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에 그렇게 쓰여 있다니까. 책에 있는 대로 안 하고 모든 걸 엉망으로
만들려는 거야? 책에서 봤어. 그러니까 우리는 그렇게 해야 해.“ - 톰 소여
마크 트웨인의 전설적인 이 소설이 그 알려진 명성만큼이나 읽혔을까? 『톰 소여의 모험』이 출간되고 8년 후인 1884년 영국과 캐나다에서 출간되었으니, 140년이란 시간을 지나온 작품이다. 몇몇 평자들은 ‘톰 소여(Tom Sawyer)’란 인물을 ‘자유와 절제를 잇는 중간자’로서의 역할이라 말하고 있지만, 나는 '허클베리 핀(Huckleberry Finn)'의 반대쪽에 선 기성의 권위와 질서를 옹호하는 순응주의자로 이해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나의 판단은 수정된다. 이 소설은 『톰 소여의 모험』, 『미시시피 강의 생활』 과 함께 ‘미시시피 3부작’을 완결하는 작품으로, 자유와 해방의 목소리인 ‘허클베리 핀(이하 ’허크‘로 표기함)’의 문명에 떼 묻지 않은 자기고유의 화법과 지배질서에 호응하지 않고 자유로운 사유, 즉 새로운 언어의 세계를 통해 변화된 세계를 상상케 하는 세 작품 중 단연 으뜸이라 생각한다.
소설의 제목처럼 ‘모험(adventure)'은 물리적 여정이기도 하지만, 소년 허크가 기성사회의 인식들을 돌파하며 사유의 성장에 이르는 여정으로써의 의미로 해독해도 될 것이다. 술주정뱅이며 난폭한 아버지로부터 방치된 허크는 왓슨 아줌마와 더글러스 과부댁, 두 여인에 의해 양육된다. 철저한 교조적 신앙인인 개신교 신자 왓슨 아줌마나 일상의 행위와 언어예절을 주입하는 더글러스 과부댁의 엄격한 훈육은 기성질서에 대한 복종을 요구한다. 허크는 그녀들의 말과 행동이 현실에서 수시로 모순으로 충돌하며, 때론 거짓이자 위선임을 느낀다. 그렇다고 막무가내 식 반항으로 상대의 마음을 고의로 해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자유에 대한 갈망이 그네들에게 상처나 손실이 되지 않을까 조심스러워 하는 인물이다.
허크에게는 6,000불이라는 큰 금액의 재산(富者로 불릴 만큼)이 있다. 새처 판사가 이를 맡아 막대한 이자놀이를 하고 있으나, 허크는 이 재화에 관심이 없다. 방탕하고 불성실하게 살아가던, 행방을 알 수 없던 아버지가 허크의 재산에 관한 소문을 알게 되자 돌연 나타나 아이를 위협하고는 마을 외곽 숲속 오두막에 납치하여 가둬두고 돈의 갈취를 위해 이용한다. 이제 그야말로 모험, 즉 위기와 온갖 장애를 뚫고 어떤 과업을 성취하는 활동이 시작된다. 불량한 폭력으로 아이를 구속하고 억압하지만 허크 본인은 이렇게 말한다. “대체로 숲속 생활은 퍽 즐거운 편”이었다고. “과부댁한테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고, 그 알량한 문명에 길들여지길 원치 않았으니까.”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되고, 두 부인의 문명의 예절이라는 이름으로 가해지는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었기에.
그러나 오두막에 감금된 채 폭력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생활을 계속 버텨낼 수는 없다. 소년은 탈출을 위해 감쪽같은 방안을 구상하고 실천에 옮긴다. 누군가에 의해 살해된 듯한 죽음의 흔적들로 위장하고는 뗏목을 이용해 탈출한다. 그리고는 그의 시체를 찾기 위해 숲과 강을 수색하는 마을 사람들을 숨어 관망하며 어른들의 무력한 행위에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그렇게 숨어 지내는 작은 잭슨 섬에서 왓슨 아줌마의 노예 검둥이 짐을 발견한다. 짐은 허크에게 자신이 이곳에 있게 된 사연을 말한다. 자신을 뉴올리언스에 800불을 받고 왓슨 아주머니가 노예 장사꾼에게 팔아버리기로 한 것을 듣고는 불가피하게 탈출했음을. 허크와 짐은 이곳을 벗어나야만 하는 각기 다른 동기에 의해 의기투합한다. 노예제도를 폐지한 마을을 향한 미시피강을 따라 흐르는 탈주의 여정, 모험은 이렇게 항해의 닻을 올린다.

이 모험의 여정에서 강과 마을과 숲속에서 마주하게 되는 군상들, 그리고 무엇보다 백인 소년과 검둥이 노예라는 신분의 엄격한 구분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향한 배려와 신뢰, 검둥이에 낙인찍혀있는 온갖 부정과 편견의 언어들과는 다른 동일한 인간임을, 그리고 그들의 믿음이라는 또 다른 사유의 언어를 배운다. 두 사람의 흥미로운 대화가 있다. 슬쩍 빌려오는 것과 훔치는 것의 차이에 관한 짐의 최종결론에 허크의 공감으로 마무리되는 장면이다. 훗날 갚겠다는 생각만 갖고 있으면 슬쩍 빌려와도 괜찮다는 허크 아버지의 말과, 그건 훔치는 짓을 좋게 표현 것에 불과하다는 과부댁의 말에 대해, 두 말 모두 맞는 구석이 있지만 제일 좋은 방법은 다시는 빌리지 않는 것이라며, 그 둘은 오히려 자신들이 지닌 것에서 무엇을 뺄 건지, 포기할 것인지를 밤새워 얘기한다. 새로운 윤리의 감각을 몸으로 체득하는 것이다.
이들의 대화는 톰 소여의 교과서적 언어와 행위가 들어설 자리가 없다. 성서 속 솔로몬의 한 아이를 두고 다투는 판결의 이야기로 이어지기도 하는데, 짐은 대뜸 솔로몬의 행동은 분별있는 사람이 할 짓이 아니라며, 그 말싸움은 애초에 반쪽짜리 어린애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체가 그릇된 것이라 주장한다. 이런 생각은 솔로몬이 자란 배경과 관련된 것으로, 새끼가 한 500명쯤 되는 솔로몬에게 애새끼 하나쯤은 더 있거나 없거나 대수롭지 않았기에 할 수 있었던 무감각의 결정이었다는 것이다. 허크는 속으로 말한다. 이런 검둥이를 본 적이 없었다고. 허크가 이 일화를 쓰고 있다는 자체가 그에게 이 이야기가 또 다른 하나의 윤리적 감각이 되었음을 말하는 것일 게다.
이러한 긍정적 상호교감으로부터의 배움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양심의 소리, 내면의 응시를 통한 사유의 성장도 발견할 수 있다. 노예제가 폐지된 마을이라 알려진 장소에 가까이 이르자 불현 듯 허크의 내면에 상반되는 양심의 소리가 들려온다. 왓슨 아줌마의 노예인 짐의 탈주를 돕는 것은 은혜를 배신하는 행위이기에 짐의 도망을 밀고해서 아줌마에게 그를 돌려주어야 한다는 목소리와, 도련님이 없다면 전 자유의 몸이 될 리가 없었을 거라며 늙은 짐한테 하나밖에 없는 백인 신사이자 친구라는 의리의 목소리다. 결국 허크의 목소리에는 이런 물음이 남겨진다. “짐을 남의 손에 넘겨준다면 지금보다 내 마음이 더 편할까?” 결코 편한 마음을 가질 수 없었을 것을 허크는 알았다.
두 사람은 도주의 여정에서 두 불한당을 만나게 되는데 자칭 공작과 프랑스 왕이라고 주장하는 사기꾼들이다. 이들의 비위를 맞출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한 채 뗏목에 동행하게 되는데, 우연히 한 작은 마을의 모두에게 존경받는 피터 윌크스란 인물이 막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게 된다. 이때 두 사기꾼은 망자의 형제로 위장하여 고인의 재산을 빼돌리기 위한 작업에 착수한다. 너무도 그럴듯한 언변과 연민과 배려로 가장한 행위들에 마을 사람들은 속아 넘어가지만, 마을의 의사는 이 둘이 고인의 형제가 아니라고 의심한다.
이때 사기꾼들이 하는 말은 군중의 어리석음에 대한 정치적 일갈로 들린다. “그 망할 의사 놈! 그까짓 놈 신경 쓸 거 없어. 이 마을 바보 놈들이 전부 우리 편을 들어주잖아? 게다가 어떤 마을이든 잘 난 놈들보다 바보 놈들이 절대적으로 많거든.”, 사실의 진위에 대한 숙고 없이 그저 자신들이 믿고 싶은 것을 맹목적으로 확신하는 우중의 경향에 대한 통찰일 것이다. 허크는 이 악당들의 군중에 대한 이해로부터 세태의 지성과 윤리의 몽매성을 체득했을 것이다.
이렇게 강물을 따라 흘러가듯 유유한 자연과 자유로운 흐름 속에서 허크는 그만의 세상에 대한 통찰과 윤리의식, 사유의 방법을 체화시켜나간다. 비교적 어떤 에피소드보다 긴 묘사를 담고 있는, 몇 푼의 돈을 위한 악당들의 밀고로 짐이 한 마을 사람에게 붙잡혀 감금되자 짐을 탈출시켜 자유를 주기위한 마지막 모험에 해당하는 이야기다. 허크는 그곳이 펠프스 농장임을 알아내고, 과감하게 찾아간다. 그런데 이런 우연이 있을까. 허크가 마주하게 된 사람들은 톰 소여의 이모 집이다. 마침 톰 소여가 오기로 되어있던 차에 허크가 도착한 것인데, 샐리 이모는 허크를 톰으로 알고 기쁨으로 맞이한다. 난처해진 허크는 톰 역할을 함으로써 위기에서 빠져나오지만, 톰은 어쨌든 조만간 도착하게 되었음을 알게 된다.
허크는 도래할 상황의 위기를 차단하기 위해 톰을 마중 나가 사연을 전해주고 진짜 톰을 톰의 동생 시드로 하기로 말을 맞춘다. 그리고는 짐이 갇혀있는 움막을 알아내고는 그를 구출하기 위한 작업에 돌입한다. 이 작업은 그야말로 지배질서인 권위와 실체적 실용의 언어와의 대결이라 할 수 있는데, 하나의 장면을 보면 이렇다. 열쇠로 굳게 잠긴 움막으로부터 짐을 빼내기 위해 밖에서 구덩이를 파내 움막으로 이어지게 하자는 것인데, 이때 허크는 곡괭이와 삽을 가지고 파내자고 한다. 이에 톰이 하는 말은 걸작이다. “죄수가 땅을 파기위해 곡괭이니 삽이니 하는 최신식 장비를 옷장 속에 둔다는 얘길 들은 적이 있니?”
소설 등 책에 쓰여진 것만이 권위를 지닌다는 믿음에서 비롯되는 톰의 말은 어처구니없는 궤변이다. 이 멍청한 소리에 허크가 항변하지만, “아무리 멍청하다고 해도 상관없어. 그게 올바른 방법이니까. 그리고 그게 정석이야.”로 돌아온다. 결국 둘은 합의하여 작은 손칼로 파기 시작하는 데 그것이 하세월(何歲月)이다. 책 속의 지식만이 ‘정석’이라는 말. 그 텍스트를 그대로 수행하는 것만이 올바르다는 생각, 이것은 권위에 대한 맹종의 표현일 것이다. 허크의 생각은 이렇다. “권위자들이 그걸 뭐라고 생각하든, 난 쥐똥만큼도 상관 안 해.”, 그러면서 톰은 언제나 ‘원리원칙’을 굉장히 중요시한다고 불만을 표시한다.
그런데 이 교조적이고 권위에 순응하는 태도와 그것을 그대로 실천하는 행위는 그 결과에서 조금 다른 상황을 만들어낸다. 잘난 체 하는 지식인 양 구는 사람들이 정작 자신이 쓴 도덕적이고 교화적인 글과는 상반된 비도덕적 행위를 얼마나 수없이 저지르는가는 구태여 예시할 필요도 없이 흔하디흔하다. 그(톰)가 읽은 소설 속 죄수의 탈출 야야기 속의 세세한 묘사들을 그 맥락과 어떠한 관련도 없이 그대로 현실에 답습했을 경우 이를 발견한 사람들은 현실과 괴리된 자취들, 그들이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흔적에 당황하게 되고 혼란에 빠지게 된다. 이렇게 보면 톰 소여를 온전히 권위 순응적 인간으로 이해한 내 인식을 수정할 필요를 느끼게 된다.
그는 텍스트, 즉 교양이라는 덕목을 거의 완전하게 실천함으로써 그것들의 진실을 신뢰하는 인물이다. 그런데 ‘거의’라는 말은 허크의 실용적, 체험적 수정에 의해 핵심 구조를 잃지 않으면서 도구적 수정을 가한다는 의미에서이다. 어쩌면 참된 지식이란, 하나의 양식이라는 축을 중심으로 현실의 양식에 의해 가변을 허용하는 것이라는 생각일 것이다. 결국 이 책은 당대 현실에 대한 비판적 시선을 담고 있지만 지배질서에 대한 격변 또는 혁명을 얘기하는 것에 이른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즉 불의와 모순들에 대한 시정, 피부색을 뛰어 넘는 인간 동류에 대한 연민과 양심과 윤리의 목소리에 대해 새로운 언어, 새로운 화법을 제시하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지평의 확장을 제시한 작품이라 할 것이다.
어느 사이엔가 우리들의 세계는 온통 동일성의 기획에 매몰되어 있다. 온갖 좋아요가 난무하고, 매끈한 세계만이 흐른다. 소통 망에서는 이질적이고, 낯선 언술은 거부, 회피, 외면되고, 동일한 긍정의 목소리만 메아리친다. 오늘의 사회에서 새로운 언어, 새로운 화법은 배제되고 있는 것이다. 다름의 목소리가 제거된 곳에 전체주의 목소리만 맴돌고, 어느덧 지배적 권위에 복속된 동일자들의 지옥에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야생의 소년, 자유를 항해하는 소년 허클베리 핀의 모험은 바로 이러한 동일자의 지옥으로부터 탈출의 이야기다. 마크 트웨인의 이 소설이 고전적 지위를 지닌 것은 인간과 인간사회를 끊임없이 자극할 새로움의 변주를 말하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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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감상 글은 절판된 펭귄글래식 세계문학 판본, 그리고 민음 세계문학 및 문예출판 세계문학 판본을 저본으로 하였습니다. 따라서 인용 문장은 세 권 모두에서 임의로 발췌하였음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