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 이탈리아로 이르는 길목을 통과하던 격변의 시대, 자유주의를 부르짖던 부르주아 등 신흥 계급으로 계급의 권위가 이전되던 1860년대 시칠리아 왕국의 대 귀족인 영주 돈 파브리초를 중심으로 자신의 계급이 추락하는 시대를 묵묵히, 아니 주의 깊은 시선으로 천천히 품위있게 관조하는 삶을 연민 그득한 문장으로 그려내고 있는 작품이다. 소설은 한 인간에 던져진 모순 가득한 세계의 질서변환이라는 파문이 번지며 그것으로 유발되는 긴장 속에서 몰락해가는 귀족가문의 쇠퇴를 선명하고 예리하게 지펴낸 잘 만들어진 한 편의 드라마 같기도 하다.

아마 작가 ‘주세페 토마시 디 람페두사’가 이렇듯 소멸을 향해 나아가야했던 유서깊은 귀족가문의 마지막 인물이었기에, 등장인물들의 목소리에 진실과 자연스러움이 더욱 묻어난 까닭인지도 모르겠다. 결코 화려하거나 호사스러움을 과시하지 않으며, 그것들로 인한 자극의 격랑이 격렬하게 출렁이지 않음에도 세련미와 귀족적 우아함이 문장 도처에서 품격을 느끼게 한다. 통속적 대중성과 현학적 지성의 경계를 오가지만 결코 저속하거나 현란한 사변으로 흐르지 않는 적절한 균형의 언어로 써내려간 서사이기에 이탈리아 국민소설로 불리고 있을 것이다.
소설의 중심인물인 시칠리아 왕국 살리나의 영주 돈 파브리초는 통일 이탈리아를 내걸고 혁명의 불길에 모여드는 공화주의자, 자유주의자들을 염려스럽게 바라보지만, 시대 변화의 물결을 충분하고도 명료하게 인식하고 있는 인물이다. 구체제 지배계급으로서 자신의 계급이 침몰하는 시절임을 직시하고 있지만, “자네들은 우리를, ‘아버지’들을 파멸시킬 생각은 없어. 그저 우리의 자리를 차지하고 싶은 거지.”라는 말처럼, 단지 한 계급에서 그에 상응하는 달리 불려 질 계급으로 이전되는 새로운 형식으로의 변경일 뿐이라고 이해한다. 그래서 그는 혁명을 “많은 일이 있겠지만 모두 희극이 될 것이다. 어릿광대의 옷에 핏방울 몇 개 묻었다고 야단법석을 떠는 낭만적인 희극.”이라고 정의한다.
돈 파브리초의 인식은 그릇되지 않은 것 같다. 귀족 계급의 옹호나 계급의 변호가 아니라, 민주정을 펼친다는 오늘의 세계에 “제복을 바꿔 입은” 자들이 귀족 행세를 하고 있지 않은가. 돈 파브리초로 대변되는 귀족들의 다름은 그들 개인의 인간성이 아니라 존재를 인정받고자 하는 그들의 계급이 구별을 만들어 내는 것이라는 점이다. 귀족이라는 계급을 사라지게 함으로써 진정 민초들이 얻게 된 것은 무엇인가? 자유, 평등, 기회, 참여,..., 이러한 것들은 오늘에도 여전히 이 세계의 문제들이다. 인간은 어쩌면 형식 외에는 변할 수 없는 種인지도 모르겠다.
“주여, 제게 힘과 용기를 주소서,
제 마음과 몸을 혐오감 없이 바라볼 수 있도록.
(seigneur, donnez-moi la force et le courage de regarder
mon coeur et mon corps sans dégout!)”
소설의 중요 배경의 한곳인 돈 파브리초의 영지인 돈나푸가타는 시절의 변화, 살리나 가문의 쇠락의 시작을 선명하게 알리는 장소인데, 다리 부러진 표범은 가문의 영화가 급속하게 침몰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결코 하지 않았을 선택을 하게 된다. 이미 영락(零落)한 누이의 아들인 고아가 된 조카의 총명함과 세상에 대한 통찰력을 아낀 영주는 자신의 아들들보다 더욱 사랑을 가지고 후견자 역할을 한다. 한편 변화하는 세계는 자유주의에 편승한 영악한 자들이 이미 놀라운 속도로 막대한 재산을 쌓아 올린다. 사회의 혼란과 기근을 틈타 사악한 이익을 남기며 돈과 함께 상승한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한다. 돈나푸가타의 시장인 돈 칼로제로가 그러한 부류인데, 보잘 것 없는 농부의 자손이 자유주의자들의 우두머리가 되어 엄청난 재산으로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한 것이다.
영주의 조카 탄크레디는 그의 부모가 남긴 재산이 없다. 다만 대귀족의 신분, 혁명이 초래한 변화를 재빨리 받아들이고 현실적 동기를 만들어낼 만큼 영리한 인물이다. 영주는 조카의 이러한 성향이 혐오스럽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몰락하는 가문의 미래를 그나마 책임질 수 있는 통찰임을 이해한다. 탄크레디에게는 이러한 배경을 현실화할 돈이 필요하다. 돈 파브리초는 자신의 사랑하는 딸 콘체타가 탄크레디에 관심 있음을 앎에도 불구하고, 가문의 수혈을 위해 한미(寒微)하지만 막대한 부를 축적한 돈 칼로제로의 딸 안젤리카와의 결혼 중매에 나선다.
어쩌면 이 소설의 영화화를 촉진한 한 요소이기도 할 “압도적인 관능적 매력”으로 표현되는 안젤리카의 등장과 탄크레디와의 결합, 소외된 콘체타의 상실은 시대변화의 상징이기도 할 것이다. 안젤리카가 자신의 육체를 공략하지 않는 탄크레디에게 요염하게 던지는 말이 있다. “나는 당신의 수련 수녀예요.” 이 선명한 유혹의 언어는 소설의 통속성, 대중을 이 작품으로 유인하는 하나의 방편이기도 했을 것 같다.

【루키노 비스콘티 감독이 1963년 영화화한 『The Leopard;표범』 포스터】
안젤리카가 영주 가문의 사람들 앞에 최초로 등장할 때 묘사는 그 흥미로운 관능적 표현들로 시선을 끌었는데, 몇 문장 인용해 본다. “사람들이 숨죽이고 바라볼 정도”의 눈부신 아름다움이고, “자신의 아름다움을 확신하는 당당한 분위기”이며, “교양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흔적들의 불쾌감을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의 자태라고 하는 것이다. 영주는 자신의 결정을 이렇게 칭찬한다. “오래된 가문에 새 피를 수혈하고 계급 평등을 가져오기 때문에 장려할 만하다.”고. 새로운 변화 속에서 가문의 영속을 지키면서, 그 변화 거부의 계급에 대한 세상의 시선을 막아내는 궁여지책이었을 것이다. 혼란을 개인적 이득 챙기기에 불길할 정도로 머리가 잘 돌아가는 장사꾼들의 세계, 그러한 자들이 흥성하는 세계, 그 자체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럼에도 돈 파브리초는 새로이 수립된 정부의 사절이 제안하는 상원의원과 주요 정치적 제안을 거절한다. 이때 그가 하는 말은 누천 년 간 새겨진 시칠리아인의 정신과 한 계급의 죽음에 대한 슬픔이 깊은 진실의 마음으로 전해진다. “외부에서 완벽하게 완성되어 들어온 이질적 문명을 어깨에 짊어지고 산지가 2,500년”이라고, 시칠리아인 자신들로부터 “싹트지 않았고 우리의 것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라곤 하나도 없는 문명”을 안고 살아온 고통에 이제 지쳤고 공허할 뿐이라고 말한다. 시칠리아인은 “새로운 것들이 죽었다고 느낄 때 만, 삶의 흐름에 아무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고 느낄 때 만 매료“된다고. 섬이라는 대륙과 외따로 떨어진 시칠리안의 보수적 기질이 이보다 명료하게 설명될 수는 없을 것 같다. 이는 구체제 지배계급의 일원이었던 마지막 귀족의 절규였는지도 모른다. 가문을 지켜내기 위해서는 자신의 혐오를 무릅썼지만, 공적 대상으로서 신체제에 적극적으로 행위 하지 않겠다는 발언이다.
이 소설에서 결코 소홀히 넘어갈 수 없는 대목이 있는데, 돈 파브리초와 돈 칼로제로의 양가 결합의 계약 이후 갖게 된 빈번한 만남이 귀족계급과 신흥부르주아 계급의 상호 변화를 만들어내는 장면들이다. 영주는 시민대중에 대한 이해를 쌓는 시간이자 새로운 계급의 관점이며, 세다라인 돈 칼로제로는 귀족의 성품, 그들의 품위를 구성하는 소소한 몸치장과 예절, 무용해 보이는 심미안 등에 대한 필요와 가치에 눈이 뜨이는 것이다. 결국 작가 람페두사는 돈 파브리초의 입을 통해 처음부터 예견했듯, 신흥계급이란 기존의 귀족계급을 모방한 자리 탈취, 계급 자리의 교체에 불과한 것임을 말하고자 했던 듯하다.
이러한 양상의 한 면모로써 돈 파브리초가 가문의 새로운 피, 즉 돈 칼로제로와 안젤리카를 귀족 상층계급의 일원에 알리기 위해 귀족사회에 모멸적인 부탁을 통해 그들을 무도회에 초청케 하여 부르주아계급이 상류사회에 편입되는 상징적 장면을 보여준다. 이렇게 신흥 계급은 귀족의 품위를 모방하고 새로운 상류 계급으로 전환된다. 이때 돈 파브리초가 조카며느리가 될 안젤리카의 제안으로 왈츠를 추게 되는 장면이 있다. 알파치노가 젊은 여성 도나와 탱고를 추는 영화 〈여인의 향기, 1993년作〉를 떠오르게 하는 인상적인 순간이다. 이 순간을 “한 바퀴 돌 때마다 어께에서 세월이 1년씩 떨어져 나갔고, 이윽고 그는 바로 이 방에서 스텔라(아내)와 춤을 추던 스무 살의 자신을 발견했다. 실망도 지루함도 남은 시간도 아직 모르던 시간이었다. 잠시나마 그의 눈에 다시 죽음이 ‘다른 사람들을 위한 것’으로 보였다.”고 설명한다.
아무튼 소설 속 이 무도회의 장면은 이 작품에서 결코 빼 놓을 수 없는 쇠락하는 한 귀족이 격변기에 느끼는 무수한 감정들과 사회적 의미들이 흐른다. 아, 그리고 그의 운명의 시간이 닥친 일흔세 살의 어느 날의 묘사는 한 시대가 저무는, 또는 시대의 거인이 사라짐에 대한 애틋함, 아니 동류 인간으로서의 죽음에 대한 연민이자, 한 가문에 대한 송사(頌辭)일 것이다. 이미 쇠락한 귀족인 작가 람페두사가 자신의 증조부와 시칠리아에 대한 애도인 것만 같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 꼴이 아주 엉망이 된 표범이었다. 사람은 죽을 때 가면을 쓴다. (...) 제 모습을 잃도록 변장을 강요하는 이 불합리한 규칙을 힘닿는 데까지 어기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힘을 낼 수 없음을 느꼈다.” 존재하려는 힘, 인생 자체가 천천히 그러나 끊임없이 빠져나가는 느낌, 시간의 입자들은 이렇게 우리네 삶에서 벗어나 영원으로의 길을 감지케 한다. 이 소설은 매우 다양한 감성과 지성을 즐겁게 하는 내용들로 가득하다. 아름다움과 쇠락, 관능과 지성, 삶과 죽음, 전통과 변화, 계급질서가 교차하는 모습 등 풍요로운 서사가 시칠리아의 매력적 이미지로 그득한 지면으로 유혹한다. 한 귀족의 비애가 면면히 흐름에도 온통 아름다운 자연을 거닌 듯한 매혹적 소설이다. 내겐 더위에 지친 정신을 위무하고 돌파하는 기분 좋은 독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