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소설집에 함께 엮인 작품들은 습관처럼 커다란 단일한 범주의 상자에 집어넣어 획일화하여 읽으려 하는 의도들을 빈번하게 발견하게 되고, 나 또한 이러한 양태에 의식 없이 빠져들곤 할 때가 있다. 물론 작가가 의도적으로 어떤 테두리에 모아 놓아도 될 작품들로 구성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지만, 그렇다고 범주화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야기들이란 제아무리 단일 주제를 겨냥하더라도 그 속성상 의도치 않은 다채로운 색깔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표제작 「시그투나」를 비롯한 세 편의 단편은 저마다의 고유한 목소리가 있다. 여성에 대한 가부장적 의식의 악의적 고루함에 의해 오명을 뒤집어 쓴, 그 누구도 가지 않았던 길을 걸었던 어린 여성에게 그녀가 품었던 찬란한 빛을 돌려주려는 지극하고 섬세한 작가의 애정으로 가득한 「시그투나」, 이십 년 남짓하게 오래 지난 자신의 책이 영상화로 다시 읽히게 됨으로써 마치 과거의 젊음의 활기를 찾은 듯 의기양양한 사십대에 이른 작가가, 다시는 느낄 수 있으리라 예상치 못한 남자 사람에 대한 연애감정이 병행하면서 과거가 현실에 틈입하는 현재를 관찰케 하는 「인도차이나」, 그리고 “영원히 살 것처럼” 살았던 젊은 날의 한 사건이 인생에 달라붙어 현재에 집요하게 속박당하는 인물들을 묘사하는 「조용하고 먼」처럼, 각 작품들의 목소리는 확연히 다르다.
책 말미의 짧은 평론은 이들을 싸잡아 현재라는 작은 균열 속으로 과거가 침입하듯, 미래는 과거와 교호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는 뻔한 이해와 함께, 예술의 장애와 한계의 인식에도 불구하고 이를 경험하는 자체가 곧 예술적 고통이고, 그 산물이라고 말하며 ‘포스트-예술’론의 틀로 묶어 획일화된 의미를 부여하는 듯하다. 시인 로트레아몽이 ‘해부대 위에서 재봉틀과 우산의 우연한 만남처럼 아름다워!’라고 노래했듯, 서로 다른 수준의 것들도 굳이 분석하고 들자면 그 구성요소들로부터 상관성, 얽힘의 관계를 읽어낼 수 있는 것이다.
이를 재편성하고 조정하여 의미를 밝혀내는 것이 예술비평의 몫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러하다보면 세상 일체의 모든 것이 하나의 단일성에 묶여버리고 말 것이고, 그것에서 우리는 삶의 다양한 색깔들을 무시하게 되어버릴 것이다. 세 작품에서 비록 과거를 오늘에 새로운 시선으로 전달하려는 의지를 읽어낼 수 있을지라도 그것은 지극히 작은 일면일 것이다. 작품을 이렇게 한껏 협소하게 축소하는 독해는 정말 안타깝기만 하다.
내게 세 작품 중 단연 시선을 끈 작품은 연극과 동기생 윤경과 승혜의 이야기인 「조용하고 먼」이라고 하겠다. 소설 속 문구인 ‘조용하고 먼’이나, ‘돌아와 버렸다’와 같은 구절들이 이끄는 감성은 묻혔던 기억들에 대한 비로소의 마주함과 같은 해결되어야만 했던 상처에 대한 물음일 것이다. “표절이라는 말이 아까울 정도로 남의 작품을 토씨하나 바꾸지 않은 채 베낀” 졸업작품을 준비한 동기 윤경에게 승혜가 그 작품을 안다고 얘기함으로써 발단된 젊은 날의 사건을 주요 제재로 한 이야기다. 이 사건으로 인해 승혜는 담당 교수와 동기들로부터 배반자, 밀고자로 낙인찍혀 연극작품 활동의 미래를 잃게 된다.
이를테면 도덕적 학문적 부정을 저지른 사람과 달리 어리석음을 지적한 사람이 매장당한 일련의 상황이다. 그런데 승혜의 고백에서 자신은 재능이 없었음을 알았기에, 그녀가 이십 년 전 당시 윤경에게 지적한 것은 재능을 사용하지 않는 멍청한 행위에 대한 일종의 자극이었다. 어쨌든 이 사건을 정점으로 윤경은 자신의 작품을 쓰지 않고 타인의 스태프 역할만을 수행하며 살아간다. 어쩌면 “인생이 만들어 놓은 잔해에 치이면서” 상처들을 후줄근하게 뒤집어쓰고 살아가는 것이 불가피한 인생행로일 것이다. 승혜의 윤경을 향한 집요한 물음들과, 이제 와선 다 쓸데없는 일이라며 사람은 변하질 않는다고 말하는 윤경의 삶의 이해에 대한 판단은 독자의 몫일 것이다.

표제작인 「시그투나」는 스웨덴의 스톡홀름에 인접한 소도시 시그투나를 배경으로 한 전기(傳記)소설로 읽힌다. 특히 이 작품의 실존 인물인 최영숙의 일생에 대한 배경과 동기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에세이 「어느 계절에」 와 함께 읽으면, “배움을 원하는 젊은 여성을 조롱하는 사회분기가 만연했던” 시절, 더욱이 일제의 삼엄한 치하에서 스무살 남짓한 어린 여성이 자유로이 거닐었던 이억만 리 낯선 타지에 선 단단한 열정이 더욱 선명하게 와 닿음을 느낄 수 있다. 소설 속 하나의 액자처럼 그녀가 다니던 시그투나 인민학교 교장의 권유로 쓰게 되는 교지인 〈시그투나링엔〉의 기고문이 완성되어가는 문장과 함께, “저 멀리 잔잔한 푸른빛의, 눈부시게 빛나는 멜라렌 호수가 보이는 아침 창을 활짝 열어 둔”, 6월이 가까워진 어느 날의 풍경이나, 산책길에서 보게 되는 폐허로 방치된 성 올로프의 유적지, “파스텔 빛 노랗고 푸른 스웨덴식 목조 가옥들”과 같은 이국적 거리들의 서정적 풍경이 발하는 포근한 사랑의 시공간에 잠기게 된다.
무너진 벽과 기둥에 고스란히 남아있는 룬스톤, 즉 “사랑하는 이들을 잃은 사람들이 죽은 자를 기억하기 위해 새겨 넣은 일종의 기념비” 처럼, 온갖 악의적 소문들과 더럽게 회칠하여 역사에서 지워진 서양에서 대학수준의 공부(스톡홀름 사회정치정책연구소, 경제학사)를 마친 최초의 조선인 여성인 최영숙이라는 인물의 음성이 100년이 지난 지금 여기에 닿음을 느낄 수 있다. 사랑 없이는 쓰일 수 없는 글이라고 생각했다는 작가의 말처럼 이 작품은 사랑으로 가득한 시선이 행간에 흐르고 있음을 누구라도 감각할 수 있을 것 같다.
1930~60년대 혁명의 열기로 달아오르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혼란스런 배경 속에 엇갈리는 운명과 치정이 어우러진 1962년 개봉된 영화제목이기도 한 「인도차이나」는 화자인 작가 임수란이 여덟, 아홉 살 무렵 무신경한 어머니를 따라 경험한 최초의 시네마다. 나는 이 제목의 상징적 의미인 치정(癡情)의 서사를 따라가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젊은 시절 발표했던 작품이 영화화되면서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온 것처럼 책에 쓰인 시절도” 그녀에게 함께 돌아와, 이곳저곳의 초청으로 바쁜 일상, 청춘의 활기에 취한 듯 이어지는 나날의 기록으로 읽어야 하는지 어려움을 겪은 작품이다.
이야기는 “쇠락의 길을 걷다 다시 각광받기 시작한” 바닷가 지역 도시에 있는 서점의 북 토크 초청 길을 배우자가 있는 R을 설득해 동행하는 하루의 여정을 담고 있다. 죽은 사람이 다시 돌아온 것 같은 작가 자신의 책이나, 쇠락의 길에서 다시 각광받는 도시처럼, 옛 영화를 추레하게 되새기고, 젊음의 환영을 반추하며 그것의 단물을 빨아대는 사십대에 들어선 인물의 현실 타협의 모습은 우리네 형편과 그리 다르지 않아 보인다.
이야기 속에는 임수란의 부정한 애정관계에 대한 은연한 암시의 문장들이 불쑥불쑥 수면 위로 고개를 내미는데, 이것은 다시 읽히기 시작한 그녀의 소설로 인한 활력으로 의기양양해진 모습과 병행하며 교묘하게 그녀의 현재를 관류하는 변모된 현실을 관찰케 한다. 그것은 다시 연애하게 된 남자 사람 R에 대해 “원하는 걸 얻으려면 인생에는 전략이라는 게 필요하고 때로는 상대를 압박하는 기술도 쓸 줄 알아야 한다.”와 나란히, 오래된 젊은 시절의 소설, 풋풋하고 싱그러운 과거의 추억을 파먹으며, “마른걸레 쥐어짜듯 억지로”써내야 하는 변화된 창작 작업에 대한 현실적 자각과 교호하며 그 어떤 갈급한 삶의 면모를 풀어 놓는 듯하다.. 어쩌면 작가 임수란이 인식하는 지금이라는 시제의 그 모든 것은 “이 거리의 이 생생한 감각만큼은 나만의 것으로 남으리라는 것. 이 모든 순간이 내가 글을 쓰기 위해 살아내는 나를 위한 시간의 전조”라는 자신을 다독이는 음성일지도 모르겠다.
시시콜콜 되살아난 책이 발산하는 이미지와 이미 달라진 임수란이나, R과의 헤어짐을 준비 중이라고 생각하는 인물의 서사는 건너뛰고라도, 활짝 열린 세계의 의미로 가득해 보이는 청춘에게만 부여된 부재하는 무(無)를 쫓는 특권을 알아버린 나이든 인물의 영원한 침묵을 선고받은 존재로서 드러내는 절망의 표시같은 문장을 말하여야만 할 것 같다. 소설의 마지막에 이르러 약속된 북 토크 장소인 서점에 들어서게 되는 장면에서 들려오는 내면의 목소리다.
“예측도 대응도 준비하지 못한 목소리, 영원히 증발해버릴 나의 과거, 나의 노스탤지어”라는 것인데, 내겐 이 음성이 안타까울 만큼 붙잡으려하는 하나의 문학적 목소리처럼 여겨졌다. 어쩐지 소설을 읽고 나면 적당한 속물성과 타협하며 과거를 파먹는 추레함이 흠씬 두들겨 맞는 듯한 통증에 감염되는 듯한 우울함이 몰려온다. 글쓰기의 절단이 가져오는 작가 수란의 쥐어짜야 간신히 나오는 읽히지 않는, 혹은 반향없는 그 할 수 없음이나 하지 않으려는 부정의 욕망을 대차게 실해하려는 새로운 도주로의 발견을 위한 문학적 도피의 이야기처럼 읽히기도 한다. 또한 옛 것의 우연한 되살아남에 양양대는 누군가들에 대한 비난이거나 자기 성찰의 촉구인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