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 편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이 연작소설집은 육십년 남짓 하는, 이 땅의 현대사를 관류하는 가족 연대기(chronicle)로 읽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이것을 배경으로만 읽으려 했다. 한국 사회의 구성원들이 겪어내야만 했던 가난과 가부장적 권위주의, 여성의 억압과 착취 그리고 그 내면화, 물질 자본주의의 세례로 흠뻑 젖은 군상들의 습성화된 성공주의, 허영과 차별의식의 폐해 등에 대해 외면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시대적 조류의 토대 속에서 한 사람이 자기 정체성, 아니 마땅한 자신의 자리를 찾기 위한 여정에 오히려 감응할 수 있었던 까닭이다.
소설집을 여는 첫 단편 「너의 기원」은 이러한 나의 읽기를 너그러이 승인해줄 수 있으리라 믿는다. 화자인 항암치료를 받는 오십대 여성은 이렇게 말한다. “몸을 놀린다는 것, 그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라며, “너의 몸이 너의 주인이 되었다.”고. 몸이 시간성 그 자체임을, 실존의 온전한 실체임을 느끼는 것으로 보였다. 또한 거울 앞에선 자신의 모습에 “처음 보는 낯선 얼굴이 물끄러미 너를 바라보고 있었다.”고도 말한다. 환히 빛나던 내가 생각하는 그런 내가 아니라는 것은 당혹스러움이었을 것이다. 이 두 상황이 작품 전체를 읽는 방향을 지배하였다고 해야겠다.
시간 덩어리인 몸의 실존성, 보여지는 나와 다른 나의 감각은 아마 순간의 시간들로 켜켜이 쌓인 기억의 회로를 작동시키게 되었을 게다. 그 최초의 인식이 처음 알게 된 한자 “努 力 成 功”이다. 너에게 명령하는 목소리로 머릿속 일부가 된, “엄마의 눈길을 받기 위해 성공에 목을 맸던 순간, 그 순간이 암세포 성장의 순간이었다는 것”이라고 떠올리는 것처럼, 성공을 향해 달려야만 했던, 삶을 지배했던 자신의 행위가 곧 암세포의 성장인 어둠속에 암약하던 고통의 근인이라 말하는 것이리라. 이제 오십대가 된 화자(話者)는 성공하지 않아도 괜찮음을 안다. 화자는 산동네 작은 방 여덟 살의 기억이 되고, 그 시절 “찬란했던 어느 날 봄날 속으로, 자신의 내부에서 흘러넘치는 빛이자 상처며 아픔과 고통의 기원”이 되었던 공간과 사람들을 찾아 떠난다.
그것은 너의 삶에 있어서의 “어떤 공백이자 이해 불가능한 대상”이며 “빨리 내려놓고 싶은 짐 덩어리(「오십 원만」)“로 여겨졌던 아버지와, ”엄마는 희생적이라는 데, 왜 우리 집 엄마는 그러지 않을까?(「모경」)“의 어머니에 대한 미완의 애도에 대한 확인이고, ”내가 사는 게 힘들어서 네가 어떤 시간을 보내고 있을지 생각하지 못했어.(「외롭고 높고 쓸쓸한」“의 큰언니, ”쌔앵하고 찬바람이 느껴지곤 하“던 ”집안의 수재, 경기여고, 엄마를 일찌감치 만족시켰던 존재(「란이 언니와 은행 잎 한 장」)“인 언니, ”막상 만나고보면 서로 대화의 핀트가 어긋나“던 자매들에 대한 응시를 통한 고통으로 들끓게 하던 자기화해의 여정이다.
특히 시선을 묶어두었던 장면은 단편 「명동 성당」의 “약하고 현실 도피적이고 결국 실패하고 말 인간”으로 기억되는 낙오자로 여겨졌던 오빠가 “내가. 점수 따기의 입시공부나 두꺼운 책을 펼친 채...추상적인 세계를 헤매고 있을 때” 사람공부, “더 큰 공부를 하고” 있었다고 인정하게 되고, 마침내 “밤샘 농성에 지쳐서 쪼그리고 앉아있는 사람들을 두 눈으로 껴안고 있었던 그 얼굴이, 이제야 초점을 맞춘 듯 또렷이 보였다. 이제 생각해보니 그 장면의 주인공은 내가 아니라 오빠였다.”고, “경계 없이 손을 잡고 어깨에 팔을 걸쳤던 그때만큼 세상이 활짝 열리고 나 또한 세상을 향해 열렸다고“느꼈던 그것일 것이다. 이것은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데, 오빠 삶에 대한 긍정의 뿌리는 ”바로 곁에서 마음을 후벼파는 구슬픈 울음과 노랫소리로 숨 쉬고(「모경」“ 있었을 엄마에 대한 미완의 애도를 완결하는 것으로 이어지는 듯했기 때문이다.

어린 가슴에 맺힌 기나긴 회한이었던, 상장을 내밀고 “오십 원만 줘요, 히잉”하는 아이가 있는 「오십 원만」은 노동기계와 《사상계》 만큼』이나 다른 세계를 살았던 딸의 아버지에 대한 분노가 묻어난다. 뺑끼쟁이를 “경멸과 천시어린 시선이 교묘히 감추어진” 도장업이라 기록해야했던 마음은 아버지라는 장애물, 인생의 걸림돌로서 기록된다. 때문에 임종의 순간 “아버지의 두 눈에서 생생한 감정이 떠오르는 것을 보았다. 공포, 하지만 그 공포는 너의 마음에까지 덮치지는 않았”으며, 아무런 슬픔을 느끼지 못했던 장례식, 어떤 애틋함도 그럴듯한 상징적 의미도 떠오르게 하지 못한다.
이 단편의 “멸시와 천대로 나약해진 마음, 눈치와 비겁 속에 굳건해진 비굴만이 있을 뿐. 오랜 노동으로 단순해진 뇌와 무감각만이 있을 뿐”인 아버지라고 쓴 문장을 읽을 때, 나는 아니 에르노가 쓴 그녀의 아버지에 대한 묘사가 떠올랐는데, ‘사회와 타자를 의식해 스스로 자기 목소리와 행동을 억제하며 자기 자리를 지켜내기 위해 자신도 모른 채 자기 실존을 그대로 드러낸 침묵’을 말하며, 지식인 중산계급에 진입하고서도 빈곤과 계층의 열등감이 한 존재의 내면을 차지하게 된 기원과의 불화의 기억을 소환한다. 에르노는 그 수치스러운 장벽들의 인식을 고스란히 드러냄으로써 그러한 삶의 방식을 사실화하는 글쓰기를 통해 자신의 자리를 확인한다. 사실 애도의 완결을 통한 자리찾기 또는 자기확인은 어쩌면 이미 글쓰기 자체를 통해 해결될 수 있음의 한 사례일 것이다.
「열일곱 살의 강」은 분노의 글쓰기로 아버지의 이해를 완결했다고 여겼으나 그게 아니었다고 말한다. “작년 겨울부터 나는 글을 쓰지 못했다.”고, “어디에선가 나는 막혀 있었다”고. 아버지의 말은 언제나 침묵이고 공백이었기에 그에 대해서 말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었음에 대한 고통을 말한다. 이러한 부정의 세례를 받고 성장한 사람은 화자뿐 아니라 한 울타리에서 성장한 다른 자매들도 다를 바 없을 것이다. 「미자씨의 기나긴 하루」의 자매인 미자언니의 살아 온 태도가 “저자세”로 명명되듯이 말이다.
나는 아버지 또는 큰언니를 말할 때 ‘숙명’ 이나 ‘운명’이라는 그럴듯한 수용의 언어가 반복됨을 보았는데, “아버지가 아무 말 하지 않았던 것은 누구도 원망하지 않기 위해서”, “대결이 아니라 받아들임”이라는 운명의 겸허로 납득되는 것, 그래서 임종 몇 시간 전의 아버지의 모습에서 열다섯 고아가 되어 “홀로 궁벽한 고독 속에서 세상”에 대항하여만 했을 소년의 얼굴을 기억해내는 것은 그만큼 절실해 보였다. 시대를 살아내야만 했던 우리들의 한계에 대한 이해였을까? 자기 확립을 위한 또 다른 방어의 필요였을까?
몸의 시간성과 거울에 비친 낯선 얼굴이 불러온 자신의 정체에 의심을 갖게 하는 지나온 자리에 대한 끊임없는 불편함은 자신도 알지 못하던 힘 또는 불쾌감, 분노, 혐오의 징표들을 가지고 살았던 환경이라는 잊고 있었던 시간을 되찾게 하는 모양이다. 『사상계』를 읽으며, 지식인 중산계급의 세상으로 들어갈 때, 그 문턱에 두고 가야했던 유산을 밝히는 일이 삶의 제자리를 확보하는 중대한 현실이 되는 것이다.
소설은 매우 섬세하고 치밀하고 수없이 반복된 성찰의 흔적들로 가득하다. 때문에 읽기에서 배제했던 60년 남짓한 시대성 파편들은 오늘의 독자들에게 폭넓은 연령대의 사람들을 이해하는, 이 시대가 품고 있는 굳이 들추어내지 않고 묻혀있는 물어야 하는 실체들, 혹은 본질들을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나의 읽기가 향한 한 사람의 자기 찾기, 또는 온전한 자리 찾기라는 실존적 평온을 위한 여정으로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탈리아 소설가 델 주디체는 ‘모든 소설은 무엇을 결정한 것, 즉 글을 쓰겠다고 결정한 동기에 관한 이야기다.’라고 말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 작품집은 치열한 기억의 복기의 긴장이 자리잡고 있다. 쓰지 않으면 안 되는 글쓰기, 나의 정체성을 새로이 해석하고 확인하는 작업은 그토록 고되고 거칠고 격렬한 것일 게다. 이 소설들에는 소리없이 격렬하게 살아 온 사람들의 목소리가 있고, 치밀하고도 주의깊은 자기 성찰적 인간의 깊은 시선이 있다. 소설에 배어있는 고뇌를 보았기에 어쭙잖은 감상을 쓰는데 망설였다. 늙어가는 자의 두뇌가 점점 의지를 따라가지 못하는 듯하다. 가소로운 수사적 상찬은 하지 않으련다. 다만 이 소설집이야말로 진실의 목소리로 가득하다는 말은 꼭 들려주고 싶다. 시대의 기억을 온전히 담고 있는 몸인 오늘 우리들의 모습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