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필리아
  • 이야기꾼 에세이
  • 발터 벤야민
  • 16,200원 (10%900)
  • 2025-10-25
  • : 11,810

언제부터 현대적 의미의 소설이 시작되었을까? 벤야민은 그 상황을 이렇게 말한다. “전통이 무너지고 개인이 고립되기 시작한 상황, 삶의 의미를 찾고 싶은데 조언을 구할 데가 없는 상황과 관련”되어 있다고. 전통의 무너짐이라 해서 무슨 수구(守舊)적 퇴화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개인이나 공동체의 이야기를 어떻게 진행시켜야 하는지에 대한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본(本)이 되는 이야기, 즉 경험 지식(經驗知識)이 사라져버린 것을 지적하는 것이고, 그러함으로써 개인의 고립이 극단화되어가는 현대 사회 속에서 삶의 추위를 녹이는 구조가 필요하게 된 것이라고.

 

이 책은 이렇듯 오늘날 우리들이 잃어버린 경험지(知)로서의 이야기를 상실했음에 대한 서사문학의 미래, 즉 인간 삶의 의미를 어떻게 찾을 수 있는가에 대한 고찰이다. 그 최종적이라 할 비평 글인 「이야기꾼; 니콜라이 레스코프의 작품에 대한 고찰」(이하 「고찰」로 표기)과 그에 이르는 벤야민의 사유 과정이라 할 앞서 써진 관련 글들, 그리고 「고찰」 속에 인용되거나 활용된 원전들이 함께 수록된 보기 드문, 읽는 사람들을 위한 배려가 돋보이는 구성을 하고 있는 엮은이의 애정과 노고가 깃든 책이다.

 

“공동체의 기억이 있던 자리에 개인의 회고가 들어서고, 변모하는 경험지의 자리에 현대인의 당혹감이 들어선다. 때문에 소설에서 찾아야 하는 것은 이야기의 교훈이 아니라 삶의 의미다.”

 

어쩌면 이 한 문장이 벤야민의 「고찰」이 관류하고 있는 의미를 대표하고 있다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오늘 우리들은 이야기를 할 줄 모른다. 표면적으로는 그 어느 때보다 스토리텔링이니 내러티브니 하고 마치 이야기가 세계의 감각적 지성, 인간 삶의 의미를 품고 있다고 떠들고는 있지만 정작 이것들은 상술과 정치적 선전용의 이야기 고유의 본질을 흐리는 남용된 어휘일 뿐이다. 더구나 넘쳐나는 정보의 확산으로 이야기는 자취를 감추고 삶이라는 깨달음은 아주 요원해져가는 인상이라고 말하는 1세기 전 한 천재의 말이 너무도 현재의 목소리로 들리는 데 움찔하게 된다. 벤야민의 「고찰」에 이르는 통로로써 엮은이는 한 조각 한 조각씩 흩어져 있던 글들을 모아 궁극의 담론에 이르렀을 때 독자들이 절로 이해의 눈이 뻥 뜨이게 배치하고 있다.

 


그 첫째 관문의 글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듯 생생한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점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작가”로서 한 번도 인정받은 적 없는 거장인 「요한 페터 헤벨」의 작품을 통해 ‘이야기’의 서사적 의미, 세상만사에 대한 경험지로서의 이야기란 무엇인지를 탐색한다. 헤벨이 책으로 펴낸 『라인지방 가정의 벗의 보석상자』는 달력의 매월에 함께 기록된 짧은 글들의 모음집인데, 벤야민은 여기서 하나의 이야기 첫 문장을 소개한다. “다들 알다시피 일전에 베른하임의 한 늙은 촌장은(...)”, 이를 통해 헤벨은 세상만사와 도시 소문의 조응관계 전체를 지펴낸다. 그가 쓴 이야기는 가벼운 문체 속에 세계, 인간 삶의 기지와 윤리, 인애, 행위 규범이 금맥처럼 묻혀있다. 엮은이는 헤벨의 짧은 이야기 「뜻밖의 재회」도 수록하여 벤야민이 기술한 의미를 직접 읽어보고 경험할 수 있도록 주선하고 있으니 하나의 글을 독해하기 위한 모든 것이 완비된 완벽구성의 책이라 해도 무방할 것 같다.

 

이어지는 글은 대서사가의 일과 소설가의 일을 설명하는 「소설의 위기: 되블린의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에 관하여」인데, 아마 되블린의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을 읽어본 독자는 종잡을 수 없는 서사로 중단을 했거나 의미독해가 미완인 채 내려놓은 기억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소설의 배경인 베를린광장은 “소시민층의 사회학적 음화인 사기꾼들의 장소”라는 벤야민의 정의 한 문장만으로도 많은 의문이 풀릴 것이다. 포주의 자리에서 소시민의 자리로 가는 프란츠 비버코프라는 인물의 길을 따라가며 그의 삶이 대체 읽는 독자에게 무엇이었는지를 다시금 더듬어 보게 되기도 한다.


대체 소설이란 무엇이어야 하는지, 되블린이 “옛 부르주아 교양소설의 극단적이고 최종적으로 밀어붙여 증명”하고자 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 볼 수 있게 된다. “소시민적 인쇄물들, 추문들, 참사들, 화제들, 대중가요들, 신문광고들” 이 “폭설처럼 쏟아”지는 구조와 문체가 해체된 이 작품이 자료의 증명력에 의해 가난과 결탁한 증오스러운 삶의 그 던적스러움에 대한 비판이었음을. 앙드레 지드의 순수문학에 대한 강변과 대립하는 되블린의 첨예한 비판적 시각을 대비하면서 독자는 소설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획득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산딸기 오믈렛」이라는 글은 그야말로 벤야민이 이야기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직접 실현해 보인 글로 여겨지는데, 아마도 이 글에서 독자들은 이야기의 맛, 너절하게 설명되지 않았지만 이야기 자체가 발하는 내용에서 절로 어떤 지혜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야기란 바로 그런 것이라고 보여주고 싶었던 것일 게다. 50년 전 전쟁터에서 패하여 도주하다 맛본 산딸기 오믈렛을 대체 어떻게 동일한 맛을 낼 수 있겠는가. 왕의 잔인한 요리 요구에 응답하는 요리사의 답변이 구구절절 흐른다. 이야기의 정수를 맛보았다. 「리스본 지진」이라는 글도 이야기의 이러한 입증의 또 다른 사례일 것이다.

 

이는 「이야기 기술」이라는 글에서 담론으로 다시 설명되는데, “무슨 이야기를 듣고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를 다시 들려줄 때 설명을 삼갈 수 있다면 이미 이야기 기술의 절반은 터득한 셈입니다.”라는 문장인데, 이보다 명확한 이야기의 정의가 어디 있겠는가. 여기서 벤야민이 여러 글에서 이야기의 힘을 강조할 때 인용되는 헤로도토스의 『역사』3권 14장의 페르시아 왕에게 패하여 생포된 이집트 왕 프사메니투스의 슬픔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이야기 내부에 응축된 이야기의 힘을 독자는 부지불식간에 체득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소설이란 무엇이고 독자들은 왜, 어떻게 읽어야 하는 것일까. 소설이 아닌 이야기를 설명하는 「오스카 마리아 그라프: 이야기꾼」의 글에서 그 경계를 읽어낼 수 있을 것 같다. “가진 것을 잃고 아무도 해치지 않기의 기술을 배운 사람”, 철도원에서 사공으로 한 단계씩 전락해가는 인물에 관한 이야기가 등장하는데, 자아구축을 출발점으로 삼는 소설과 달리 그 해체에 관심을 갖는 인간 삶에 대한 교훈이 “마치 감자처럼 지하창고에 차게 저장되는” 이야기의 속성을 확인하게 된다. 벤야민 고유의 비유 문장들을 읽는 것만으로도 이렇듯 그의 글은 지성에 쾌감을 선사한다.

 

그리곤 “권태로울 때면 좋은 소설 한 권을 들고 벽난로 가에 앉아서 불을 바라봅니다.”라는 오스카 와일드의 말로 시작되는 「벽난로에서: 한 소설의 출간 25주년을 기념하며」에서 소설은 “우리가 모르는 운명을 그려 보여주기 때문이 아니라, 그 운명이 불살라지는 동안 그 불의 열기가 우리에게 닿기 때문” 이라고 쓰고 있다. 우리들이 겪는 운명은 그런 열기를 내지 못하는 까닭에. 그래서 “추운 삶을 불로 따뜻하게 데워주기 위해 필요”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오늘의 소설은 과연 이런 것일까? 삶의 위로로서의 소설만이 소설의 역할인가?

 

「소설 읽기」에서 벤야민은 “읽으라고 권할 수 있어도 직접 겪어보라고 권할 수 없는 체험”으로서, 날 것의 세계를 위로 끌어올려 식용의 상태로 만드는 것이 소설이라고, 먹음직스러운 요리의 비유를 들어 설명한다. “감정이입이 아니라 섭취의 탐닉에 종사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읽기의 기술은 쓰기 기술의 전제조건이다. 읽는 이를 전제로 하지 않은 소설이란 가능한 것이 아니니 말이다. 이 글은 소설의 반영을 이해함으로써 소설의 역할에 대한 또 다른 의미가 될 것 같다.

 

드디어 궁극의 글에 가까이 다가갔다. 「이야기꾼; 니콜라이 레스코프의 작품에 대한 고찰」은 이들 글이 수렴된, 집대성된 최종적 서사비평 담론이다. 별도로 시시콜콜 말하지 않아도 이미 앞선 글들에 몰입했던 독자는 그 글들의 종합편, 전체 맥락 속에서 서사에 대한, 이야기와 소설에 대한 이해에 도달하게 된다. 경험지로서의 이야기가 실종된 시대에 소설은 무엇이어야 하는지, 그것이 담아내는 삶의 의미에 대한 기술은 대체 무엇이어야 하는지 생각해보는 시간이 될 터이다. “한 시대가 자기의 의미를 발견하는 것은 그 시대의 몰락이 시작되는 때”라고 말한다.

 

“그때가 우리 인생에서 최고의 순간이었을 거야!”라는 깨달음으로 끝나는 것이 소설이라면, 이야기는 결코 이렇게 끝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이야기는 그다음에는 어떻게 라고 질문할 수 있는 것이라고. 반면에 소설은 끝난 자리에서 단 한발자국도 벗어날 수 없는 것이라고. 소설은 그리곤 삶의 의미를 생각해보라고 하는 것이라고. 레스코프에 관한 헌사에 가까운 「고찰」은 사라져가는 이야기꾼의 새로운 시대에서의 원시적 출발에 대한 토대 글이기도 할 것 같다. “자기 삶이라는 심지를 이야기라는 은은한 불꽃에 남김없이 타버리게 할 수 있는 사람”으로서의 오늘의 이야기꾼인 소설가의 숙명적 무게를, 그 소명은 이처럼 커다란 내기에 몸을 던지는 것일 게다.

 

이야기가 사라져버린 시대에 살고 있다. 알고리즘에 따라 안내된 이야기 없는 정보만이 범람하는 시대에 들어선 우리들은 이야기하는 능력도 상실했다. 온통 환멸만이 넘실대고, 경험지를 공유하는 능력이 발 빠르게 소멸해 가고 있다. 무수히 양산되는 소설도 벤야민의 지적처럼 “상식 심리학의 렌즈로 왜곡시키는 인물과 운명에 대한 큰 그림을 모르는 싸구려 소설”들이 지천이다. 파괴적으로 쓸어버리고 부숴버리는 힘의 장(場) 한 복판에 선 작고 약한 몸뿐인 인간들은 냉혹한 고립 속에서 부들부들 떨어대며, 그저 환멸만을 곱씹으며, 공허한 주먹질만 해댈 뿐이다. 모두가 인간적 길의 방향을 상실한 시대, 벤야민의 요구처럼 지금 “우리들이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부족함에 해당하는 상황”임을 인정하자는 말에 더없는 공감을 하게 된다.

 

“긍정적 야만”으로서의 처음,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어쩌면 새로운 야야기의 형식과 구조를 창안해야만 하는 시기에 도달해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1936년 보다 오늘 그 요청이 더욱 실감나는 시절이다. 이 책은 누구의 말처럼 낯선 도시에 떨어져 방향감각을 잃고 방황하게 되는 난해한 여느 글과 다르다. 친절하게 모여진 글들을 인내심 많은 수공예가가 한 땀 한 땀 천을 직조하듯 짜 모은 노고로 인해 마치 전혀 다른 벤야민의 글을 접한 듯한 편안한 느낌으로 읽어나갈 수 있는 책이다. 에른스트 블로흐, 폴 발레리의 접하기 어려운 글들은 물론 인용 원전의 글들까지 풍성하게 엮여있어 한 권의 책이 하나의 글을 읽기 위한 최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서사문학을, 시대의 글쓰기를 고뇌하는, 소설을 어떻게 읽을까 고심하는, 나아가 삶이란 무엇이어야 하는지, 세대를 이어나갈 지혜의 전승 도구를 숙고하는 모든 이들에게 이 책은 무한한 영감의 원천이 되어 줄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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