 거의 행동하지 않는 인물인 도스토옙스키적 인물인 스타브로긴”을 인용하는 것에서 그녀의 무의식이 드러난다. 실제 준은 헨리를 직접 움직이기보다는 움직이게 하는 힘의 중심으로서 악의 자기장 같은 존재로서 행동하는 것에서 확인된다. 즉 아나이스는 준이라는 스타브로긴적 인물에 매혹되는 해석자이자 매개자이다. 아나이스가 자신을 “the revealer, the harmonizer(드러내는 자, 조화시키는 자)”라고 부르며, “준에게는 도스토옙스키를, 헨리에게는 준을 준다”고 쓰는 것에서 그녀가 파괴의 중심이 아니라 파괴적 매혹을 언어와 관계 속에 배치하는 연출자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아나이스의 헨리와의 지독한 성애와 그에 대한 집착은 자기 쾌락, 삶의 안정 장소를 찾아내기 위한 그녀만의 일련의 고통스러운 수행(遂行)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수행의 여정 자체가 제공하는 쾌락의 감각은 하나의 요소이지 그것이 곧 욕망이 지향하는 궁극의 장소가 아니라는 것이다. 아나이스는 전통적 가치가 무너진 자리에 무엇이든 가능하다는 식의 자기절대화에 접근하고자 하는 스타브로긴과 같은 인물이 아니다. 스타브로긴으로 아나이스를 해석하는 것, 즉 그녀를 성적 쾌락에 목매단 탕녀 정도로 이해하는 것, 그래서 뭇 남성들의 자존과 삶을 파괴하고, 그들의 가정을 궤멸시키려는 그러한 성의 화신이 아니다.

 

아나이스는 욕망과 위험, 심지어 악의 매혹에 끌리면서도 자신 안의 잔혹성에 대한 저항이 남아있음을 분명히 말한다. “잔인함에 대한 무능력은 약점에 가깝다”고, 또한 “우리는 가장 자기답지 않을 때 가장 자신을 드러내기도 한다”고 할 때 그녀는 자기모순을 감지하고 자의식적 기록자임을 분명히 보여준다. 결국 아나이스는 준이라는 팜므파탈이 낳는 정동을 흡수하고 서사화하는 인물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렇기에 그녀는 “나는 타인의 욕망과 어둠을 통과하며 나를 발견한다”고 말 할 수 있는 것이다.

 

아나이스는 준 혹은 스타브로긴의 공허 그 자체와 달리, 그 공허를 견디기 위해 끊임없이 자기고백, 이미지, 역할극을 만들어내서 허무의 매혹을 예민하게 감지하는 미학적 자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나이스는 매우 지적인 여성이고 인간을 단순한 현실의 개인으로 읽기보다는 하나의 심연적 유형, 상징적 배치로 해독한다. 아나이스는 스타브로긴적 중심으로 준을, 창조적 노동과 육체성을 가진 인물로 헨리를 읽으며, 자신은 이 둘 사이를 통과하며 스스로를 분열시키기고 확장하는 의식의 존재로서 위치한다. 즉 준의 중력장 안에서 자신이 얼마나 멀리 혹은 깊이 끌려갈 수 있는지를 실험하는 자라고 할 수 있다. 이로써 그녀는 허무의 공백과 타락의 에로스를 자기해석의 연료로 바꾸는 고백적 미학가라고 부를 수 있게 된다. 악의 매혹을 사랑과 글쓰기의 형식으로 번역하는 감수성의 공모자로서 아나이스는 끝내 양심과 문장 속으로 되돌아오는 미학적 증인이라 할 수 있다.

 

4. 결어 - 아나이스의 글쓰기가 말하는 것

 

아나이스 닌이 일기를 쓰는 것은 이상화된 자신의 모습을 만들어내는 과정이었다. 때문에 일기 속 자기 정당화의 변들이 위선으로 여겨지기도 하고, 그 생경한 날 것의 성적 묘사들이 혐오와 당혹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지만, 그것은 정작 글 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말단의 감각이 야기하는 도덕이라는 오래되고 낡은 인식에 지배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나이스는 이 일기를 쓰는 동안 자신의 진정한 내적 실체를 발견하고 이 분열된 욕망들인 자신을 통합하고 진실된 인격을 형성하고자 고투했다. 그녀는 글 속에서 “글쓰기가 분열되고 혼란스러운 자아 속에서 가장 강력한 요소”라고 믿었으며, “어떤 파괴적 영향을 받더라도 온전함을 만들어내는 행위였다”고 말한다. 이처럼 아나이스의 일기는 한 인격의 진화로 나아가기 위한 독특한 문서이다. 자신이 만들어낸 자아 속으로 도피했다가 진정한 자아를 재발견하는 과정의 역동적 기록이라 할 수 있다.

 

그녀는 자신이 여러 인격을 연기해왔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는다. 그녀는 인간이 길을 잃은 허위와 망상의 미로를 인내심 있게 해쳐나가지 않고서는 자아의 통합과 일치에 도달할 수 없다고 믿었음은 분명하다. 그녀는 인간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과정에 있으며, 인간이 추구하는 질서는 바로 자신 안에 있다고 생각했다. 결국 아나이스는 자신의 진실한 본성을 찾아가는 철저한 여정에 대한 경이로움과 인간 정신의 신비로운 작용에 대한 깊은 외경을 통해 미학과 질서, 이상을 마침내 버렸을 때 비로소 새로운 삶의 질서와 지혜를 발견한다. 그녀를 메를로 퐁티의 몸의 철학을 실천한 사람이라 불러도 무방하리라. “모든 세포가 기능할 때, 즉 꿈, 욕망, 본능, 식욕이 모두 살아날 때 풍요로움에 도달합니다”라고 쓸 때 깨달음의 충만함 속에 존재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자신을 왜곡하는 거울을 부수고 온전함과 기쁨을 경험하기 위해 삶의 투쟁을 벌여 나갔던 인간의 특출한 사례라 해도 될 것이다.

 

“나는 창녀처럼 그에게 본능적으로 충실했다. 그와 함께하지 않으면 쾌락을 느낄 수 없었다. 헨리와 관계를 가진 날 휴고가 나를 원할지도 모른다는 것이 가장 큰 두려움이었다. 어젯밤 그는 열광하며 절정을 느꼈다. 나는 그에게 순종하며 그를 기만했다. 즐기는 척 했을 뿐이다.”  - 《헨리와 준》,165쪽

 

이 문장을 읽을 때 교활하고 발칙한 색정적 여인을 떠올리며 도덕적 분노가 슬그머니 일어난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하지만 이러한 묘사에 함몰된 읽기에 그친다면 그것은 매우 편향된, 남성적 시선의 읽기, 즉 절름발이 독서가 되고 말 것이다. 여성의 자신의 성 욕망 드러내기를 남성들은 관음의 시선으로 읽어내며, 그것에 편협한 (팔루스의)도덕적 잣대를 들이대곤 한다. 그럼으로써 죄의식을 부과하고 그것에 악의 그림자를 덧씌우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을 여성의 시선으로 보고자 한다면 그것은 사회가 억압으로 눌러 온 것의 실체를 있는 그대로 들여다보며 개방된 세상 속에서 그 어떤 구속도 없이 자기를 발견하려는 처절한 탐색의 여정임을 발견할 수 있다.

 

【출처: 헨리 밀러, 《북회귀선》 中 아나이스 닌의 서문 일부 발췌】


아나이스는 성 탐닉에 안달하는 성 탐닉자가 아니며, 자신의 성적 자유를 위해 타인을 파괴하는 인물도 아니다. 《헨리와 준》에는 작가로서 또한 불륜의 관계자로서 헨리 밀러에 대한 재정적 지원에 대한 직접적 표현은 없지만 그녀는 그의 문학적 동행자이자 지지자로서 많은 영향을 서로 나누었다. 스치듯 헨리 밀러의 《북회귀선》의 초고를 아나이스가 읽는 장면이 나온다. 그녀는 이 소설의 서문을 쓰기도 했는데, 아마 그것을 읽었던 사람들은 이미 아나이스의 문학적 역량에 대한 비판은 거두었으리라 믿어진다. 매우 높은 지성의 소지자이면서 밤의 여왕으로서 재능이라는 이 낯선 조합의 여인은 헨리를 비롯한 프레드, 그녀의 남편 휴고나 사촌 에두아르도에게도 낯설면서도 매혹적인 존재였을 것이다. 그녀는 이것을 잘 알고 있었던 사람이었고, 그것을 연출하기 위한 세련된 감각의 소지자였음이 일기 속 도처에서 드러난다. 아나이스 닌의 텍스트를 비난하는 사람들이 존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지엄한 검열의 시대에 감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글로 옮기는 것은 한 여인에게 실로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음을 상기해보면 그 미학적이고 문학적 작업의 결과를 당연하게 볼 것만은 아닐 것이다.

 

“일기는 죽지 않았다. 그가 내 옆에 없어서 그를 애무할 수 도 없을 때, 일기를 쓰는 것 외에 그를 사랑할 다른 방법을 찾을 수가 없다.(《헨리와 준》)” 는 문장은 “단절된 욕망을 대신하여 삶의 충일함을 지속시키기 위한 작업의 일환”으로 글쓰기에 매달리는 아니 에르노가 《탐닉》에서 반복한다. 에로티즘은 존재 자체를 문제삼는, 여자를 존재적 물음에 빠뜨리는 이중의 의미를 갖는다. 삶의 의미로서 사라져 버리는 괘락으로서의 욕망, 욕망의 부재인 삶의 멸실로서 죽음으로, 사회적 통념을 박살내는 이 격렬하고 천박한 음란의 노래는 스스로를 정의하려는 각고의 자기 탐색의 투쟁이다. 자기 욕망을 들여다보려는 자기성찰적 반영의 역동적 상호작용의 결실이기도 했을 것이다. 도덕주의를 앞세워 비난당하고 잊혀지는 작가를 대신해 항변 하고 싶었다.

 

※이 글은 부분적으로 루퍼트 폴이 세운 ‘아나이스 닌 재단(The Anaïs Nin Foundation)’의 아카이브를 참조했음을 밝힙니다. (루퍼트 폴은 1947년 이후 아나이스의 연인이자 1955년 정식 혼인한 남편으로 1977년 아나이스가 사망할 때까지 함께한 그녀의 동행자였다. 폴은 2006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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