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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의식
  • 달리기 인류
  • 마이클 크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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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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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발 2,500미터를 낮은 지대라고 표현하는 것이 가능한 에티오피아 고산지대를 달리는 선수들과 함께 먹고 자고 달리며, 그네들이 삶의 희망을 건 훈련 속에서 관찰한 이야기다. 이것을 거창하게 민족지학(ethnograph)의 '참여 관찰(participant observation)'방법에 의존한 연구라고 일컫는데, 본질적으로 에티오피아 달리기 선수들과의 어울림을 통해 그들의 삶의 태도와 방식, 훈련하는 장소에 대한 장기적 헌신을 통해 체득한 이야기라는 말이다.

 

1년 6개월 동안 세계적 기록을 달성하는 달리기 선수들과 해발 3,500미터의 고산지대를 그들의 속도와 리듬에 맞춰 함께 달리며, 같은 것을 먹고 마시며, 하이에나를 경계하는 개들의 울부짖음이 밤새 지속되는 숙소의 콘크리트 바닥에서 잠자는 것은 사실 제아무리 필요한 연구라 하지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공식대회에서 2시간 20분의 마라톤 완주 기록을 가졌을 만큼 달리기를 좋아하는 인류학자이자 마라토너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한 과업이었을 것이다.

 

에티오피아와 달리기하면 1960년 로마 올림픽에서 맨발로 우승을 차지한 ‘아베베 비킬라’를 떠올리게 되고, 이것에 따라 연상되는, 시쳇말로 가난에도 불구하고 불굴의 투지로 성공을 일궈냈다는 헝그리 정신의 신화에 이르게 된다. 사실 완전히 왜곡된 서구적 시각에서 비롯된 터무니없는 논평이 사실을 일그러뜨린 것인데, 아베베의 성취는 국가의 강력한 지원 하에 스웨덴인 코치에 의한 강도 높은 훈련으로 일궈낸 결과였으며, 더구나 그가 맨발로 뛴 것은 신고 있던 러닝화를 벗고 뛰면 더 잘 뛸 것 같다는 하루 전 느낌에 따른 것이었다는 점이다. 세계는 곧잘 엉뚱한 신화를 조작하여 빈곤한 자신들의 상상력을 채우곤 한다.

 

【해발 3,500미터 에토토산을 오르는 에티오피아 선수들】


어쨌건 오늘의 에티오피아는 아베베가 우승하던 1960년보다 산업화와 도시화로 경제 성장이 이루어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치솟는 고물가 대비 상대적으로 극히 낮은 소득과, 생계를 위한 일자리의 빈곤, 하나의 직업만으로는 살기가 어려운 상황은 극복하지 못한 것 같다. 그렇다고 단지 가난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달리기에 삶의 미래를 건다는 것은 가능한 이야기가 아닌데, 에티오피아에서 달리기는 진입 장벽이 높은 스포츠인 까닭이다. 훈련과 휴식을 위한 시간, 충분한 양의 질 좋은 음식의 섭취, 러닝화와 러닝복 등 장비와 더불어 훈련장소로 이동할 교통비용 등 달리기 훈련에 좋은 환경에 접근할 수 있는 경제적 여력이 있어야 한다. 에티오피아를 비롯한 동아프리카 선수들에 대해 지나치게 낭만화된 상상의 표현들은 사실과 다르다.

 

이 참여관찰은 글로벌육상 선수 매니지먼트에이전시인 모요스포츠 클럽 소속 선수들을 중심으로 그네들의 훈련 장소와 방법, 선수들의 태도와 포부, 대회출전 중에 느낀 선수들의 생각들이 지면을 박차는 발걸음 소리와 숨소리와 함께 생생한 현장감을 지니고 전달된다. 그것은 에티오피아인 고유의 믿음들을 저변으로 한 독특한 사유들과 행위들이고, 환경과 주변 사람들과의 조화가 중시되는 삶의 태도들이다.

 

■ 에티오피아의 러너는 혼자 달리지 않는다.

 

오늘날 스포츠의 과학화와 상업화에 따른 각종 전문가집단의 믿음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그네들만의 훈련 방식에 스며있는 유전적 재능에 대한 불신과 내적 존재에 대한 믿음에 근거한 초월적 성취의 강한 신뢰는 과학적 스포츠 만능인 세계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에티오피아의 달리기 선수들이 이웃국가 케냐와 더불어 여전히 중장거리 달리기에서 세계 최고의 자리를 점하고 있다는 것은 이들의 환경 친화적 훈련 방식이나 ‘이딜’과 같은 내면의 초월적 성취에 대한 믿음 등 분명 과학이 알지 못하는 인간에 대한 다른 형태의 잠재성을 보여주는 것만 같다.

 

“힘의 흐름은 대지와 바람, 비, 햇빛과 같은 요소로부터 비롯된다. 궁극적으로 신으로부터 온다. 인간은 이 같은 힘의 근원을 창조하지도, 힘 자체를 창조하지도 않는다. 대신 인간은 그 힘을 손에 넣고, 변화시키며, 재구성한다. 인간은 힘의 창조자가 아니라 전달자 일 뿐이다.”

- 미국 인류학자 스티븐 굿맨(Stephen Gudeman), 본문 256쪽

 

에티오피아의 달리기 선수들은 결코 혼자서 달리기를 하지 않는다. 따라서 훈련은 개인적으로 진행되는 적자생존식 경쟁이 아니라 함께 노력하는 과정으로 인식된다. 혼자 뛰는 건 그저 건강을 위한 것이고, “달라지고 싶으면 다른 사람들과 함께 달려야 하는 것, 다른 사람의 속도에 맞추는 것”이라고 믿는다. 다른 선수의 발을 따라 달린다는 것은 그 사람의 리듬에 맞춰 뛰면서 그 사람의 에너지를 자신의 에너지로 활용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개인주의와 이기주의가 극성을 부리는 생존경쟁의 시대에 이러한 태도를 유지하며, 꾸준히 세계대회에서 성과를 내고 있다는 사실에서 그네들 전통적 사유의 자부심을 엿보게 된다.

 

이들의 훈련방식에는 여러 독특한 형태가 있는데, 고산지대의 나무들 사이를 이리저리 가로지르며 경사면을 오르내리거나, 지그재그로 달리기도 하고, 달리기의 환경을 숲과 산지와 평야, 도로 등 훈련의 성격에 따라 이동하며 바꾸는 등 현대의 과학화된 스포츠 훈련 방식과는 많은 면에서 다르다. 인류학자 팀 잉골드는 이러한 움직임을 ‘행로(wayfaring)’라 부르며, 두 지점을 최단거리로 연결하는 운송(transfport)과 구별하며, “행로는 움직임 자체를 중시하는 행위 속에서의 깨닫는 앎의 형성 과정”이라 말하고 있듯, 에티오피아 선수들의 이러한 유별난 훈련방식은 의식적으로 자신들의 몸에 대한 지식과 숲에 대한 지식을 쌓아가고 있다는 분명한 인식이 있음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더 높은 산지 숲 속을 달릴수록 그곳 나무들에게서 더 많은 에너지를 끌어올 수 있다는 믿음에 기초해, 자연의 에너지가 자신들에게 전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이다. 더구나 그들은 훈련이 반드시 어떻게 진행되어야 한다는 고정 관념 없이 달리고, 바로 이러한 불확정적 자의적 경로를 달리는 훈련이 환경에 따라 유연하고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는 것은 전문성이라는 이름하에 행해지는 오늘의 스포츠 과학에 대한 맹종에 대해 관점의 전환을 고려케 한다.

 

어쩌면 스포츠 철학자 버나드 슈츠의 “스포츠는 불필요한 장애물을 자발적으로 받아들이는 행위다.”라는 말처럼, 자연적 난관을 극복할 수 있는 역량을 체화시킴으로써 자신들의 성장을 가져온다는 것을 그들은 직관적으로 알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저자 마이클의 “내 이해 너머의 어떤 힘이 작용한다는 사실이 점점 더 분명해졌다.”라는 고백과 같이 과학적으로 정의되지 않는 무엇, 인간에게 영향을 미치는 에너지들에 대한 에티오피아인들의 생각은 결코 신비적 미신이라 외면만 할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 승자독식과 적자생존 너머, 협력과 헌신으로서의 달리기

 

에티오피아라고 해서 신자유주의 물결이 거세게 몰아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더구나 달리기 대회에서 승자가 되었을 경우 그 두 시간 남짓이 선수 삶의 미래를 결정적으로 바꾸는 기회인 세계에서 선수들은 극심한 경쟁과 개인적 욕심에 휘말리지 않을 수 없다. 때문에 이들에게는 앞선 언급과 같이 팀워크가 우선시 되는 통제된 방식으로 달린다. 선수들은 함께 달리며 서로 협력하고 각자 맡은 바 책임을 다하며 훈련그룹에 대한 헌신과 서로를 돕겠다는 의지를 중시한다. 훈련에는 반드시 페이스메이커가 있다. 훈련의 선두에서 달리는 사람은 자신의 에너지를 다른 선수들에게 기꺼이 제공하는 것이고, 따라서 이러한 달리기 훈련의 선두주자는 필히 책임을 나눠가지며 공평하게 돌아가며 수행되도록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모호한 성격이 숨어있다. 선두에 서지 못하면 절대 승자가 될 수 없지만 남을 따라가는 법을 따라도 승자가 될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선두와 따라가는 것 사이의 균형을 찾는 것, 선수들은 이 균형의 감각을 자신의 몸과 마음에 새기는 것이 곧 훈련을 임하는 태도라는 것일 게다. 에티오피아 사람들 모두의 신앙인 암하라 정교회는 인간 본성의 개인주의적 욕구와 이기주의라는 전제 하에 그들만의 사회적 도덕적 규범을 문화 속에 뿌리내리게 한 모양인데, 이를 조율하는 방안으로 함께 식사하고, 음료를 나눠 마시는 행위로 개개인의 목표로 흩어지려하는 원시적 움직임을 상쇄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사실 이 단순하고 진부해 보이는 발상의 효과는 자못 큰 것으로 드러나곤 한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무언가를 함께 나눠 먹고 마시는 행위는 분명 결속과 동질감을 회복시켜 불화와 갈등을 봉합하는 힘을 발휘한다. 거액의 상금과 불균등한 분배구조가 휩쓰는 승자독식, 적자생존이라는 육상대회의 환경 속에서 동료에 대한 헌신과 협력, 그리고 하찮아 소홀하기 십상인 함께 나눠 먹고 마시는 행위는 오늘 우리들이 잃어버린 타자와의 관계성을 돌아보게 한다.

 

저자가 묘사한 함께 1년 6개월에 걸쳐 훈련하던 선수들과의 소박한 대화를 통해 순박한 정신 속에 깃든 강인함을 발견하게 하는데, ‘이딜’의 정신이야말로 이들의 신념의 바탕인 것만 같이 여겨진다. 자갈과 진흙으로 이루어진 거친 길이라는 뜻의 코로콘치를 달릴 때, 앞서가던 선수는 저자에게 말한다. “잘 보면 우리가 아주 조심스럽게 달리고 있어요. 꿈꾸는 곳으로 가려면 신중해야 하니까요.”, 이 말에는 같이 달리는 동료에 대한 배려와 헌신이 깃들어 있으며, 동시에 세계대회에 출전하여 우승하려는 사람의 신중한 야망이 담겨있다. 이것이 바로 에티오피아 선수들의 체득된 균형일 것이다. 그들은 알고 있는 듯하다. 소설가 리처드 파워스가 《오버스토리 The Overstory》에서 생명의 비밀을 “식물이 빛과 공기, 물을 섭취하고, 그렇게 저장된 에너지가 모든 것을 만들어내며,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다.”라고 썼듯, 에티오피아 달리기 선수들을 달리게 하는 에너지란 그들을 에워싼 산과 숲과 자갈길과 함께 뛰는 동료 선수들임을.

 

■ 숨결의 통로, 희망과 포부의 달리기

 

선수들이 뛰는 유칼립투스 나무 숲 사이 길을 ‘숨결의 통로(corridors of breath) “라고 부르는 것, 아마 이 하나의 구절만으로도 이 책의 모든 분위기를 전할 수 있을 것 같다. 선수들이 남긴 발걸음이 땅 위에 남긴 흔적들, 그들의 호흡이 공기 중에 남긴 흔적인 무언가 이루고자 하는 희망과 포부를 들이마시는 시간이 되어준다. 마라톤 경주에 참가한 선수는 누구든 한 번은 길을 잃게 된다고 한다. 어느 순간 자신이 곤경에 처해있음을, 심박수가 급격히 올라가고 자신감이 무너져 내리며, 불현 듯 내면의 기준점을 상실하고 허둥대는 순간을. 선수들은 이런 고비를 이겨내는 과정을 터득해나간다. 그 경험이 보람찬 것임을, 낙심하는 순간 가장 생명력이 생생이 살아남을 안다. 승자보다 패자가 훨씬 많음으로 알지만, 실망의 반대편에 희망이 있고, 늘 더 나은 자신을 상상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우리 인간임을,

 

그래서 그들은 다시 도전한다. “스포츠 성공의 열쇠가 과학적인 생리적 특성 측정과 모든 불확실성 변수를 제거하는 것”이라는 오늘의 스포츠 전문가와 지도자들의 생각이란 많은 빈틈이 있음을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불확실성과 위험은 에티오피아 선수들에게 훈련의 필수 요소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그들이 꿈꾸는 희망의 성취에 다가가는 길에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난관이며, 적극적으로 헤쳐 나가야 하는 난관이다. 그것이 에티오피아 선수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크고 작은 세계 대회에서 선두의 지위를 점하고 있는 까닭이기도 할 것이다. 선수들의 노력을 희석하는 방식으로 전문성이 해석되는 양태는 지양되어야 할 것만 같다. “마음과 다리가 하나가 되지 않으면 달리기란 불가능해요.”라는 한 선수의 말 속에 많은 울림이 있다.

 

세계최고의 중장거리 달리기 선수를 배출해온, 또한 배출하고 있는 에티오피아 달리기 선수들의 고유한 문화를 다층적이고 심도 있게, 그러하면서 따뜻한 인간적 정감이 흐르는 기분 좋은 감동이 있는 저술이다. 책 속의 에티오피아 달리기 선수들은 인생을 바꿀 대회상금을 위해서, 그러나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건강을 지킬 수 있고, 목표를 가질 수 있기에 뛴다. 그리고 내일 또 다른 무언가를 얻을 수 있다는 희망을 위해 달린다. 그렇다면 인류는 왜 달릴까? 저자는 “편안함에 대한 저항, 오래된 야성적 감각을 되찾고, 익숙한 길을 벗어나 삶의 정형화된 틀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한” 반항이라고 말한다. 하루키가 썼듯 사랑처럼 달리기에는 완벽히 포착할 수 없는 어떤 매혹이 있다. 이제 책을 덮고 동네 가까운 산책길을 달려보아야 할 듯하다.

 

“달리기에는 바라볼 대상이 없어요. 오로지 자기 내면에 비전이 있어야만 달릴 수 있다고요.”

-본문 16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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