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다른 노력 없이 신뢰를 얻고, 있는 그대로 자신을 표현해도 안전하다고
느끼며, 문제가 발생하면 해결할 수 있다는 느낌” -42쪽
인용한 문장은 우리들이 ‘주류(主流)’라고 부르는 집단의 정의이다. 따라서 이 주류집단으로서 느끼는 정서는 가지고 있다는 사실조차 느끼지 못하는 자연스럽고 편안한 상태의 일반적 삶의 모습이다. 이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을 특별히 내세우지 않아도 어떤 차별의 시선이나 감시의 경계와 마주치지 않는다. 또한 “대다수의 사람들은 차별을 하지 않으려 하기에 자신은 차별주의자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책은 이 지점에서 우리들 자신을 성찰할 것을 요구한다.
책의 제목인 ‘선량함’과 ‘차별’은 서로 어울리지 않는 모순어처럼 여겨진다. 선(善)한 사람이지만 자신도 알지 못하는 가운데 차별주의자로 말하고 행동하고 있는 우리들 자신을 돌아보게 하려는 저자의 고육지책(苦肉之策)에서 탄생한 언어일 것이다. 진정 우리들은 어떤 경우에도 차별하고 있지 않은가? 혹 무의식적이거나 선의와 농담으로 한 말이나 행위, 태도에 차별을 담고 있지 않았을까하는 자기 의심 말이다.
우리 대다수는 차별을 대놓고 하지 않으며, 차별을 금지하는 도덕적 원칙에 반대하지 않는다. 그러하기에 자신이 차별을 한다는 사실은 있을 수 없다고 자신한다. 우리는 자신을 에워싼 사회 환경에 익숙해지면 그것이 당연한 것이기에 별다른 인식을 하지 못한다. 때문에 자신이 주류로서 특권을 가졌다는 생각도 하지 못한다. 즉 자기 위치에서 세상을 바라보기에 다른 위치에 서있는 사람들도 똑같은 세상과 마주하고 있다고 여긴다. 그러나 우리들 각자는 모두 서있는 위치가 다르다. 동일한 세상을 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세상은 꼭 그렇게 완전하게 수평적으로 평평하지 않은 기울어진 세상일 뿐이다. 기울어진 세계에서 자기 시선에 비치는 공정성만을 얘기하기 시작하면 상대에게 모욕과 수치심이 될 수 있음을 지각하지 못하게 된다.
책은 이처럼 우리가 특별히 인식하지 못하고 익숙해서 의심하지 못하는 차별의 양태들을 구조적 불평등, 고정관념, 공공 공간의 자리함 등등에 비추어 그것들에 내재된 은폐되거나 만연하여 당연시되고 비가시화 된 차별의 모습들을 통해 우리들이 상시적인 차별주의자가 될 수 있음을 자각케 한다.
1. 나의 위치로 인해 불평등이 보이지 않는다.
저자는 서 있는 위치의 다름으로 인해 누군가의 눈에는 보이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그것이 보이지 않음을 비정규직과 정규직의 시선,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비롯 성적차이, 출신 민족 등 의 차이를 통해 알려주고 있다. “차별 덕분에 이익을 보는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사소한 차이가 당하는 사람에게는 매순간 뼈저린 모욕과 수치심을 안겨준다고.
드라마 《미생》의 비정규직 사원인 장그래가 명절 선물로 정규직에게 주는 햄 세트 대신에 식용유를 받고는 너무도 사소해서 딱히 표현하기 곤란한 차별에 당혹해하는 장면의 실례는 정규직이라는 주류의 시선에는 보이지 않는, 즉 자신의 위치로 인해 불평등이 보이지 않는 적절한 보기일 것이다. 차별은 이와 같이 보이지 않을 때가 많아, 만연한 차별이 있음에도 마치 없는 것처럼 여겨진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인식을 이미 가지고 있었으리라 믿는다. 그러나 자주 이러한 상황 인식을 잊어버리고 있었음 또한 사실일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위치를 당연한 것으로 간주하는데 익숙하기에 자주 망각하고 보지 못한다.
이러한 양태의 실례는 무궁무진 할 것이다. 무심히 말했던 ‘장애우님, 희망을 가지세요.’와 같이 얼핏 칭찬이나 격려처럼 보이지만 듣는 이에게 모욕적 표현들이 즐비하다. 장애인을 존중한답시고 장애우라는 차별의 본질을 미화하려는 언어태도에 차별의 심리가 내재되어 있으며, 희망을 가지라는 말에는 너 같은 사람은 으레 희망을 갖기가 어려운 것이라는 자기 기준에 의한 타인 삶의 가치 매기기의 오만함이 은폐되어 있다. 이를 지적하면 발설자는 ‘너무 민감한 거 아니야’라던가, ‘그럴 의도로 말한 게 아니야, 그렇게 들렸다면 미안’이라며 자기 방어를 하곤 한다. 전자는 잘못을 듣는 이에게 돌림으로써 가해자가 피해자를 비난하는 파렴치이기 쉽고, 후자는 그나마 무의식적으로 표현된 자신의 의사를 반성적으로 성찰할 여지가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들은 자신이 서 있는 위치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다른 사람에게도 같을 것이라는 착각을 한다. 이들 흔한 사례처럼 우리는 여전히 차별을 잘 안다고 할 수 없다. 나 역시 어느 장소에서는 특권적 지위를 누리는가하면, 또 어떤 곳에서는 주류의 범주를 벗어나 비주류의 일원이 되어 소외되거나 배제되기도 한다. 내 위치와 시선이 고정된 것이 아님을 잘 안다. 때문에 다른 사람과 대화를 나누거나 어떤 과업을 함께 수행하게 될 때 이러한 측면에서 실수를 하지 않으려고, 나아가 그러한 잠재적 의식이 행여 무의식중에 표현될까하여 주의를 기울이곤 한다. 그럼에도 나도 모르게 상대에게 상처를 준 적이 있을 것이다. 저자 김지혜 교수가 장애인들을 앞에 둔 강연에서 ‘결정 장애’를 말하듯 말이다.
어떤 구호대상자에게 일정의 호의를 베풀지만 그것이 지속 될 때 처음의 고마움은 사라지고 도움의 손길을 당연시한다고 여겨지자, 괘씸한 생각을 품어 “호의가 계속되면 그게 권한인 줄 알아요.”라는 주고 말고의 결정 통제권이라는 권력행위를 말하는 얘기가 있다. 즉 호의와 권리에 대한 불평등 관계가 있음의 지적이다. 그래서 무심하게 자신의 입장에서의 무례함을 정당화한다. 나 또한 이런 인식이 없었다고 확신하지 못한다. 불평등한 구조에서는 기회와 권리가 다르게 분배되는 구조적 불평등으로 인한 차별의 마음이 속살거리고 있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또한 아주 중요한 점을 일깨우고 있는데, 차별의 요인을 없애고 그것을 주류의 상태로 정상화 할 것을 요구라도 하면, 즉 공공시설에 장애인의 휠체어가 이용할 편의 시설을 만들기라도 하면, 마치 비장애인의 이익이 감소한다고 여기는, 즉 특권을 잃는다고 생각하는 손실회피현상에 의한 확대체감의 한 실상일 것이다.
우리는 여성, 남성, 성소수자, 나이, 직업, 종교, 출신국가 등등의 범주에 따라 무수한 내집단에 속한다. 여성이며 무슬림인 이주민일수도 있고, 여성이며 고위 관료일수도 있으며, 남성이며 은행장 출신의 은퇴 후 경비노동자일수도 있다. 아마 이러한 범주들이 교차하면 수천, 수만 가지의 내집단 조합이 존재할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들은 마치 한국인 하면 ‘감정적, 성급함, 수줍음, 외모지향’과 같은 일종의 스테레오 타입을 떠올리면서 이 고정관념에 의해 다른 사람을 획일적으로 재단해버린다.
2. 고정관념 - 범주화, 구분 짓기, 편견
고정관념은 나로서는 가장 우려하는 차별의 원인으로써, 어쩌면 인간의 본원적인 결점에서 움트는 차별의 근원적 양태로 여겨져 특별히 관심을 지니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저자는 미국의 사회심리학자 고든 울포트의 “인간의 마음은 범주의 도움을 받아야 사고(思考) 할 수 있다.(...) 그래야 질서 있는 생활이 가능하다.”를 인용하며, 범주를 통해 모든 대상을 구분 짓는 인간의 특성을 말하듯, “우리들은 머릿속에 각인된 자신만의 그림에 의해 경험하지 않은 세상을 이해하고는 마치 그 대상을 잘 안다고” 여긴다. 사실 개인이 지니고 있는 고정관념은 자기 자신의 가치 체계일 뿐 그것은 대상을 설명하지 못한다. 결국 그 편협한 앎에 의존한 일반화는 오류이고, 편견일 수밖에 없다. 아마 모든 차별의 토대일 것이다. 자기가 아는 것과 다른 것은 배제하고 무시함으로써 새로운 수용을 통한 변화발전은 사라지고 자신의 고정관념과 합치하는 익숙한 것들만을 반복하며 편향된 시선에 매몰되어 버리는 것을.
여기서 우리와 그들이라는 갈라치기, 즉 분열과 혐오라는 상대를 배척하는 태도가 발생한다. 자신이 속한 집단과 속하지 않은 집단을 분리하면서 외부 집단을 향한 부정적 평가에 의해 “난데없는 편견”을 통해 극심한 차별의식을 드러낸다. 차별이란 이렇게 자신과 자신이 속한 집단 외부의 사람들을 주변화하여 부정적 감정을 씌우는 것일 게다. 이것은 비단 오늘날 여성이나 성소수자, 여타 사회적 약자에만 가해지는 차별의 양태가 아니라고 생각된다. 고정관념이라는 상대를 단순화하여 고착화시킨 인식은 일상 속 무수한 장면에서 발생한다. 저자가 제시하는 표현의 예(例)처럼 “그럴 사람이 아닌데.”라는 말이 얼마나 수시로 발설되곤 하는가.
‘그럴 사람’이란 자신이 지닌 고정관념에 합치하지 않음을 전제하는 말이다. 경비원이 석사출신의 고학력자면 안 되기라도 하는 듯 ‘그런 사람이 여기서 왜 일을 해.’라고 말하는 것을 빈번하게 목격했다. 자신의 고정관념에 일치하지 않으면 그것을 수정 변화시켜야 하는데, 특이한 경우에 불과하다고 부정하여 자기 판단의 편향성을 고착화한다. 많은 경비노동자뿐 아니라 사회적으로 외면되는 많은 직업군에서 이러한 현실이 증가하고 있다. 그들이 고학력, 과거 고소득의 직업 출신이라 차별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고정관념이라는 단순하게 고착된 앎에 의존하는 것, 즉 내재된 차별의 시선에 깃든 불확실성과 그 부정성을 환기하려는 까닭이다.
‘범주의 다중성’을 인식하여 하는 이유는 이러한 앎의 편협성으로 인한 편견의 시선뿐 아니라, 각 개인이 속한 내집단에 따른 지위의 변화로 인해 어느 곳에서는 차별할 수도, 또는 차별 받기도 할 수 있음의 인식이다. 장애인인 젊은 여성이 이같은 스테레오 타입에 의한 고정관념을 가졌다고 하자. 고객들이 무한하게 내원하는 시간에 병원 고객들의 발레주차로 정신없는 경비노동자에게 장애인을 돕기 위해 하던 일을 중지하고 달려오지 않는다고, 다가와 싸대기를 올리는 것을 본적이 있다. 정말 어처구니 없는 장면이었는데, 이처럼 범주의 다중성으로 인해 장애인이거나 여성이라고 차별을 받는 자이기 만한 것이 아니다. 경비노동자는 자신이 차별해도 되는 존재라고 생각한 것인데, 차별의 모습들은 이처럼 도처에 만연해 있으며, 결코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그런 익숙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3. 구조적 차별과 유머의 사회적 맥락
사실 이러한 차별은 인간의 본성만큼이나 오래된 것인데, 이에 버금가는 것이 직업에 만연된 차별일 것이다. 육체노동은 정신노동보다 가치 없으며, 게으르고 무식한 사람들이나 하여야 하는 것이라는 인식인데, 그래서 아이의 엄마는 손가락질하며 ‘너 공부 소홀히 하면 저 사람처럼 된다.’고 하는 의식에 놓여있는 뿌리깊은 차별의식이다. 이 책은 이 점에 대해서 상당히 완곡하게 채색된 사례를 이용하고 있는데. 면접자가 상대의 편견에 맞추려는 의도적이고 이성적 행동을 하는 ‘취업면접’을 사례로 인용하여, 사회적 편견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직업에 만연한 구조적 차별을 설명하고 있다.
“동화(同化)주의적으로 순응하도록 요구받는 삶의 압박”에 의해 손상된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두드러지게 보이는 낙인처럼, 억압받는 사람이 체계적으로 작동하는 사회구조에 의해 강압과 장벽에 의해 방해받고 있음에 대한 지적이다. 사실 나는 이를 차별받는 자의 관점에서보다는 차별하는 자의 인식에서 오히려 적극적으로 작동한다고 생각한다. 저자는 구조적 차별은 억압받는 사람에게는 작동하는 사회구조를 보지 못하게 하여 자신의 불행이 우연이거나 일시적 문제라 생각하게 한다는 것이라지만, 반대 면은 이러한 사회적 구조에 의해 아이에게 말하는 저 엄마처럼 자신의 말을 차별로 인식하고 있지 못하는 그 만연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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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자신이 유리한 지위에 있게 되어있음을 자각하면 차별의 인식 범위가 극히 협소해지거나 차별을 인식하지 못하게 되고, 차별을 말하는 사람에 대한 이해를 하지 못하는 인식불모지대에 빠져들곤 한다. 그리고는 차별을 말하는 사람을 향해 “예민하다.”, 또는 “불평이 많은 사람”이라고 비난을 씌우곤 한다. 이것이 잊을만하면 시정되지 않고 수없이 빈번하게 뉴스를 오르내리며 반복되는 경비노동자에 대한 입주자의 폭언과 폭력의 전형적인 실체일 것이다.
구조적 차별은 저자의 주장처럼 차별 당하는 자의 손상된 정체성으로서의 열등감이라기보다는 차별하는 자, 바로 우리들에게 부착된 오래된 직업에 대한 차별의 관념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된다. 왜 거리의 쓰레기를 청소하는 미화원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국민의 건강을 볼모로 진료를 외면하는 의사들보다 천대와 차별받아야 하는가. 미화원은 코로나19가 창궐할 때 국민건강에 더없이 요구되는 노동자들이었다. 대체 어떤 기준이 이들을 차별당해야 할 사람들로 낙인을 찍는 것일까? 아무튼 차별의 문제는 이 세계의 가치를 다시 생각해야 하는 출발의 지점이 되기도 할 것이다. 진정 구조적 문제는 이처럼 매우 본질적 물음을 하도록 이끈다. 예시한 일견 급진적 이의처럼 구조적 차별에 대한 문제들은 우리들에게 주의깊고 인류 사회 전체를 아우르는 폭넓은 성찰을 요구한다.
이 책의 여러 통찰 중에서 내게 매우 강렬하게 인식된 부분은 이같은 구조적 차별의 문제와 더불어 일종의 조롱이자 우월성의 표현으로서의 유머에 숨겨진 차별의 성찰이다. 제법 시간이 지난 과거에 유행하던 코미디에는 맹구라는 바보가, 시커먼스라는 블랙페이스로 분장한 흑인 이미지를 차용하여 웃음을 요구했던 프로그램이 예시되고 있다.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웃으며 이를 즐겼다. 그런데 바로 오늘에 이러한 장면이 공연된다면 그저 웃을 수만 있을까? 우리의 도덕적 인식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변화한다. 또한 미성숙한 윤리적 인식도 더욱 고차적으로 성숙해왔다고 여겨진다. 책은 이제 이러한 코미디에 “웃기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는 사실”을 적시하며, 유머는 사회적 맥락에 따라 달라짐을 적시하고 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의 약함, 불행, 부족함, 서툶을 보면 즐거워하는 상대방을 깎아내리거나, 자신이 동일시하지 않는 집단을 깎아내림으로써 사회적 규범에 의해 억눌려 잠재해있던 편견을 조성된 분위기에 편승해 드러내며 그 차별을 용인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유머를 보며 “누가 웃는가?”는 매우 중대한 물음이 된다. 비하성 유머를 던지고 평소에 지녔던 차별을 가볍게 여기도록 하는 사회적 금기 영역의 빗장을 풀어버리곤 잔혹한 놀이를 시작하는, 그 유머로 위장된 혐오의 표현을 문제 삼는다. 우리는 누구를 향해 웃으며, 누군가를 밟고 웃고 있는지를 진지하게 질문해야 한다고 우리의 인식에 선한 충격을 가한다. “사회차별에 취약한 집단을 소재로 하는 비하성 영상이나 방송은 잠재된 편견을 표출시키는 효과”라는 것이다. “취약 집단에 대한 농담은 가벼운 유희가 아니며, 차별을 촉진시키는 힘이 있다.”는 말처럼 잠재된 거부감이 혐오표현으로 마구 방출되는 오늘의 현실이 차별을 정당화는 규범을 형성하여 사회혼란의 중요거점으로 작동하고 있음의 방증일 것이다. 이러한 차별의 동기에는 어떤 대단하거나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다. 단지 개인이나 집단이 지니는 상대에 대한 불쾌의 감정이라는 지극히 사소한 마음이 이러한 혐오와 차별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사소한 분별의 인식이 차별과 혐오로 확대됨을 안다면 우리들의 싫고 좋음이라는 감정에 도사린 음험한 권력의지를 새롭게 바라보게 된다.
4. 공적 공간에 설 자격, 그리고 차별 정당화 논리들
4-1. 아름다운 언어도 차별의 언어가 될 수 있다.
책은 우리 헌법 20조를 인용하며, 종교적 신념을 이유로 누군가를 적대시하고 혐오하며 배척하는 주장은 민주사회의 기본원리에 반한다고 적시하고 있다. 그럼에도 특정 종교들은 자신들의 교리를 내세워 성차별을 정당화하거나, 나아가 반드시 차별해야한다고 주장하기까지 한다. 한편, 헌법 11조의 모든 한국인에 대한 평등권과 차별금지를 선언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국적을 가진 사람일지라도 피부색이나 외모가 다르다는 이유로 입장이 거부되는 것은 매우 만연한 실상이다. 한국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실질적 한국인이지만 어두운 피부색과 외모로 외국인으로 취급하여 차별한다. 누군가를 외부인, 손님으로 만들어 거부하는 권력을 행사하는, 이 구분과 분리의 경계 설정의 권리가 누구에게 있는가? 고 묻는다.
한국인이지만 부모 중 이주민이 있다는 사실 때문에 차별받는 사례는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소개되고 있는 종례 뒤 “선생님이 ‘다문화’ 남아! 라고 말씀하셨다”는 한 어린 초등학생의 모멸과 수치심에 당황했던 말은 “본래 다양한 문화와 상호존중과 공존을 의미했던 정체성 존중의 단어가 ‘진짜 한국인’이 아닌 다른 사람을 구분하는 단어”로 오용된 무례한 차별의 용어가 되었음을 보여준다. 이는 “가장 아름다운 언어도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 오염되고 상처를 주는 잔인한 의미로 바뀔 수 있음”의 보기일 것이다. 한 교사의 한 인간에 대한 무시와 박탈의 이 무심한 표현에 담긴 뼈저린 차별의식의 발로를 대체 무어라 규정해야 할지. 치열한 경쟁의 비즈니스 현장을 비롯한 성인들의 일상의 현실 뿐 아니라 어린아이들의 교육현장에서조차 벌어지는 이 무심한 차별을 읽는 심정은 참담하기만 하다. 차별의 영역이 그 어느 곳에나 존재하고 있음을 새삼 깨닫는다.
4-2. 공적 공간에 입장할 자격?
책은 퀴어 축제를 문제 삼는 현실을 통해 “오늘날 누가 공공의 공간에 설 자리를 가지며, 누가 사적 영역에 남도록 요구하는가?” 라고 단지 자신들이 보고 싶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특정한 사람들이 자신들의 눈에 보이는 공공의 장소에 보이지 않을 것을 요구할 권리의 혐오와 차별의 실체를 쫓는다. 사실 이러한 길거리, 공원, 광장 등 공공의 공간에 설 자격에 대한 문제는 오래된 문제이다. 퀴어만의 문제가 아니라 장애인 단체, 민주노총, 간호사 단체, 전교조 교원들의 연합체 등 그 어떤 특정 단체가 집회나 시위를 하려하면, 익명의 다수가 생업을 방해한다고, 교통의 흐름을 방해한다고, 당신들은 설 자리가 아니라고, 공공의 장소에 어울리지 않는 존재라고 온갖 방해와 낙인을 동원해 차별의 시선을 드러낸다.
“왜 굳이 길거리에 나와 사람들의 생업을 방해하나요?, 왜 구태여 축제를 해서 시선을 끄나요?” 와 같이 공공 장에서 보이지 않는 존재로 머물라고 요구한다. 공공 공간에 입장할 자격은 누가 정하고 통제하는가? 권력을 가진 이들의 보기 싫다는 감정이다. 이것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권력이다. 누군가의 공공 공간에 설 자격 없음이라는 기회와 자원을 배제할 수 있는 권력이 있음을, 그 작동을 과시하는 것이다. 즉 싫다는 혐오의 감정은 이렇듯 부정의를 생산하고, 폭력의 형태를 띤다.
“누구나 정의를 추구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정의가 미치는 영역은 한계선이 있다.” -147쪽
실제로 사람들은 “자신이 소속된 도덕적 공동체의 경계를 따라 정의의 범위를 형성”한다고 한다. 즉 자기가 포함된 공동체의 정의만이 정당하며, 그 내부원들은 존중받아 마땅하다고, 반면에 외부집단은 적이거나 비인간화하고, 잔인하게 대해도 되는 대상으로 치부한다. 다시 말해 외부인을 부적격자로 도덕적 배제를 감행하는 것이다. 이렇게 누군가를 차별, 배제하고는 모두가 평등한 민주주의 세계가 실현된다고 하는 것은 이만저만한 착각이 아닐 것이다. 어떻게 자기와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과 집단을 배제하고서는 도덕성을 주장할 수 있다는 말인지. 금번 서부지방법원을 파괴하고 탈취하며, 경찰에 중상을 입히는 등의 폭력을 행사한 폭도들의 행위는 아마 이에 대한 또 다른 실례가 될 것이다.
5. 맺는 말 - 익숙한 질서 너머의 세계를 상상한다는 것
이같은 집단적 행위에만 이러한 경계의 차별과 폭력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현대판 노예’로 불리는 “주인이 필요로 하는 노동력을 제공하고 흔적 없이 소멸해야 하는 사람들”은 물리적으로 사회 안에 있지만 동등한 권리와 사회적 관계를 가진 구성원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노동의 필요성 때문에 울타리 안에 존속하지만, 인간으로의 권리를 잃고 추방되는 존재들 - 성소수자, 경비원, 미화원, 콜 센터 직원, 많은 소매판매직 종사원, 택배원, 비정규직의 물품 분류 등 육체노동자들, 이주 노동자들 등 - 이 무수하다. 정상, 주류 등 누군가를 배제하기 위한 이 끔찍한 단어들은 공동체 구성원의 평등성을 부인하고, 자신과 다름을 곧 차별하고 자격을 박탈해 내칠 수 있음, 즉 보이지 않는 존재로 만들 수 있음을 내포하는 잔인한 단어일 것이다. 공공의 자리에 설 수 있음, 공공의 공간에 입장할 자격 있음이라는 공공은 과연 무얼 의미하는 것인가?
주류와 정상이라는 닫힌 시선에 의하면 공공(公共)은 다수(多數)로서의 권력이다. 약자와 소수에게는 제한을 가할 수 있다는 만능의 논리로 둔갑하여 대규모 인권 탄압을 버젓이 자행한다. 대(大)를 위해 소(小)는 희생되어야 한다는 것, 개인의 권리는 양보되어야 한다는 이 논리에는 권위에 순응해라, 그렇지 않으면 박탈과 차별과 배제만이 있을 것이라는 협박의 다름 아니다. 다만 나는 저자가 기술하고 있는 ‘공정세계 가설’에 입각한 시민불복종, 즉 “법이나 정부 정책에 변혁을 가져올 목적으로 행해지는 공공적이고 비폭력적이며 양심적인, 그러나 현행법에 반하는 정치적 행위”로서, 심각한 부정의로 고통 받는 사람들은 복종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에 온전히 동의하지 못한다.
물론 이러한 행위가 그 어떠한 “합법적 수단으로도 효과가 없으며, 소수자의 의제에 다수자들이 무관심과 변화에 의지가 없을 때 하는 불가피한 절실한 최후의 말 걸기 형태”임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헨리 D.소로나 존 롤스가 말하던 시대와는 법의 안정성 토대가 달라졌다는 것이다. 즉 법치주의라는 오늘날 민주주의 근간을 훼손하면서 그 어떤 개인이나 집단의 주장도 정당화될 수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결국 아무리 비폭력이라 하지만, 이미 그것은 폭력성의 하나이며, 폭력을 수단으로 주장으로 하는 변화는 오히려 사회적 퇴행과 파괴일 뿐이지 않은가? (법의 판단을 부정하며 국가기관을 폭력으로 점거, 파괴한 작금의 법초월적 행태를 보라.)
인류 역사 속에서 변화와 개선은 매우 느리게 진행되었지만, 오늘의 세계는 그 도덕성의 진전만큼 조금은 빨라졌다. 우리는 인내 속에서 부단히 설득하고 요청하는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그렇다고 세상의 불의와 부정을 보고서도 마치 세상은 공명정대하니 수정할 수 없다고 하며, 문제 제기(提起) 자를 비난하고 상황을 왜곡하는 기득권 집단에 순응하자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무리들이 상시적으로 악용하는 부정의와 부당함을 외치는 사람들의 흠을 찾고 이들에게 의심을 비난의 화살을 돌리는 행태를 모르지 않는다.
사실 이 책의 의도가 바로 이러한 자각과 자기 성찰을 통해 자신도 알지 못하게 숨어있는 차별과 고정관념에 의한 편견, 폭력성을 깨닫도록 이끄는 것 아닌가? 우리들의 도덕성, 윤리의식이 익숙한 발언이나 행동, 제도가 차별일 수 있음을 자각하는 것 말이다. 결국 “익숙한 질서 너머의 세상을 상상 할 수 있는” 반성적 사고 능력, 감성적 직관에 머물지 않고 이성을 가진 존재로서 “낯선 것을 품을 수 있는 여유로운 관계와 마음”을 갖는 것 아니겠는가. 우리들 모두의 인식만큼만 이 세계는 변화할 수 있으며, 우리와 그들이라는 구분의 범주에 은폐된 욕망을 탈피할 수 있는 것일지 모르겠다.
독자인 나 또한 저자의 의지와 같이 “여전히 차별을 잘 안다고 말할 수 없음”에 공감한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나를 둘러싼 세상을 자각하고 나 자신을 성찰하며 평등을 찾아가는 이 과정이 나는 차별을 하지 않는다는 헛된 믿음보다 훨씬 값진 것”이라는 선언적 다짐에 절대적인 동의와 존경을 보낸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과 함께 저자 김지혜 교수의 이 항구적 노력을 실천하는 세상이 되기를 기대해본다. 아마 그러하다면 ‘우리들’의 세계는 더 이상 ‘그들’이라는 배제와 외면의 대상으로 타자를 말하지 않는 평등의 장소가 될 것이라 믿는다. 그 어느 때보다 시절의 중요한 통찰과 문제적 고찰이다. 모든 국민이 이 책의 독자가 되었으면 하는 욕심과 홍보맨이 기꺼이 되고 싶은 저술이다. 아마 나 역시 선량한 차별주의자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다만, 내 언어와 태도와 행동이 타자의 시선에서 보아야 함을 적어도 잊지는 않을 것이라 다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