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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의식
  •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
  • 에르네스토 라클라우 & 샹탈 무페
  • 16,200원 (10%900)
  • 2012-05-07
  • : 1,349

이 책은 “권력관계의 본성과 정치 동역학에 관한 적합한 인식”의 구축을 위한 저술로써, 이 사회의 정치경제적 현상을 조금은 더 밀도있게, 또한 여러 범주의 국지적 사회현상들로까지 생각을 넓혀나갈 수 있도록 그 지평을 열어준다. 그러나 이하의 글은 책의 리뷰가 아니다. 다만 ‘헤게모니 관계’라는 언어의 정의에 멈춰 서서, 순간 내게 스친 느낌을 기억의 방편으로 기록해두고자 함이다.

 

“헤게모니는 결정 불가능한 지형에서 이루어진 결정에 관한 이론이다.”

 

헤게모니 관계란 여러 실체적 세력 사이의 관계, 근본적으로는 저마다의 특수한 담론을 지닌 세력들이 집합을 이룰 때, 그 ‘공동체 총체성의 대표를 자임하는 어떤 헤게모니적 보편성과의 접합적 관계’이다. 이를테면 이익과 추구하는 목표 또는 목적이 다른 여러 집단이 존재하지만, 이들이 어떤 뚜렷한 하나의 적대, 즉 그들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적대화 할 이유가 있는 세력에 대항하여 뭉치기로 했다고 하자. 그것 - 그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내건 집단내(內) 보편성을 획득한 담론 - 이 천박하건, 저열하건, 매국적이건 비민주적이건 반(反)법치주의건 아무튼 그 옳고 그름은 차치하고 ‘내란 옹호’라고 하자. 이것을 이들 공동체가 하나의 보편적인 대표 담론이라고 설정하기로 했다. 그런데, 이 공동체를 구성하는 세력들 간에는 자신들 고유의 특수성이 있다.

 

극우의 헤게모니 관계, 그 한계

 

사대주의적 역사관에 기초한 종일(從日)세력, 신자유주의를 적극적으로 심화시키고자 하는 기업과 자본 등 경제세력, 중국,북한 등을 적대화 함으로써 안보를 인질로 하여 정치적 이익을 취하는 세력, 기득권을 영구화하려는 일군의 엘리트 집단화한 사법, 검찰 등 법⦁검 카르텔, 종교를 표면에 걸고 사적 이익에 골몰하는 사이비종교 세력들은 고유의 특수성을 가지고 있다. 이들이 대표 담론화한 헤게모니 중심으로 모인 것이다. 그러나 이때 이 헤게모니는 사실 매우 불안정한 것이고, 각 세력의 특수성에 비해 비항구적이며 비 결정적이다. 이질적 군집이 보편적이라고 내건 내란 옹호의 기치는 언제든 폐기 될 수 있으며, 붕괴될 수 있는 것이다. 헤게모니가 결정 불가능한 지형에서 이루어진 결정이라는 말은 바로 이런 의미이다.

 

이왕 예를 들었으니 이 예를 사용해 이어가보기로 하자. 이 기이한 공동체를, 이 사회는 ‘극우’라고 부르지만, 사실 극우의 통상 개념과는 전혀 다른 행위를 하고 있다. 바로 극우로 퉁 친 이 집단이 오합지졸의 잡동사니가 모인 것이기에, 그것들의 특수성이 모두 다르고, 그 다름에서 터무니없는, 즉 극우가 하는 행위와는 동떨어진 행위가 노출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말을 조금 고상하게 정리하면 “결절점(주인 기표)은 일정한 담론 영역 내에서 보편적 구조화 기능을 떠맡는 특수한 요소에 대한 통념을, 그와 같은 기능을 사전에 결정하는 요소 그 자체의 특수성 없이 수반한다.”라고 표현 할 수 있다.

 

사실 지금 극우로 불리는 이합집산은 애초에 ‘내란 옹호’라는 주인 기표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것에는 각 잡다한 세력들의 특수이익을 전제한 것이 아니었지만, 그것들의 공동체를 대표하는 담론으로 헤게모니를 취득한 것이다. 모든 세력들은 이 헤게모니와 접점을 이루며 어느 순간만큼 행동한다. 즉 내란 옹호에 자신들을 동일시하여 그 범주의 중심성을 확립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들의 특수성은 결코 사라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것들이 내뱉는 언어의 중심성 없는 기괴한 담론들 자체가 스스로 입증한다.

 

영토주권을 부정하는가 하면, 헌법전문의 정신과 기본권 조항조차도 부인하고, 국민주권마저도 부정한다. 특권과 권위의식을 내세우고. 기득권의 공고화와 사적 이익의 극대화 및 영속화를 위해서는 국가를 팔아먹고, 국민을 노예화하는 행위도 서슴지 않는다. 자기 집단외(外) 국민 성원 일반을 적대화하고 협박과 폭력도 당연시 한다. 그런데 이러한 행위들은 그것들이 주장하는 우파 또는 보수적 가치와는 단 하나도 일치하는 것이 없다. 그러니 극우나 극보수라는 표현은 결코 타당한 명칭이 아니다. 그저 ‘내란 획책 세력’일 뿐이다. 상업언론, 일컬어 종편(채널A, TV조선, YTN, 매경TV 등)채널로 불리는 미디어들과 조중동을 비롯 종교를 배후로 한 언론(국민일보, 세계일보, CBS 등), 대기업자본가를 배후로 한 언론(한국경제 etc.)등 현재의 한국 언론세력은 그것들의 성분이 애초에 권위주의와 신자유주의의 산물이기에 사적 이익추구가 우선인 일종의 마케팅 또는 광고 선전 도구일 뿐이기에 내란 옹호세력이란 딱지를 붙이기보다는 우호적, 중립적인 ‘극우’를 자신들의 언어로 대표한 것일 뿐이다.

 

여기서 발견되는 것이 있다. 내란 옹호가 헤게모니 중심이 된 것은 바로 헤게모니의 조건인 구조적 결정 불가능성에 의존하기 때문인 것을. 그런데 이를 상세히 들여다 볼 이유가 있다. ‘내란 옹호’라는 헤게모니는 갑자기 등장한 것이 아니다. 각각의 특수성, 영구집권 획책이라는 특수성, 경제적 이익추구라는 특수성, 종교의 영역확장을 통한 정치권력의 장악처럼 이 특수성들은 서로 충돌하거나 보충적이다. 어제까지 사회적 적대자로써 저마다의 내적 경계를 예리하게 하던 것들이 공동의 적에 대항하기 위해 서로 등가관계를 수립하는데 내란 옹호에 헤게모니를 잠정적으로 내어 준 것이다. 이익이 합치된 것이다.

 


하지만 이 등가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듯한 관계 속에도 전선(적대의 경계)은 잠복하고 있기에, 헤게모니를 장악한 세력은 이것을 결코 놓을 수 없다. 수구를 표방하던 정당이 극단적 우경화로 선회하여 내란 옹호를 외치는 것은 이러한 권력의 이해관계에 얽혀 있기 때문이다. 이 목소리를 줄이거나 철회할 경우 헤게모니를 잃을 뿐 아니라, 오합지졸 군집의 분열과 해체가 너무도 분명히 보이는 까닭이다. 하나의 집단으로 연결되기 위해서 서로의 변절주의적 특수성을 넘어 사슬(chain)의 총체성을 대표할 하나의 무엇인 주인기표를 ‘내란옹호, 계엄옹호, 대북, 대중 적대화 선전’으로 삼은 것이다.

 

따라서 이 기호로 인해 자신들 본체의 특수성을 변형시킨 세력들도 있을 것이다. 내란 옹호의 기치아래 결집한 이 세력들의 특수성은 서로 이질적이며, 아주 다르다. 상호 통약 불가능한 보편성에도 불구하고 뭉쳐있다. 이것이 헤게모니-관계의 투명한 본질적 모습이다. 그래서 이러한 것들이 내세운 보편성을 ‘오염된 보편성’이라고 부른다. 보편성이 애초에 오염된 것이니 관계들 간에는 해소할 수 없는 긴장이 존속한다. 다시 말해 헤게모니 관계의 기능은 항시 불안정하고, 저마다의 원상태로 돌아가려는 성질을 가졌다는 것이다. 즉 가역적이다.

 

여기서 그것들의 필연적 분리와 해체는 오염된 보편성의 내용을 처단하는 것임이 자명하게 드러난다. 내란 획책의 법 절차적 처벌선언, 외란 즉 대북자극을 통한 전쟁 획책 규명, 그리고 무엇보다 이것들의 사슬을 잘라내는 것이다. 그것들이 자신들의 특수성을 후퇴하면서까지 연결하게 자극된 요소, 즉 사적 재화, 권력의 자리, 국부(國富,정책의 자의적 변경을 통한)의 접근이 주요한 헤게모니 접점일 것이다. 이것의 신속한 처리의 책임이 바로 특검이다. 만일 이조차 오염되어있다면, 극우는 당분간 더욱 극성을 떨어댈 것이다. 그러나 헤게모니 관계의 본질상 취약하고, 붕괴되기 쉽다.

 

진보, 좌파 진영의 책임 - 민주주의는 ‘적대’의 명료화에 기초한다!

 

그런데 오늘, 수구 정치집단이 극단적으로 우경화되고 기형적 색깔을 띠게 된 것은 좌파 진보진영의 안일함이 일정부분 기여한 바가 있다. 그 안일함이란 신자유주의의 승리에 굴복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이 휘발된 것인데, 소련의 소멸, 지구화과정이 가져온 사회경제적 전환과 정보사회의 출현을 ‘적대’들이 사라졌다고 이해했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사회의 경우 1990년대 이후 민주화 승리의 도취가 정체성 상실을 가속화 했다. 그래서 상생의 정치니, 중도(온건)좌파니 하며 자신들을 재정의하면서 좌파의 정체성을 상실했다. 이러함으로써 놓친 것이 수구기득권 집단, 즉 신자유주의 소비자본주의 집단이 헤게모니를 장악한 오랜 시간을 경과하게 된 것이다. 진보, 좌파 정당이 수구 헤게모니 질서를 전환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하지 않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 잘못된 신념(적대가 사라졌다는) 때문에 합의가 신성시 되고, 좌우경계가 흐릿해짐으로써 수구의 극단적 우경화를 방임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의 선명한 예가 오늘의 담론 속에서 반(反)자본주의 요소가 완전히 제거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마치 현 경제 질서만이 유일하게 신봉해야 할 절대불가침인 것처럼 간주하게 된 것이다. 시장경제에 어떤 비판을 가하려고만 하면 경색된 머리들은 무슨 엄청난 혁명을 획책했다는 듯 호들갑을 떨고, 빨갱이 놀음을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수구의 프레임에 안주했던 좌파는 따라서 시장 논리에 대한 그 어떤 대안 마련의 노력이 없었기에, 사실 아무런 대안이 없는 것이다.

 

지금 자라나는 아이들, 그리고 90년대 이후에 성장한 20,30대의 청년들이 우경화된 것은 이러한 좌파의 안일한 이해에서 자란 것이다. 이제 지구화된 신자유주의에 그 어떤 것도 허용하지 않으려는 지구촌 기득권자들의 극렬한 공격으로 옴짝달싹 하지 못하게 된 것도 동일한 이유에 기초한다, 신자유주의 헤게모니가 이데올로기 지형을 장악하면서 그에 순응하는 것만이 마치 당연한 순리이자 숙명인 듯 되었기 때문이다. 좌파의 안일함이 가져온 극명한 귀결이 지금 한국 사회에 나타난 극단적으로 우경화된 맹목과 무지의 발호이다.

 

“죄종적인 화해, 일종의 합리적 합의, 모두를 포괄하는 ‘우리’의 가능성을 배제한다.

합리적 논쟁이 이루어지는 배타적이지 않은 공적 영역이란 개념적으로 불가능하다.”

 

이러한 배경이 중요한 것은 현재 이재명 정권이 내건 실용주의 정책노선이 출현한 토대인 까닭이다. 그는 말한다. 좌파적이거나 우파적인 경제 정책은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오직 좋은 정책과 나쁜 정책만 있다고. 이 말의 표면은 갈등으로 극심하게 분열된 사회에서 매우 그럴듯하게 들린다. 마치 분열을 봉합하고 모두에게 편익이 두루 미치는 정책을 펼칠 것이라는 말로 이해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의 껍질을 한 겹 벗기고 들여다보자, 그것은 신자유주의라는 토대 하에 소비자본주의, 정보자본주의에 어떤 수정도 가하지 않겠다는 의미이며, 나아가 신자유주의 대안에 대한 아무런 강구도 하지 않겠다는 말로 여겨질 수 있는 것이다.

 

이를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현 정세가 자연스럽고 가능한 유일한 사회질서라는 것이고, 권력관계의 일정한 배치를 변화 없이 이어나가겠다는 말과 다름없다. 결국 수구집단이, 유지해 온 프레임의 변경을 하지 않겠다는 의미이다. 대단히 우려스러운 발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해체와 소멸되어야 할 집단이 그대로 유지되어서는 그 어떤 개혁도 변화도 없을 것이다. 아마 국지적인 현안 문제들을 능숙하게 해결함으로써 유능한 행정수완가라는 이미지는 부각시킬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적대를 부인하는 한 언제든 동일한 실패를 반복하게 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사회의 토대라는 것은 거대한 사슬로 연결된 시스템이다. 시스템이 이러한 실용성의 부상으로만 선의로 저절로 변화할 것이라는 믿음은 정말 순진한 것이다. 단순히 신자유주의를 좀 더 인간적 방식으로 관리한다고 해서 잠자고 있는 (우파의) 적대가 사라지겠는가? 이는 ‘적대(敵對)의 제거가 불가능한 것’과 ‘대적자(對敵者)의 경계를 명료하게 정의하는 것’은 다른 것이라는 점을 이해하지 못하기에 발생한 신념으로 보인다. 대적자가 선명하게 설정되지 않는다면 지금의 문제 해결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 버릴 것이다.

 

“갈등과 분할이 없다면 다원적인 민주주의 정치도 불가능할 것이다.

조화는 애초에 달성 될 수 없는 것이다.”

 

적대의 제거는 인간과 인간사회에서 애초에 불가능한 것이다. 내란 옹호를 내걸고 뭉쳐있는 일군의 무리들 그것들조차도 서로 적대하는 전선이 있다. 보이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진보를 표방하는 지금의 여당 또한 서로의 전선을 지닌 파당이 존재한다. 하물며 내란 옹호 세력을 ‘우리’라는 모두를 포괄하는 일종의 합리적 합의나 최종적 화해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애초의 몰지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적대는 인간사회에 상존하는 것이지 결코 사라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현재의 정체 역시 적대가 인간사회에 상존하는 것임을 전제하기에 운용되는 제도인 것이다. 만일 적대가 없다면 민주주의 또한 의미를 잃는다. 민주주의란 바로 ‘우리’를 부정하고, ‘적대’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우리’를 강요할 경우 바로 윤씨와 같은 계엄과 내란획책을 하려는 자들이 끊임없이 출현하는 것이다. 모두 ‘우리’라고 하는 것은 실제로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은 가짜 모습이며, 폭력이 지배하는 세계이다. 민주주의는 수많은 상이한 목소리들에 주의를 기울이며 투쟁의 영역을 확장해나가는 정체 제도이다. 이를 부정할 때 독재무리들, 매판, 파쇼 세력들이 발호하고 설쳐대는 것이다.

 

헤게모니는 그 어느 때보다 중대한 권력이론이다. 헤게모니 관계를 섬세하게 들여다보고 통찰 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다. 만일 이의 작동 상황을 눈여겨 볼 지혜만 있다면 이 혼란한 사회의 탈출구를 찾는데 중대한 실마리가 되어 줄 것이다. 정치를 작동케 하는 그 역학적 관계와 권력관계의 본성을 제대로 인식하는데 있어서 필수적 지식이라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등가 사슬을 이루는 그 어떤 세력과의 동행 또는 투쟁이건 반드시 적대의 경계를 확립해야 한다. 그 선명성의 경계로부터 대체 무슨 나라, 무슨 사회를 건설할지가 분명해지는 것이다. 헤게모니는 따라서 바로 지금 한국 정치사회에서 긴급하고도 중대한 이해의 기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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