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시절의 인연으로 맺어진 나이 서른을 맞이하는 루미, 현, 반희, 세 여성 각자가 헤쳐나가는, 마주한 삶의 이해와 조율에 대한 성장의 이야기로 바라볼 수 있는 이 작품 『세 개의 푸른 돌』에서 나는 다시금 소설 속 인물들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작가의 시선을 느낀다. 그것은 ‘타인의 고통을 완화시키려는, 타인의 행복을 증진시키려는 의지이자 감정’이라는 체화된 진정성일 것이다. 은모든 작가의 소설을 찾는 이유이다.
‘작가의 말’을 맺는 마지막 문장인 “줄곧 고생만 하고 자란 갸륵한 아이에게 세상 구경을 시켜주고 싶었다.”는 말이 바로 그것이다. 이야기는 10년 전 학창시절 어느 날의 한 토막 장면으로 시작된다. “그러니까 너희 아빠는 자기 편해지려고 너를 팔아먹겠다는 거네?”, 책상에 엎드려 수업은 물론 반 급우들과의 소통도 일체 없던 전학 온 ‘현’이 ‘루미’와 ‘반희’가 작게 나누던 대화를 엿듣고 큰 목소리로 루미를 향해 뱉어낸 말이다.
학교 앞에 내 걸린 아이를 입양시켜주면 그 부모에게 대가를 치르겠다는 역겨운 현수막의 유혹에 홀아비인 루미의 아빠가 현혹되어 루미에게 넌지시 건넨 사연에 대한 반응이다. 심청전의 21세기 버전, 자식의 죽음과 같은 극단의 희생을 요구하는 당대 효의 윤리에 스며있는 비도덕성에 대한 반기의 목소리일 것이다. 자기 고통, 자기 연민에 매몰된 루미 아빠라는 인간에 대한 반감, 그러나 현의 느닷없는 외침은 급우들의 성토로 돌아온다. 루미의 처지를 급우 모두들에게 발설하여 난처하게 만든 무신경에 대해서. 현은 자기감정에 충실해 친구의 체면을 돌보지 못했음을 깨닫는다. 한때 아역배우로 대중의 시선을 받았으나 그녀의 행동에 낙인이 찍히게 됨으로써 이 학교 저 학교를 옮겨 다니다 졸업을 한 학기 남겨두고 전학 온 학교에서 현은 외톨이다.
배우의 세계에서 내려 온 현으로 인해 그녀의 유명 덕에 의존했던 가게는 곤궁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현의 아빠, 그의 가계(家系) 일원들은 어린 현의 탓으로, 그리고는 루미의 아빠와는 또 다른 형태의 자기연민의 나락에서 방황한다. 현은 이러한 가족들의 면모에서 자신에게 부여되는 의무에 대항하여 자기 삶에 철저한 인물이 될 수밖에 없는 사람이 된다. 현의 말처럼 “오염된 평균치”, 세상이 딸에게 부여하려는 그 괴이한 의무가 강요하는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독한 딸이 된다. 작가는 이 소설에 결정적 방향을 제시한 강릉 단오제에서 조우하게 된 제주 무속 신화 <가믄장애기>를 말한다. “얄팍한 효성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한 주인공 가믄장애기의 당찬 주체적 삶, 아니 그 이상인 이야기가 이 소설의 출발점이 되었다고.
현은 그녀에게 유일하게 말을 건네고 허물없이 대해주던 반희의 모든 사람에 대한 변함없는 관대한 태도, 어떠한 미움이나 짜증이 고일 공간이 없어 보이는 그녀와 친교를 나누지만, 그 감정은 복잡 미묘한 것이다. 절망, “언제든 집어삼킬 듯 밀려오는 파도 앞에 서 버틴다”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반희라는 존재 자체에 대한 속 쓰림, 모든 것을 가진 삶의 안락함에서 연유하는 넉넉한 여유에 대해 느껴지는 양가감정일 것이다. 그래서 현은 반희에게 말한다. “네가 가진 거 안 뺐기고 안 망하고 울고불고할 일 없이 그대로 잘 살면 좋겠어, 진심으로.” 이 세상의 딸들을 향한 기원의 말처럼 여겨진다. 너만이라도 세상의 그 기이한 윤리적 부담이란 명목으로 강요된 삶으로부터 벗어난 삶을 살기를 바라는 간절한 희원의 목소리일 것이다.

학창 시절이 끝나고 서른을 목전에 둔 크리스마스 전날 현은 루미를 찾아온다. 간호대학을 나와 내과의원에 안착한 루미는 검정색과 창백한 얼굴의 뚜렷한 선명함이 도드라진 현과 마주한다. 여전히 아버지의 돌봄에 붙들려 자기 삶의 가능성을 생각하지도 못하는 루미는 자신이 참여한 영화 개봉을 기다리는 현과의 만남 속에서 집과 병원만을 오가는 삶을 살고있는 자신을 문득 깨닫지만 곧 어쩔 수 없다는 생각으로 도피한다. 매 시간 딸을 닦달하는 전화를 하는 루미의 아빠, 딸의 돌봄을 당연한 권리로 여기는 인간, 자식의 삶에 대해서, 그 자유의 대해서 무신경한 이기적 삶을 현은 꿰뚫어본다. 지적능력, 혹은 인격 자체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 아버지에 매인 친구에게 자신의 믿음에 기초한 이야기를 토해낸다.
“한없이 받아주는 사람이 있으면 그게 당연한 건 줄 알고 마냥 기대는 사람들이 많다는 얘기야. (...) 자식 위에 드러눕는 부모들 널렸다고. (...) 20년 동안, 너는 이렇게 컸는데, 너희 아빠는 계속 그 상태라는 게 말이 되느냐고.”
루미는 말한다. “사람들에게 치이지 않는 한적한 곳”으로 탈주하고 싶다고. 현은 이런 루미에게 시도를 해 볼 용기를 제공한다. 읽는 이들마다 세 인물에 대한 매력이 달리 다가오겠지만, 내겐 현의 단단함, 스멀스멀 내면을 갉아먹는 사회적 강제들과 자기 연민을 성찰하며, “자신의 생활이 생각보다 허술한 토대에서 운영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할 만큼 스스로 추스르는 당참이 매혹적이었다. 집에서도 검은 옷을 입으며, “이건 내 인생의 상복”이라며 자신의 불행을 발산하는 인물. 현을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는 이 무의식의 발현인 검정색 옷을 벗어던지는 날은 그녀 자신이 루미에게 건넨 말처럼 시도를, 그 무엇과의 마주하려는 시작의 행위로만 가능할 것이다. 반희는 네 존재 자체가 속 쓰리다는 현의 말을 언제 이해하게 되었을까. 여성이기에 겪어야하는, 피해갈 수 없는 울고불고할 일은 기어이 찾아들게 마련이다. 반희는 처절한 상실의 아픔 속에서 비로소 현의 말뜻을 이해한다. 소설은 이렇게 세 여성들이 서로를 반면교사로 함으로써 그 투영된 상(像)의 의미를 해독하고, 직접 겪으며 삶의 구체적 행동을 학습한다.
그 여정은 현이 친구 루미를 위해 가르쳐주는 세상에 펼쳐진 다양한 장소들, 음식들, 사람들이고, 현은 그녀가 출연한 영화 속 인물의 해석 속에서, 그리고 고통의 원 장소인 제주와 같이 루미와의 동행한 공간이며, 어느 한옥 숙소의 노천탕 느낌 나는 욕조다. 작가는 이들, 특히 루미에게 그 얽매인 틀 속을 뛰쳐나와 일말의 불안감도 느끼지 않으며 얕은 탕 속에서 안전과 평온감, 아마 그녀를 옥죄던 것들로부터의 해방감을 비로소 느끼게 해주는 작가의 위무가 온화하게 전해져 옴에 반응하게 된다. 그래 우리들의 행복은 타인의 고통완화와 행복증진임을 확인케 한다. 진정 좋은 윤리, 진짜 좋은 삶을 만드는 인륜이란 재산가치나 강요된 굴레로서의 복종이나 순응이 아니다. 자신의 목숨을 바치고 아비의 눈을 뜨게 하는 것이 효라는 이상을 실천하는 비장미라며 심청을 선전하는, 효를 거대한 사회적 이벤트처럼 홍보하는 황당무계(荒唐無稽)한 희생논리를 강요하는 관성이 이 사회에 여전하다.
어쩌면 이 작품은 그 명령의 부당성을 이 땅의 세 딸이 겪어내야 하는 고통의 장면들을 통해 항의하는 목소리이기도 할 것이다. 현이 친구들에게 하는 말이 있다.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고 사는 게 서러울 때 꼭 알리고, 연락하면 반드시 받아주자고.” 언제든 대화상대가 필요하면 자기에게 연락해달라고. 작가의 2020년 발표작 『모두 너와 이야기하고 싶어 해』에서의 경진의 목소리와 겹쳐 들려오는 듯하다. 은모든 작가는 사람들의 고통에 귀 기울여 듣고 그들에게 눈을 맞추며 진정으로 타인의 말을 듣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준다. 귀 기울여 듣는 이야기다. 그것을 배우는 이야기다. 서로 이야기하고 싶어지도록 하는 이야기다. 21세기 심청전은 은모든에 의해 이렇게 새로운 윤리, 참담하고 극단적으로 강요된 희생의 윤리로부터 정당한 탈주를 감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