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의 마지막 페이지까지 모두 읽고 책장을 덮을 때 내 표정은 어땠을까를 상상해본다. 마침 그때 거울로 내 모습을 볼 수 없었으니 기억이 조작해 낸 이미지를 떠올려보려 애쓰지만 딱히 그려지지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자신이 남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그 초라한 존재에 대한 각성의 충격으로 조금은 더 겸손한 표정이었을지 모른다. 지금 지나 온 생에서 내게 붙은 많은 것들을 비워내긴 했지만, 여전히 털어내지 못하는 것들이 있는 것만 같다. 더 가벼워져야 하는데, 그래서 자유롭게 새로운 생태적 지위를 확보한 저 플라스틱 봉투의 존재방식, 오늘의 진화가 요구하는 어디에나 현존할 수 있는 편재성을 얻어야 하는데 말이다. 인간의 교만이 만들어 낸 예기치 않은 진화적 유리함을 확보하여 그 인간 중심의 관점을 전환해야 함을 역설하는 그 존재처럼 인간의 오랜 관습을 깨뜨리면서 존재방식의 새로운 장을 여는 존재자가 될 수 있다면 그 얼마나 위대한 변화가 되겠는가.
“내 순례의 목적은 늘 다른 순례자이다.” - 37, 191, 402, 481, 593쪽
책 속의 많은 인물들은 어디론가 이동하고, 여행하며, 순례길을 떠난다. 아니 그저 이동해야만 하는 것이 삶의 행로임을 보여준다. 뭐 거룩하고 위대한, 혹은 숨겨진 진리를 찾아 나서는 것으로서가 아니라 삶이라는 것을 살아내야 하는 것이 일상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무수한 형태와 상황을 지닌 모습들이고, 서로 어떤 인과관계나 관련성이 없는 에피소드들, 즉 조각난 파편들의 이미지들이다. 벌집의 칸이나 창자의 뒤틀린 배열을 한 ‘하렘의 미로’에서 벌어졌던, 자신의 첫 번째 방이었던 어머니의 배를 칼로 단번에 찌르는 샤프란 왕국 황제의 정말 예기치 못한 에피소드이고. 모든 주민이 알고 지내는 작은 섬에서 사라진 아내와 아이의 실종을 수색하는 쿠니츠키란 인물의 경계와 단절의 혼돈 속을 헤매는 포착되지 않는 미지의 대상에 대한 추적의 실패 이야기이고, 이 세상의 고유한 자리를 차지한 모든 것, 프레임, 규범, 박제된 모든 것으로부터, 그 숨결이 닿지 않는 곳을 향한 한 여인의 방랑의 여정이며, 낯섦, 이질성, 기이함 속에서 존재의 참모습, 본성이 발견되리라는 고통스러운 믿음에 기초한 끈질긴 발걸음의 여정들이다.
또한 세상이 시작될 때부터 인류가 저질러 온 범죄를 하나도 빠짐없이 기록하게 될 알렉산드라라는 여성의 “인류의 고해성사가 될” ‘거대한 악행의 기록’이며, 동등한 여러 상황 속에 놓인 인간의 모습을 설명하고자하는 여행 심리학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바로 이러한 노력의 집중을 통해 ‘전체’, 즉 저 멀고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조망의 시선을 지니기 위한 집요한 탐구이다. 그래서 세계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획득하기를 요구하는, 아니 넌지시 제안하는 책이기도 하다. 그 새로운 관점이란 ‘호기심의 방’으로 대변되는 분더카머(Wunderkammer), 기이하거나 괴이한, 자연에서든 예술에서든 기존 규범이나 관습에서 벗어난 물건들이 수집 전시된 것들의 순례를 반복 기술하는 것으로 획득되는 낯선 존재의 수용일 것이다.
오늘의 사람들은 수식, 기호, 도표 등을 통해 세상의 지배법칙이나 그 자체의 묘사가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여긴다. 그리고는 자신들이 설명할 수 없거나 외면한 것들로부터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 ‘방어기제’라는 자기 합리화, 속임수 따위를 허용하는 보호막으로 단단한 요새를 쌓아놓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자기 부정이고, 기만임을 어찌 모를 수 있겠는가. 물론 그것들과 직면하면 인간들은 무너지고 말 것임을 아는 까닭일 것이다. 때문에 스스로에 대해 아무것도 모름에도 불구하고 마치 명석한 질문이 제공되면 알아서 이해할 수 있으리라 단정 지으며, 이 세계의 모든 현상들이 예측 가능하다고 단언한다. 그런데 왜 인류세라는 위기에 직면한 듯한 종말적 낱말이 출현했을까? 인간중심의 관점, 자아 중심의 세계관이 빚어낸 자연의 반란 아닌가? 올가 토카르추크는 바로 이러한 당연함의 인간관점을 모호함으로 만들고, 반박할 수 없는 논거에 끊임없이 의심을 제기함으로써 세계를 개체적 시야에서 전체의 시야로 확장하여 보도록 견인한다.

물론 올가 토카르추크만의 고유한 형이상학적 신비주의가 있다. 하지만 그것은 감성을 폄하하고 혐오하는 이성주의자들의 관점을 벗어나면 대체 우리가 알 수도 없고, 표현 불가능한 존재의 시원, 존재의 의미를 대체 어떻게 표현할 수 있겠는가. 세상의 숨겨진 질서, 자연의 꽃잎이 여자들의 몸에도 그 징표를 만들어 놓았듯, 그 넌지시 남겨진 암시를 무엇이라 말 할 수 있겠는가. 아킬레스 코드를 발견하고 명명했던 네덜란드 해부학자 필립 페르헤이언이 자신의 잘린 다리를 유리병에 보존하고, 인생을 그 절단된 다리로 향하는 여행에 바친 삶의 형태가 말해주는 것처럼 “가장 미세한 파편조차 커다란 총제에 귀속”되어있음의 직관이며, 존재하지 않는 것이 ‘나’를 아프게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육체와 영혼의 본질에 대한 깨달음과 같은 것일 게다. 핍립 페르헤이언은 말한다. “부적절한 지성이 우리에게 나쁜 영향을 미친다”고. 인간의 언어와 논리로 포장된 외적 증거들이란 인간의 정신을 유쾌하게 만들어주는 어떤 질서의 형태가 주는 안락함에 불과한 것 아닌가? 그것들이 세계를 경계와 범주로 구분하고, 타자 인간과, 비인간을 배제 단절시킴으로서 세계에 대한 전체의 시야를 잃은 것이 아니겠는가.
울가 토카르추크는 간과하고 넘겨버릴 수 있는 인류의 중대한 관점의 전환을 시사했던 두 역사적 인물이 발표한 두 권의 책, 코페르니쿠스의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 1장과 베살리우스의 『인체의 구조에 관하여』가 완성된 1542년을 인류의 새로운 시대가 시작된 해로 쓰고 있다. 고대 그리스 이래 서구의 오랜 세계 관점을 그야말로 허물어뜨리는,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혁명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한 번 목격한 질서는 인간의 정신을 일깨우기 마련이고, 그 정신에 지울 수 없는 중요하고 근본적인 선과 면을 새겨놓는다.” -282쪽
그래, 오랜 인간의 자기중심적 관점이 파괴되어야 하는 것임을 목도한 이가 어찌 그것을 외면할 수 있겠는가. 그녀는 세상을 바라보는 두 가지 관점, 개구리의 관점과 공중을 나는 새의 관점 중에서 하늘을 나는 존재로써 세계를 인식하여야 함을 알았던 것일 게다. 그것은 끊임없는 이동으로서의 현실의 직시이고 이 책은 바로 그 실천이다. 책의 원제목 폴란드어 ‘비에구니(Bieguni)’가 '달리는 사람들'이라는 의미처럼, “끊임없이 움직이는 것만이 악을 피하는 비법”이라 믿는 커다란 은유일 것이다. 물리적 공간의 이동을 포함한 정체된 영혼(정신)으로서가 아닌 지속되는 사유작용 혹은 알 수 없는 무한한 원소들의 활동으로서 ‘순례의 목적인 늘 다른 순례자’인 보존 처리된 해부된 인체와 그 조각들을 비롯한 여행, 방랑, 유목으로 표현되는 ‘이동성’과 조응하며, 전체인 시원(始原)의 관점에서 존재를 생각토록 하는 것이다.
카이로스(Kairos), “순환하는 시간 속에 장소와 시간이 교차하는 다시 오지 않을 유일하고 적절한 가능성의 아주 짧게 열리는 찰나(刹那)의 순간”, 어쩌면 우주의 헤아릴 수 없는 하나의 개체로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이 유일한 기회의 포착물일 것이다. 그래서 무(無)에서 무로 달려가는 것은 아무런 원인도, 이유도 없는 지극히 당연한 귀결일 테다. 별다른 의미 없는 무엇인가의 순간적 마주침의 지점에 정말 우연히도 인간들 자신의 말로 거대한 공동체 조직의 한 구성 존재임을 문득 자각하게 된 것이리라. 하지만 이것이 실수였던 것이 분명해 보이지만, 동시에 이것은 지금 인류에게 뒷머리 없는 앞머리만 더부룩하게 자란 쏜살같이 지나쳐가는 기회의 신 카이로스의 앞머리를 움켜쥐어야만 하는 그런 순간의 시간에 오늘의 인류가 있음에 대한 긍정의 신호이기도 할 것이다.
호기심의 방에 진열된 창조의 과정에서 발생한 실수와 실책을 추적하면서 기이한 것들을 찾아 천천히 그리고 끈질기게 발걸음을 옮기며, 어떤 전체의 무한성의 이미지를 향해 계속해서 돌아가려는 강박적 추구를 하는 올가 토카르추크의 의식의 작용. 그것이 설혹 질병적 징후의 이름인 재발성 해독 증후군으로 불릴지언정 나는 그녀의 감성과 지성의 요구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녀가 『다정한 서술자』에서 언급했듯, 잃어버린 세상의 모든 작은 조각과 파편들에 다시금 존재 가치를 부여하고, 그들의 감정을 공유하며 끊임없이 ‘나’와 닮은 점을 찾아 낼 줄 아는 능력을 복원하기 위한 기술(技術)에 대한 감각과 생각이야 말로 바로 ‘다정한 서술자’일 것이다. 관점의 혁명을 내재한 모든 존재가 지니고 있을 체험과 생각, 그에따른 감정을 그대로 기술할 수 있는 충실한 대변자의 목소리를 발견하게 되는 것은 그런 연유일 것이다. 세상을 무한성, 저 높은 곳으로부터의 전체적 조망의 시각, 관점을 지니도록 해주는, 어쩌면 시초의 이야기라 해도 될지 모르겠다. 타자의 운명을 체감토록 하는 다정한 서술자의 음성, 그 지난한 노력의 한 결실일 것이다.
노발리스는 그의 소설에서 “철학이란 본디 향수(鄕愁)요, 어디에서나 고향을 만들려는 하나의 충동이다.”라고 썼다. 이 감성적 언어에 극단적 이성론자인 하이데거는 비록 혐오와 멸시의 시선을 보냈지만, 그 의미만은 물리치지 않았다. 우리 인간 존재들은 전체로서의 세계 내 한 개체로서 그 시원에 대한 그리움을 품고 있다. 『방랑자들』은 바로 이러한 우리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무수한 관계들이 맺고 있는 그 어떤 것들에 목소리를 투여하고 존재하고 표현될 수 있는 공간과 시간을 선사하는 것이다. 아마 세상에 대한 이야기들은 이렇게 계속해서 직조되어 인간과 사물, 자연 상호간의 영향과 연결이라는 통합적 관점으로 조망하는 에너지를 우리들에게 불어넣어 줄 것 같다. 우리가 알던 그 편협한 영역을 뛰어넘기를 주저하지 않을 방랑자로서의 용기가 내게 스며들기를. 뒤늦게 올가 토카르추크의 글쓰기에 내 감성이 흠뻑 젖었다. 아마 그녀의 작품들을 당분간 계속해서 읽게 될 것 같다. 모든 물성과 인과관계를 초월하여 귀 기울여 들을 줄 아는, 그래서 그것을 다정하게 들려주는 목소리를 계속 곁에 두고 싶은 욕심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