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非)인간의 마음(정신)’에 대한 우리 인간의 지식이 소수 과학자들과 철학자들의 노력에 의해 조금씩 쌓여왔다. 오늘날 동물생태학의 시조라 불리는 윅스퀼에서 시작하여 생물철학자들인 마뚜라나와 바렐라를 경유하며 이 책의 저자인 피터 고프리스미스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지향했던 목표는 달랐지만 이들 비인간 존재에 대한 인간의 관점을 수정하는 데 큰 역할을 해왔다. 책의 부제와 같이 문어와 갑오징어 등 두족류(頭足類,cephalopod)의 연구를 통해 주관적 경험으로서의 의식이란 무엇인지, 그 경험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인간적 관점의 전환을 요구한다.
일단 밋밋하고 흉물스러운 머리와 흐느적거리는 다리를 지닌 별로 매력적인 생김새라 할 수 없는 이 동물에 지금까지 지니고 있던 내 편견이 완전히 박살나고 말았다. 이렇게 알량한 이해를 전복시키는 과학철학적 내용임에도 저자가 주인공으로 나서서 들려주는 논구에 재미있는 옛 이야기처럼 빠져든다. 문어를 인터넷에서 검색하면 온통 문어요리 손질하는 법, 숙회 삶는 법 등 미식가들이 적어놓은 글들과 식당 광고들로 화면이 가득 채워진다.
그런데 문어가 통증을 느끼는 주관적 경험을 하고, 단기 기억과 장기 기억을 구분할 줄 알며, 따라서 목표 지향적이며 계획을 할 줄 아는 동물임을 알게 되었을 때, 펄펄 끓는 물이 있는 솥단지에 던져 넣는 행위는 더없이 야만적 행위처럼 느껴질 것이다. “유럽연합은 동물실험 규범에 문어 등 두족류를 ‘명예 척추동물’로 등재”함으로써 뇌 절제, 신경 절단 등 고통을 가하는 실험 대상으로 삼지 못하게 명문화하였다고 한다. 아무래도 한국사회의 어부들이나 식당들은 이 무슨 해괴망측한 주장이냐며 펄쩍 띌 것 같다. 아니 이들을 즐겨 먹는 우리들에게도 입맛을 거북하게 하는 주장으로 여겨질 것도 같다. 통증을 느끼는 동물을 식용의 대상으로 삼을지 말지는 이 책의 주제가 아니기에 이쯤에서 멈추기로 한다.
책은 언제부터 감각-행동 반응을 가진 동물이 출현했으며, 이러한 반응 행동을 위한 신경세포의 진화적 등장과 더불어 그것이 단세포에서 다세포 유기체에서 어떠한 기능의 요구에 의해 달성되었는가라는 질문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문어 등 두족류가 우리 포유류 인간과 언제 공통조상에서 분기하여 각자의 고유한 신체 구조와 신경연결과 뇌를 발달시켜 왔는가를 추적한다. 고생물의 진화적 분기의 역사를 추적하는 일은 언제나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특히 의식의 차원으로 이어질 때면, 이 의식이란 것이 인간 등 척삭동물(등쪽 신경삭에서 유래한 중추신경계를 갖는 동물군)의 고유한 것이라는 이해에서 어떤 진화적 우월의식의 분기를 전제할 때 더욱 그러하다.
이는 중추신경계, 즉 큰 뇌를 발달시킨 동물에 대한 포유류의 자부심(?)일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복잡하고 활동적인 신체를 갖는 종을 배출한 동물문은 세 가지가 있다. 절지동물, 척삭동물, 그리고 연체동물의 한 집단인 두족류가 그러하다. 문어가 큰 뇌와 많은 뉴런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내겐 전혀 새로운 이해이다. 참문어는 대략 5억 개의 뉴런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1천억 개의 뉴런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절대적 크기가 아니라 뇌의 상대적 크기, 한 동물 개체가 뇌에 얼마나 투자를 하고 있는 지를 보여주는 것은 상대적 크기이다. 이러한 상대적 비교에서 문어는 단연코 엄청난 신경세포를 지닌 보기 드문 동물이다. 뇌는 행동을 제어하는 도구상자와 같다고 생물학자들은 말한다. 이 도구상자는 일종의 인지능력이 포함되어 있다고 상정하곤 한다. 그렇다고 문어가 인간과 같은 인지능력을 가졌다고 판단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을 비롯한 척삭동물의 뇌 구조와 문어의 뇌구조는 완전히 다른 형태를 지녔다. 더구나 문어 한 개체가 지닌 뉴런은 뇌에 모여 있지 않고 다리에 뇌의 두 배에 달하는 뉴런이 분포되어 있다. 문어의 신체는 전체가 뉴런으로 덮여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두족류의 진화역사 - 신경계의 진화
잠시 진화의 사다리를 거슬러 이러한 신경세포가 왜 발달되어야 했는가의 의문은 캄브리아기 대폭발로 불리는 생물군의 무한한 다양성이 나타났던 시기에 흥미로운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다. 이러한 신경세포의 진화가 생물체들에게 왜 필요하게 되었는가의 현상을 발견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캄브리아기에 앞선 시기를 대략 6억 5천만 년~5억 4,200만 년의 에디아카라기(Ediacaran)라고 부른다. 이 시기에 우리의 조상과 문어의 조상인 공통조상이 분기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것은 한 생물학자의 우연한 화석 발견에서 시작된다. “양치식물 잎사귀를 닮은 생물로 몸 전체가 누비이불처럼 마디마디가 이어져 있으며, 그 DNA로부터 신경계가 존재했음을 추정”케 하는 동물 디킨소니아(Dickinsonia)이다. 아마 인간과 문어의 공통조상은 이 벌레 같은 동물과 닮았으리라 추정된다.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 박물관, 디킨소니아(Dickinsonia) 화석】
이들에게는 큰 눈도, 발톱도 가시도 껍데기도 없으며, 그 어떤 무기도 방패도 없다. 즉 캄브리아기가 도래하기 전인 이 시대의 생물들은 전혀 다른 생물을 감지할 필요가 없는 평화로운 시대였음을 뜻한다. 이때에는 단세포가 다세포가 됨으로써 주변의 다른 세포들의 존재와 활동을 감각하던 것이 다세포, 즉 단세포의 뭉텅이가 됨으로써 다른 존재가 지각하고 반응하도록 하는 화학물질이라는 신호보내기가 자신들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세포들 간의 상호작용을 위한 신호, 협응의 신호능력에 집중되었음을 의미한다. 바로 이러한 동물들 내부에서 일부 세포들 사이의 화학적 상호작용이 신경계의 기반이 되었다. 여기 한 가지 난제가 존재한다. 이 내부의 소란을 통제하기 위한 신경계의 구축은 비싼 경제적 대가를 요구한다. 매 초 수백 번씩 배터리가 충전되고 방전되는 전기적 경련을 위한 에너지는 매우 사치스러운 경제이다.
신경계는 왜, 뭘 위해서 필요했는가의 문제이다. 기본적 기능은 다세포 유기체가 자신의 지각 행위를 이끌기 위한 것이다. 다시 말해 다세포유기체가 된 자신의 행위를 유용한 방향으로 이끄는 방법은 일과 본 것을 연결하는 일이다, 즉 주변환경을 포착하고 이 정보를 이용해서 무엇을 할지 결정하는 일이다. 또 다른 하나는 행위 자체를 창조하는 것이다. 무수한 일부분들이 만들어내는 수축, 뒤틀림, 경련들을 가지고 한 개체 차원에서 행위를 만들어내는 과제를 해결해야 하는 것이다. 단세포들의 미세-행위들을 다세포인 하나의 유기체로서 거시-행위로 빚어내야 하는 것이다. 미시행위의 조정자로서 행위-형성적 능력을 초기 신경계가 한 것이다.
에디아카라기의 생존한 많은 생명체들은 이러한 기초적 신경세포를 구축했지만, 캄브리아기가 되자 이 세포유기체인 동물들은 자신들이 다른 동물의 환경에서 주요한 일부분이 되었음을 감지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감각이 매우 중요해진 것이다. “이 시점부터 정신은 다른 정신에 반응하여 진화해왔다”고 저자는 급진적으로 의인화된 표현을 구사하며 캄브리아기 고대 생물체들에 정보혁명이 일어났다고 선언한다. 이때 겹눈, 카메라눈이 모두 등장했으며, 감각 정보의 유입으로 복잡한 정보를 내부에서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이 빠르게 진화했다고 보는 것이다. 이것을 오늘의 군비경쟁 식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포식이 등장하면서 서로의 존재가 생존이 결린 결정적 삶의 일부가 되었으며, 이 새로운 관계는 연쇄반응을 촉발, 한 종의 진화가 다른 종에게 변화된 환경이 되었고, 그 다른 종 역시 그에 맞춰 진화해야 했다. 추적, 추격, 방어, 사냥감이 숨거나 스스로를 방어하는 진화능력을 갖추면 포식자는 추적하고 제압하는 능력을 향상시켜야 했다.”
이때 공통조상으로 분기된 두족류는 자기 길을 걷기 시작한다. 두족류는 초기에 껍데기로 몸을 싸고 있었다, 두족류의 하나인 앵무조개는 2억 년 전의 모습을 오늘에도 하고 있다. 일부 두족류는 껍데기를 포기하기 시작했는데, 움직임의 자유를 얻는 대신에 취약함이라는 대가를 가지게 되었다. 갑오징어는 껍데기를 몸 안에 보존했으며, 오징어는 몸 안에 연갑이라는 칼 모양의 구조를 지니고 있다. 문어는 완전히 껍데기를 버리는 선택을 했다. 이로써 자신의 눈알만한 크기의 구멍을 통과하는 몸의 형태를 지닌 유일한 두족류가 되었다. 완전한 유연성을 확보한 것이다.
문어, 갑오징어의 주관적 경험에 대해서
20세기 중반 이탈리아 나폴리동물연구소에서는 피터 듀스라는 인물에 의해 문어에 대한 행동연구가 실험되었던 모양이다. 이때 문어는 자신만의 생각을 지닌 동물임이 보고되었다. 장난과 호기심이 많고, 수족관의 불을 끄는 법을 익히고, 자신을 짜증나게 하는 대상에게 물을 뿜기도 한다. 불을 끄기 위해 자리를 잡고 빛을 겨냥할 가치가 있음을 빠르게 익혔다는 것이다. 물고기는 자신이 야생이 아닌 수족관에 갇혀있다는 걸 모른다, 반면에 문어는 자신이 갇혀있음을 인지한다는 것이다. 또한 대상을 식별할 뿐 아니라, 인간이 자신을 보고 있는지 은밀히 파악하고 있다가 보고 있지 않을 때 행동을 개시한다. 이 실험은 저자가 옥토폴리스로 불리는 시드니 해안의 15미터 해저에 열 두어 마리의 문어가 서식하는 야생에서의 관찰과 많은 부분에서 일치한다.
옥토폴리스는 문어가 즐겨먹는 조가비들이 많은 곳이다. 그곳은 조가비 껍데기기 수북이 쌓여 그 사이에 굴을 만들어 들어앉아 서로를 주시하거나 간헐적으로 굴에서 나와 돌아다니거나 서로를 지나치다 다리를 내밀어 상대를 쿡 찔러보거나 탐색하며 그에 대한 응수로 싸움으로 번지기도 하는 모습을 들려준다. 그들은 이동하면서 사냥하는 포식자로서 유연하고 까다로운 추출식 먹이 사냥을 한다. 문어의 다리에는 수많은 뉴런이 있다고 했다. 다리는 그 뉴런들에 의해 독자적인 감각-행동을 한다. 문어의 뉴런이 대량으로 증가한 것은 이렇게 제어하기 힘든 다리와의 협응과 제어를 위해 필요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렇게 막대한 신경세포의 필요는 내부적 제어를 위한 진화의 산물이었지만 그것은 부산물로써 부수적 이익을 가져왔다.
앞선 실험 사례처럼 외부 대상의 식별은 ‘지각 항상성’이라는 시점을 달리하여도 동일한 대상임을 인식하는 능력을 갖게 된 것이다. 반면 척삭동물인 많은 새들은 이러한 지각 항상성을 지니지 못하고 있다. 비둘기 눈 실험에서 한 쪽 눈을 가리고 사물을 보게 했을 때, 다른 눈으로는 그 사물을 알지 못한다. 즉 비둘기는 반쪽의 뇌를 가졌다. 동일한 대상을 식별하지 못한다, 새들이 머리를 이리저리 흔들며 다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안구(眼球)간 전달이 되지 않는 지각항상성이 결여되었기에 여러 방면에서 들어오는 정보를 받아들이기 위해 하는 조잡스러운 임시방편으로 고안된 기술이다. 문어는 자신이 먹을 수 없는 새로운 사물에 호기심을 보인다. 대부분의 동물은 이내 흥미를 잃어버리지만 문어는 한동안 그 사물을 잡고 이리저리 훑어보고 자신의 놀이기구로 삼는다. 이러한 관찰 사례들은 문어의 주관적 경험이라는 의식의 한 편을 다른 차원에서 인식하게 한다.

일부 생물학자들은 저자의 문어에 대한 이러한 주관적 경험을 의식으로 이해하는 데 반론을 편다. 경험하는 것은 생명체 개체 내부의 복잡한 활동들이 만들어내고 유지하는 “세계의 내적 모형”이기에 문어와 같은 단순한 생물에게는 이러한 내적 세계의 모형이 없으므로 의식이란 어불성설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저자는 통증이나 갈증, 호흡곤란과 같은 원초적 감정들, 즉 신체적 결핍과 상태를 파악하는 느낌과 같은 주관적 경험의 오래된 것들을 왜 의식이라 할 수 없는가라고 반문한다.
이러한 느낌들은 정교한 세계에 대한 내적 모형 없이도 느낄 수 있으며, 결코 복잡한 인지 처리 능력 때문에 나타났다고 생각하는 것은 넌센스라고. 회의적 태도는 언제나 가능하지만 통증은 보편적인 주관적 경험의 형태임을 부정할 수 없는 것이라고. 우리 인간의 경험을 동물에게 투사하여 우리에게 없는 특성에 기대어 판단하는 것은 오류라는 것이다. 문어는 심하게 손상된 자신의 다리를 잘라냈고, 부상 입은 부위를 한동안 살피고 보호했다. 돌봄과 보호는 통증의 지표이며, 이러한 변화를 이해하고 구별하는 것은 주관적 경험 능력의 표지라는 것이다. 문어의 사냥 여행 관찰에서 저자는 고리 형태의 경로를 기록하며, 능동적으로 이동하고 제어가 가능하며 목표 지향적으로 가득한 삶의 모습을 여행을 마친 후 본래 자신의 굴에 돌아와 앉는 문어를 통해 전달함으로써 의식으로써의 문어의 주관적 경험을 입증한다.
그 밖의 주관적 경험의 양태들
문어는 위장의 대가이다. 문어는 자기 주변의 색깔들과 완전하게 일치된 색깔로 변색한다. 이 뿐 아니라 수많은 화려한 색깔들로 수초 사이에 파노라마처럼 색을 변화하며 마치 자신의 상태를 표현하는 듯하기도 한다. 색깔, 포즈, 디스플레이의 다양한 패턴으로 의례화(儀禮化)된 디스플레이를 구분하기도 하는데, 짝짓기 상황에서 신호와 반응의 조합은 그 다채로운 색깔의 변화가 미묘한 사회적 역할의 수행 가능성일 수 있음을 비추기도 한다.
“문어의 피부는 그 자체로 빛을 감각하며 동시에 피부의 색깔에 영향을 미치는 반응을 일으킬 수 있다. 문어는 피부를 통해서도 볼 수 있다. 정교한 색채 제어 기제를 조작하여 반응한다.” -본문 166쪽에서
정말 놀라운 것이기도 한데, 노란색, 은회색, 검붉은 색 등 무수한 색깔로 자신의 신체를 변색하는 문어가 실은 색맹이라는 점이다. 자신의 변화하는 찬란한 색을 볼 수 없다면 이 무슨 해괴망측하고 사치스러운 조화란 말인가? 막대한 비용을 소요하는 이 변색은 위장과 신호보내기를 위한 진화 산물이었으며, 그 부산물로 위장과 신호보내기의 중간적 위치인 데이마틱 디스플레이(deimatic display)라는 포식자로부터 도주하면서 생성하는 강한 대비의 패턴을 통해 적을 놀라게 하거나 혼동케 하려는 시도의 효과를 얻었으며, 나아가 자신의 상태를 표현하는 표지, 일종의 언어(?)로의 가능성을 얻었다고 저자는 판단하고 있다. 즉 위장 기제가 의사소통과 정보 전파의 수단이라는 새로운 쓰임을 얻은 것이라는 것이다. 비록 눈은 색맹이지만 피부 세포는 이러한 빛을 감지하는 소포들이 있어 자신의 색깔을 피부가 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가 자신의 변화하는 색깔을 보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인간의 판단은 너무도 인간적이어서 오류에 빠지고 만다는 것이다.
비고츠키나 다윈과 같은 탁월한 생물학자들은 내적이든 외적이든 언어는 복잡한 사고에 필수적 중요 도구라고 주장했다. 그들은 언어 없이는 지각, 인지와 같은 의식에 다른 행동은 불가능하다며 문어와 같은 단순한 두족류의 ‘감각-행위’ 및 ‘행위-형성’ 적 활동을 부정했다. 그러나 내면의 언어적 흐름 없이도 자신의 사고와 행위를 조직화하는 사례는 차고 넘친다는 것이다. 언어 중추가 손상된 실어증 환자의 실험 사례는 언어를 잃었어도 주변세계의 감각과 판단, 행동에 문제가 없었으며, 단 세 가지 정도의 소리를 내는 개코원숭이는 이러한 단순한 소리를 해석하여 주변 사건들의 의미를 이해한다는 것이다. 결국 언어 없이 인지-판단-행동 활동은 부인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문어도 역시 이러한 경험 기억과 계획하는 마음이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 놓을 수 있다는 것이다.
결 어
2015년 처음으로 문어의 유전체 염기서열이 분석 되었던 모양이다. 각 개체의 생애 동안 신경계가 어떻게 구축되었는지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읽었는데, 인간의 몸에서 발견되는 세포가 정확하게 연결되도록 하는 프로토카트헤린이라는 분자군이 문어에게서도 동일한 일을 한다는 것이 밝혀졌다는 것이다. 문어와 인간이 유사한 분자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은 의외의 사실이다. 또한 최근의 갑오징어 연구에서 특정한 사건에 대한 기억인 일화기억이 있음을 발견했다. 인간의 기억과 구분하기 위해 주관적 경험 요소를 강조하기 위해 ‘유사 일화기억’이라고 명명했다고 한다. 이 용어를 동물에게 적용해도 되는 지에 대한 조심스러운 명명일 것이다. 특정한 먹이로 무엇을, 언제, 어디서 구할 수 있는지에 대한 명료한 기억을 지녔음을 증명했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저자는 각기 다른 계열에서 거의 확실히 평행 진화가 일어났다고 주장한다. 전혀 다른 신체에서 큰 뇌를 진화시킨 이들 두족류의 신경계 진화는 우리가 여전히 알지 못하는 의미를 담지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오랜 인류의 역사를 지배해왔던 인간중심주의는 이제 그 환상이 비인간들의 적대가 환경에 나타나면서 새로운 관계로 이해될 것을 요구하는 도전과 마주하고 있다. 육지 생물은 물론 바다의 생물도 남획되고, 눈에 보이지 않는 점증하는 스트레스로 사라지고 있다. 어떤 생물체도 살아갈 수 없는 오염물질과 산소가 희박한 데드존이 바다 곳곳에 생겨나고 있다. 1883년 다윈의 전사를 자처했던 토마스 헉슬리는 "중요한 물고기의 어장은 무한정에 가깝다고 확신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오늘날 이 낙관론은 틀렸으며, 심각한 위기에 처해있다.
바닷물의 산성화로 PH균형도가 무너지면서 유기체들의 영향이 심각한 것이 각종 생물체의 군집 붕괴현상으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의 수년 간 바다 속 야생의 문어 관찰지였던 옥토폴리스에도 문어가 사라졌다고 한다. 우리는 모두 바다를 기원으로 한 생명체들이다. 기원이 파괴되고 있다. 『아더 마인즈(Other Minds)』, 타자의 마음으로 해석할 수도 있는 이 저술은 큰 신경계를 지녔으며, 일화기억은 물론 풍부한 주관적 경험의 실례들을 지닌 문어, 갑오징어 등 이들 두족류가 통증을 느끼는 생명체일 가능성을 강렬하게 전하고 있다.
우리 주변의 비인간들의 마음의 세계를 마치 인간의 다운그레이드(down-grade)된 버전 정도로 인간적 경험으로 투사하는 인식으로는 그것을 제대로 인식할 수 없다. 그들만의 독특한 마음(?)이 있음을, 그것을 의식함으로써 우리는 생태학적 문제는 물론 행성 지구의 보존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생명의 나무, 그 어느 지점에서 분기된 공통조상을 지닌 생태계 만물에 대한 새로운 지각을 획득하게 되는 저술이다. 의식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타자에 대한 이해는 극단적으로 처리될 수 있다. 그 타자가 문어가 되었건 저 어느 곳에서 배제된 채 고립된 존재들이건 그들의 주관적 경험이란 것에 대한 관심과 이해는 이 행성을 조금은 더 살아있음의 풍요로운 즐거움으로 채울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바다 속 낯선 존재, 징그러운 외형의 연체동물, 문어의 삶을 쫓다보니 더는 이들 두족류를 먹거리로 여기는 게 불편해진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