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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의식
  • 소설 보다 : 가을 2025
  • 서장원.이유리.정기현
  • 4,950원 (10%270)
  • 2025-09-11
  • : 32,360

가을에 이르기까지 지나치게 무거운 염오(厭惡)의 시간을 거쳐서인지 이렇게 찌뿌듯한 기운을 조금은 저 멀리 내던질 수 있었으면 하는 기분이었다. 통통 뛰는 발랄한 생기를 듬뿍 흡수하고 싶었다고 해야 할까? 그래서 가볍고 산뜻한 에너지로 충전하고픈 마음이었다. 『소설 보다, 가을 2025』에 ‘이 계절의 소설’로 선정된 세 작품의 구성은 마치 이러한 내 마음이 통했는지, 정말 가뿐한 마음이 깃드는 읽기가 되었다.

 

이러한 느낌을 갖게 된 직접적인 작품은 이유리 작가의 「두정 랜드」인데, 스스로 만들어낸 서울의 이미지에 씌워진 선망과, 두정 랜드로 불리는 촌스러움, 미래 없음, 안주의 이미지와 대비되어 미래를 허비하는 화자 ‘나’의 자기기만의 언어들이 숙성되지 않은 생생한 에너지를 품고 있었던 까닭이었을 것이다.

 

서장원 작가의 「히데오」는 이유리, 정기현 작가의 작품과 서사의 결이 조금은 다른데, 이렇게 자르듯 나누는 것이 부당하기는 하지만, 「두정 랜드」와 「공부를 하자 그리고 시험을 보자」는 주인공의 경험 변화에 따른 내적 양태의 변화를 따라가는 경과적 서사라면, 「히데오」는 주인공이 겪는 다면적이고 다층적인 타인에 대한, 다시 말해 사람과의 소통, 혹은 감정적 관계의 곤혹 또는 불가능의 서사처럼 읽혔다.

 


■ 「히데오」 -인간의 다면, 다층성 ; 관계와 소통의 불가능성

 

「히데오」는 교토 외곽 태생의 한일 혼혈인 남학생이 영화원에서 극작을 전공하는 수진에게 불리는 이름이다. 학보사 기자로서 신입생 인터뷰를 하던 수진은 “방청객처럼 동기들의 대화를 가만히 지켜보는” 히데오에 대해 “수줍음, 자기확신 X”라고 적어둔다. 수진에겐 히데오에 앞서 데이트를 했던 인물이 있는데, “스스로를 영화 학도라고 강조하여 붙여진 조롱조의 별명”인 수진 자신이 좋아하지도 않는 이 별명을 헤어진 뒤에도 그를 떠올리는 이름이 된다. “히데오의 진짜 이름이 히데오가 아닌 것처럼”이라 화자가 말하듯, 수진에게 이 이름들은 그들의 정체성에 대한 일종의 기호일 것이다.

 

이를테면 “그때 나는 이 상황을 지나치게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거나, “그때도 히데오가 나에게 마음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처럼 수진의 성찰적 기억들을 통해 드러난 이들의 모습은 ‘그때’ 마다의 부분들에 불과했음을 표현하는 듯하다. 그래서 히데오가 또 다른 히데오를 말하며, 그런 히데오는 히데오가 아닌 히데오로 불릴 수 있게 된다. 인간이 어디 단일 정체성을 지닌 존재이긴 하던가. 인간의 감정과 태도, 가치관은 상황과 상대에 따라 다양한 정체성의 형태로 나타난다. 수진은 어쩌면 이렇게 사람들을 배우면서 세상과의 관계를 터득해 나가리라.

 

소설의 주요 제재인 사적 ‘비밀’을 누군가에게 듣게 될 때, 우리는 대개 그 발설자에 친밀감을 느낀다. 그러나 그 비밀이란 것이 이미 주변의 모든 사람에게 알려진 비밀이라면, 발설자는 어쩌면 그 비밀에 따라붙는 타인에 대한 지배력을 알고 행사하는 교활함이거나, 실제로 당사자에겐 비밀의 내밀성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을 수도 있다. 이 지점에서 수진과 히데오의 관계를 바라보면 소설은 또 다른 차원의 연애소설로 읽을 수도 있을 것 같다.

 

■ 「두정 랜드」 -가짜 체험, 유예된 미래에 매몰된 청년의 미망

 

이유리 작가의 「두정 랜드」는 지금의 내 기분에 청량감을 준 맞춤의 작품이었는데, 갈망, 환상, 허영심, 발칙함 등 무한한 시공이 열려있는 젊음의 언어들이 만들어내는 생생한 에너지 때문이었을 것이다. 영원히 도달하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이상적 미래를 유보한 채 가짜 맛만 보는 인물에 들어찬 선망을 보는 내내 약간은 비겁하고도 악의적인 즐거움을 느꼈다. 화자인 ‘나’는 “나의 경우 서울은 곧 홍대였다.”라고 말하며, “연남, 서교, 합정, 망원 상수...의 넘치는 혼란스러운 젊음의 숨결”이 곧 서울이라며, 서울에서 네 시간 떨어진 지방도시 두정에서 알바를 하며, 홍대를 만끽하며, 서울내기로 자임한다.

 

소설을 시작하는 장면은 이러한 화자의 기만적 허영심이 유감없이 발휘되는 일종의 스냅컷인데, 어쩌면 이 첫 대사에 인물의 성격은 물론 소설이 관통하는 하나의 뚜렷한 주제까지 상상할 수 있게 된다. 알바를 위해서 온 놀이공원 두정 랜드의 화장실 에피소드다. 미화 아주머니의 말에 대답도 없이 무시하듯 획 나가버릴 때, 들려오는 “저, 저 서울 애 아니랄까봐 싸가지 없는 것 봐.”라는 소리에 미소 짓는 화자의 얼굴이다. 자신이 서울 애로 두정 사람에게 비친 것이 자랑스러워 짓는 웃음이다. 이 가짜 자아가 자신이라고 믿는 화자가 알바를 하는 장소가 놀이공원의 롤러코스터라는 것도 작가의 악마적(?) 의지가 느껴진다. 하~아, 어쩌면 내게 숨겨진 또 다른 자아의 취향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예고도 없이 수직 하강하는 ‘크리갈의 침공’이라 불리는 롤러코스터에서 일한다. 함께 일하는 연두라는 동료알바에게 자신은 한 눈에 서울 사람들을 구분할 수 있다며 내기를 하곤 매번 이겨 저녁을 얻어먹듯, ‘나’는 홍대로 대표되는 서울의 이미지를 소비하며, 그곳에 자신의 미래가 있다고 생각하는 인물이다. 그런데, 이 롤러코스터라는 상징적 축조물이 얄궂은 것이 ‘나’의 미래라 갈망하는 홍대인 서울을 체험하는 그녀의 생활과 닮아있다는 것이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수도 없이 롤러코스터를 타는 핑크퐁 할아버지로 불리는 남루한 차림의 사내가 ‘나’에게 건네는 말인데, “안 죽어. 안전 바가 있잖아. 안 죽을 거 알면 그냥 재밌는 거지, 몇 번이고 떨어져도 안 죽는다구.”처럼, 가짜 죽음을 거듭하며, 죽음을 유예하는, 아니 죽음을 가짜로 체험하는 것이 마치 ‘나’가 홍대의 거리를 거닐며 그곳의 사람이라고 여기며, 미래를 유예하는 그녀의 삶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는 것이다.

 

화자가 끔찍하게 생각하는 핑크퐁 할아버지로 표상되는 실패자의 모습과 ‘나’가 선망하면서 생성하는 스스로가 만들어낸 서울의 이미지를 소비하는 것, 즉 안전지대에 머물면서 가짜 위험만을 즐기는 행위는 하나도 다를 바 없다. 이러한 시선은 동료 알바 연두를 향한 멸시와 폄하하는 마음속에도 녹아있는데, 자신은 어디 사람 같냐는 연두의 질문에 대한 ‘나’의 속엣 말이다. “너무나도 두정이라고 생각했지만...넌 씨발 존나 서울”이라고 답변한다. 그리고는 씩 웃는 연두를 바라보며, “두정 같은 웃음이었다.”고, 멍청한 촌년이라고 내심의 쐐기를 박는 것이다. 이런 장면은 거듭되는데, 연두의 출신 고등학교를 묻자, “나? 나 두정여고”라는 답변에 역시 “그럴 줄 알았어...알 만한 일이었다.”고, 연두가 서울 사람이 결코 아님에 서울에 대한 자기 앎에 대한 믿음을 확신한다.

 

조금 건너뛰어 이야기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 가짜 위험만을 즐기며 유예된 미래의 안전지대에 머물 뿐, 그 어떤 도전이나 모험도 시도하지 않는 ‘나’의 삶과 겹쳐 진짜의 삶에 그녀의 눈이 과연 뜨일까라는 의문을 하던 끝에 다음과 같은 문장을 마주하게 된다.

 

“아가씨, 내가 점 봐줄까? 방금 갑자기 아가씨 미래가 보였거든. 나는 갑자기 의자에서 칼이라도 튀어나온 듯 크게 움찔했다. 정말로 듣고 싶지 않았다. ...지금 내게 필요한 건 그냥 일어나는 것, 그래서 이 미친 동네를 떠나버리는 것뿐이었다.....떠나서 다신 돌아오지 않는 거야.” - 90쪽

 

나는 이 문장을 읽으면서 어쩌면 화자 ‘나’는 영원히 그 환상에 남아있을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물론 현실이란 이러한 환상이 그대로 유지되도록 방관하지 않고 파괴할 테지만 말이다. 거짓 위험만을 즐기며, 미래를 허비하는 ‘나’의 모습은 안쓰럽다. ‘나’는 자신이 생각하는 서울에 대한 선망의 의지가 없는 연두를 그저 삶에 순응하는, 주어진 것에 안주하는 인물이라 멸시한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수동적인 안일함, 세계에 대한 무지라고만 말 할 수 있을까. 어쩌면 ‘나’보다 더욱 삶에 대한 태도와 가치, 세계에 씌워진 미망을 깨달은 자의 인식이지 않을까. 자신에 주어진 것에 열심인 사람, 가짜체험이 아닌 현실을 직면하는 자의 단단함 말이다. 이야기의 진행 리듬과 속도, 문체의 발랄함, 소재의 젊음과 악마적 취향이 어우러져 경쾌함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즐거운 놀이 속에서 발견되는 진실의 면모는 훨씬 직관적으로 다가온다.

 


■ 「공부를 하자 그리고 시험을 보자」 - 절단 난 상상력의 복원

 

정기현 작가의 이 소설은 제목에서 읽히듯 시험을 위한 공부, 상상과 다름과 다양함으로 이루어진 세계와 단절된 채 오직 숫자와 계획, 톱니가 서로 이를 맞추어 돌아가듯 어떤 빈틈, 여지, 비일상성(비규칙성)이 배제된 실용적 합리에 길들여진 인물에게 작은 균열들이 쌓여갈 때 만들어지는 변화에 대한 이야기로 읽힌다.


그래서 “여러 개의 수치를 어어 정교한 붓질을” 더하면 미소 짓는 입이 완성되는, 치밀한 시간 계획, 숫자와 관련이 없는 상상이란 머릿속에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독보적 전교 1등인 외고 입시를 앞둔 우등생 승주가 주인공이다. 사실 학교는 이 사회의 가치인식이 그대로 투영된 소집단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른다. 숫자의 권위에 복종하는, 그래서 성적은 하나의 권위 있는 자리로 인식되고, 이것은 보이지 않는 권력으로 인식된다. 승주는 이 권력을 이미 인지한 아이다. 그래서 그녀는 아이들과 주변 사람들을 자기 의지대로 조종할 수 있는 힘으로 이용할 줄 안다. 자기 계획이라는 하루의 루틴은 차질없이 수행 될 수 있는 것이라고 여긴다.

 

그러다 승주는 “생각지도 못했던 계기”로 다른 루틴을 획득하게 된다. 같은 반 회장인 장범규의 집에서 두 시간의 성애를 동반한 자유스러운 즐거움의 시간이 더해진다. 승주는 이 두 시간을 보충하기 위해 루틴의 별다른 훼손 없이 공부시간을 더 늘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는 어느 날부터 먹던 죽 “찌꺼기나 과일 씨앗 일체로 귀여운 비닐 폭탄을 제조”하여 장범규의 아파트 7층 아래로 보이는 인도를 오가는 행인들에 투하하며, “안정감과 후련함, 적당한 스릴까지 뒤섞인 완벽한 여가”를 즐긴다. 그러다 물리적 폭력을 일삼는 같은 학교 아이들의 무리를 발견하고 그들을 겨냥하여 비닐폭탄을 투하하게 되고, 그 무리에게 발각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 사건에 반응하는 피해무리들의 태도와 승주의 행태를 눈여겨보게 되었는데, 역시나 이 무리들은 투하장소가 장범규의 집이었기에 그를 가해자로 단정 짓는데, 사실 이것에는 이미 전교 1등생 승주가 지닌 숫자의 권력을 승인한 전제하에 내려진 단죄에 불과한 것이 드러난다. 승주는 장소가 장범규의 집이었으니 논란의 여지없는 귀결이었기에 자신이 그 무리의 적의의 시선에서 풀려난 것이라 여긴다는 것이다. 이제 승주에겐 또 다른 루틴이 더해진다. 폭력의 무리들과 어울리며 숫자로 이루어진 세계가 아닌 다른 일상의 사태들을 접하게 됨으로써 루틴의 아주 작은 균열이 더해진다. 그런데 아주 예외적 문장을 발견하게 되는데, 승주만은 예외라는 것이다.

 

“겪어왔던 바와는 영 딴판인 세계가 자신을 덮쳐 올 때, 또 다른 무기를 갖추지 못했거나 무기를 제때 뽑아 들지 못한 사람은 원래 머물던 세계의 기반마저 한 순간에 위태로워지기 마련이었지만 승주는 달랐다.” - 136쪽

 

과연 이러한 사태가 가능할까? 소설의 전환점이자 재미있는 장면으로 기억되는데, 외고 입시 당일, 시험을 치르는 동안 승주는 자신이 엄수할 루틴 중에 “멀리 아무도 없는 유원지를 거니는 상상으로 마음을 연못처럼 잔잔하게 만들기”가 있다. 4교시 시험을 마치고 드디어 ‘창의력 수학’시험 문제지를 받는다. “그림은 일 곱 개 지구로 나뉜 유원지의 조감도다, ....유원지에서는 서로 다른 나룻배 일곱 척이 있다, 각 구역에는....이동 시간의 총합이 최소가 되는 정확한 풀이와 함께 답하여라.”, 마침 문제지를 받기 전 쉬는 시간동안 머릿속으로 거닐었던 유원지를 버들치와 함께 걷던 상상 속으로 내쳐 걷고 만다. 나를 좋아한다고 노골적으로 표시한 버들치와 함께 하는 시간은 최소보다 최대가 좋은 것이 당연한 것이고, 승주는 최대의 시간을 풀이하고 완벽한 답을 도출해낸다.

 

이것이 성장하는 한 인간에게 실패이기만 한 걸까? 물론 치열한 경쟁의 논리가 지배하는 이 사회에서는 실패라고 부를 것이겠지만, 승주가 상상의 나래를 거닐 수 있게 되었다는 것, 세상은 단순한 숫자들의 연결만이 만들어낸 미소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 엄청나게 다양하게 생각하는 사람들과 그로인해 수많은 양태의 현상들이 존재하게 되고, 그들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한 번의 실수는 만회 할 수 있는 것이고, 승주가 틀린 문제처럼 최소시간만이 답이 아니라 최대시간이 훨씬 행복한 답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삶에는 무수히 가능한 답이 존재한다는 것을.

 

이 사회의 교육은 달달달 외워 기억 잘하는 훈련에 매몰되고, 숫자가 전부라고, 그리고 그 숫자로 이루어진 성적이 권력이라고 가르친다. 절단 난, 상상력 결여는 공감의 부재, 다양성 없는 획일성, 권력지향 인간들의 양성으로 이어지고, 그 결과 시험 잘 치는 괴물들이 날 뛰고 있지 않은가? 승주의 작은 루틴에 균열이 조금씩 쌓여갈 때, 내 악취미는 응원하는 열기로 들끓었다. 그래 이 세상은 엄청나게 풍요로운 생각들과 사람들로 끓어오르고 있다고 말이다. 정기현, 이유리 두 작가의 소설은 서사적 즐거움과 더불어 이 세계의 속살, 은폐된 진실을 깊게 들여다보게 해준다. 아무쪼록 젊은 문체의 발랄 경쾌함은 우울하게 침체된 시대의 시련을 조금은 잊게 해준 시간이었다. 거의 소진되어 말라비틀어질 즈음인 내게 신선하고 쾌활한 에너지가 충전된 느낌이다. 이 가을 생의 활력이 필요한 독자들은 세 편의 이 소설집을 놓치지 마시라고 충언 드리고 싶은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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