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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의식
  • 군주론
  • 니콜로 마키아벨리
  • 15,300원 (10%850)
  • 2023-08-14
  • : 759

이 책이 다시금 소환되는 까닭은 바로 지금 한국사회가 처한, ‘위기가 일상화된 비상한 시기에 대응하는 정치론’으로 써진 책이라는 이유일 것이다. 그럼에도 이 책이 오늘의 민주주의 정치사회에서 수용될 수 있는 것은 극히 소수의 문장일 것이고, 다만, 최초의 사실주의 정치 행동론의 저술이라는 점에서 반면교사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군주론』은 단지 절대적 전제군주의 치국과 치정을 위한 책략과 자질(태도)을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나는 해석한다. 다만, 그것은 제15장 「사람들, 그 가운데서도 특히 군주가 칭찬 또는 비난받는 일들에 관하여」에서 거듭 강조하듯, “사변적 상상력보다는 사물에 실효적 진실을 추구하는 것이 훨씬 더 적절한 일”이라며, 군주론은 정치적 행동주의로서 군주의 행동 방향을 말하는 것이지, 군주이외의 정치권력을 상정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군주론이 집필된 피렌체를 비롯한 이탈리아가 이전투구(泥田鬪狗)의 혼돈과 약육강식의 시대였음을 새삼스레 설명하는 것은 진부할 정도이니 여기서 서술하는 것은 생략한다.

 

상호 먹고 먹히는 침략과 병합의 반복을 지속하는 이탈리아의 분열상을 끝내고 통일된 강대국의 건설을 위한 절대군주의 한 정형적 모델을 제시하고자 했던 것이다. 따라서 군주론은 오직 이 소임을 달성하고 유지하기 위한 강력한 절대군주의 비르투(virtu ;자질, 역량)의 서술이다. 이 자질이 수행됨에 있어 그 배경이나 수단에 있어 “백성의 호감은 음모에 대한 안전책”이라던가, “군주에게 가장 훌륭한 요새는 백성이다. 훌륭한 요새는 백성에게 미움을 받지 않는 것”과 같이 민의 기반을 말하는 것은 오직 군주의 통치 안정과 유지를 위한 여러 요소 중 하나일 뿐이다. 이것을 공화주의 토대니 민주주의의 토대니 하는 것은 책의 의도가 아닌 후대의 자의적 해석일 뿐이다.

 

따라서 이 책은 통치 권력의 쟁취와 그 유지술책이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아마 이 책의 가치를 구태여 논한다면 도덕적 혹은 종교적 이상주의의 낡은 정치적 관념을 벗어나 정치적 사실주의에 기초한 최초의 경험주의적 정치의 장을 열었다는 점일 것이다. 정치를 도덕적 규범이나 종교의 세속적 실천 규칙으로 접근하면 할수록 정치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멀어지고 정치의 타락은 심화되기 때문이다. 도덕적, 종교적 담론이 자기 이익추구의 인간 욕구를 배제하게 됨으로써 오히려 공공선을 의무로 해야 하는 자들에게서 도덕적 종교적 의무감으로부터 이탈하게 하기 때문이다. 정치를 허울 좋은 이상주의 장막으로 가리고 그 뒤에서 얼마나 잔혹하고 탐욕스러운 추악함이 요동치는가. 마키아벨리는 그 장막 이면을 드러내놓음으로써 현실 정치의 효능을 갖는 진짜배기 정치윤리를 찾으려 한 것이다. 즉 군주론은 부정성(否定性)의 반성적 측면으로 독해함으로써 오늘의 이해를 지니게 될 것이다.

 

이러한 견지에서 읽어야 할 곳으로 제 7장 「타인의 군대와 행운으로 얻은 신생 공화국」에서 군주론의 절대군주 모델이 된 교황 알렉산드르 6세의 서자로서 로마냐 공국의 군주가 되었던 체사레 보르자(발렌티노 공작)의 기만술 사례다. 점령지 로마냐 지방에서 저항과 반란의 목소리가 빈번해지자 심복인 레미로 데 오르코에게 전권을 위임하여 파견한다. 레미로가 잔혹한 조치의 수행으로 평정하자, 그 잔인성은 체사레 보르자 자신과는 무관한 오직 그 자의 성품 탓이라고, 그를 참살하여 두 토막 내 광장에 놓아둠으로써 비난이 자신에게 향하지 못하게 한 일화다. 악역으로 이용하고 죽음으로 내치는 것인데, 한국의 작금의 상황에서 펼쳐지는 어제의 심복을 사살 명단에 넣은 것은 살아있는 실례(實例)라 할 것이다. 한 마디로 군주론은 엄청 나쁜 머리라도 이해 할 수 있는 책이라는 것이며, 나쁜 머리로 이해될 수 있는 책이기에 그 나쁨을 그대로 모방할 능력이외에는 없는 인간들 때문에 이 책은 불온하기 그지없는 책이라고도 하겠다.

 

마키아벨리는 유독 포르투나(fortuna ; 행운, 운명)와 비르투(virtu ; 용기, 자질, 역량, 야만성)의 적절한 조화와 더불어 비르투의 함양을 강조하고 있는데, 결국 포르투나는 인간 개체가 어쩔 수 없는 것이고, 그렇기에 비르투가 절대군주, 이를테면 오늘의 독재자에게 더없이 요구되는 역량이라 할 것이다. 마키아벨리가 권력 쟁취를 위한 모든 자질을 비르투라 하는 것은 아니다. 동료 시민을 죽이고, 배신하고, 신의 없이 무자비한 행위로 찬탈하는 것은 비르투가 아니라고 제 8장 「극악무도한 행위로 군주가 된 인물들」에서 시칠리아의 폭군 아가토클레스의 힘은 비르투가 아니라고 명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 이 사례의 기저로부터 마키아벨리 이전의 정치와 그의 정치술, 즉 근대적 정치론으로 나뉘는 ‘잘’하는 정치란 무엇인가라는 생각이 출현한 것일 테다. 그는 “폭력이 단번에 모두 실행되어 이후에 지속되지 않으며, 백성들에게 이익이 되는 수단으로 바뀔 경우”를 ‘잘하는 정치’라고 부르고, “폭력(잔혹한 행위)이 드물게 시행되다 점차 그 빈도가 증가하는 경우.”를 ‘잘 못하는(나쁜) 정치’라고 부르고 있다. 인민을 안심시키지 못하고 지속적으로 위협과 가혹행위를 저지르는 권력자는 권력을 유지하기 어렵다고 지적하는 것이다.

 

제 15장과 17장은 군주론 중에서도 악랄한 독재자(절대군주)의 행위를 정당화 하는 몇 장에 해당한다. 제15장 「사람들, 특히 군주가 칭송받거나 비난받는 행동들」 에는 “선하게 행동해야 한다고 고집하는 사람은 선하지 않은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곧 몰락할 것이다.” 라며, 자신을 보존하고자 한다면 상황에 따라 선하지 않게 행동하는 법을 필요에 따라 적절하게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면서 “악덕 없이 지위를 유지할 수 없다면, 그 악행으로 인해 나쁜 평판이 발생하는 것을 개의치 말아야 한다.”고, 절대군주의 지위 보신에 역점을 두고 있다. 오늘의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악덕이다. 주권의 소재가 인민에 있는 정치사회에서 가당치도 않은 자멸적 행태라 할 수 있다.

 


제 17장 「인자함과 잔인함, 두려움의 대상이 될 것인가」는 한 술 더 떠서 “백성의 결속과 충성을 바치도록 할 수 있다면 잔인하다는 비난을 걱정할 필요 없다. 소수의 몇 명을 가혹하게 처벌해서 질서를 잡는 것이 공동체 전체를 위해 자비로운 행위다.”라며, “인간은 본디 은혜를 모르고 변덕스럽고, 위선적이고 기만에 능하며, 비겁해서 위험을 피하려고만 하고, 이익에 눈이 어둡”기에, 걱정 요소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키아벨리의 인간 본성의 한계에 대한 인식이다. 이것은 한국의 특정 지역민의 선거투표 행태가 보여주는 자신들을 개, 돼지 취급해도 다시 자신들을 무시하는 인물을 위해 투표하는 행위가 여실히 마키아벨리의 손을 들어준다. 그러니 인간 오물에 불과한 잡놈이 1년만 지나면 저것들은 모두 잊어버린다는 망발(妄發)을 할 수 있는 것일 게다.

 

해서 마키아벨리는 이런 말이 가능했을 것이다. 가장 악명 높은 장으로 지목되는 제 18장 「약속을 지키는 법」에는 위대한 업적을 이룬 군주들은 신의를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오히려 기만을 통해 사람들을 혼란시키는 데 능숙했다며, 인간은 매우 단순하고 눈앞의 필요에 따라 쉽게 움직이기에, “능숙한 기만자이자 위선자가 될 수 있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마키아벨리가 살던 당대의 정치 감시체제는 오늘의 정치 사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폐쇄적이고 낙후된 것이었기에 가능한 말일 것이다. 물론 지금에도 폐쇄된 장막 안에서의 밀실 정치를 모두 헤아리는데 한계가 있으나. 그 정치적 행위가 표면화되는 순간, 엄청난 저항과 법의 세례를 마주해야 할 것이다.

 

이어서 “사람들은 겉모습과 결과에 현혹되기에 외양만 자비롭고 신의가 있으며 정직한 것처럼 보이면 된다.”고 주장한다. 오늘은 이러한 위선과 기만이 가려지는 시대가 아니다. 이 말을 오늘에 실천하려했던 머리 나쁘고 탐욕스러운 인간의 저 비겁한 작태를 보라. 제19장 「경멸과 미움을 피하는 법」에 이르면, “권력유지를 도와주는 집단이 부패했다면 그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그들이 좋아하는 방식을 따라야 한다. 군주의 선행은 오히려 군주에게 해로운 일이다.”고 부패에 합류하고, 그 부패를 막아서는 군주는 오히려 위험하다고 말하기까지 한다. 이것이 지금 파면을 앞둔 독재자를 지지하는 파렴치한 무리들의 작태이다. 보수란 이처럼 무엇인가의 근절을 막는 반동적이고 퇴행적 행태, 즉 마키아벨리가 인간의 본성이라 인식한 그 더러운 습속의 다름 아니다.

 

제 25장 「운명은 인간사에 얼마나 강력하고, 인간은 운명에 대하여...」에서는 급기야 “나쁜 짓을 하고도 벌을 면할 수 있다”는 생각이라는 군주론의 정치핵심이 드러난다. “필요할 때 주저 없이 사악해져라. 오로지 선만으로는 권력을 지킬 수 없다. 덕이 없어도 그것을 갖춘 것처럼 위장하라.”라고, 중요한 것은 오직 결과라고 선악의 잣대는 정치에서 부질없는 것임을 역설한다. 이것이 바로 세간에 회자되는 그 악명 높은 ‘마키아벨리즘’의 실체다. 이것은 마키아벨리가 시종일관 사용하는 개념어인 네체시타(necessita;불가피성)에 의존하는 경향이 많은데, 세상만사는 모두 인간 의지와 이성의 통제 밖에서 움직인다는 상황 대응론이다. 이것이 모순인 것은 포르투나에 제약 받음에도 비르투를 통해 극복하고 대응하여야 한다는, 책 속 무수한 성공 군주들의 사례와 상충하는 것이다.

 

막상 잔혹한 폭력성과 거짓, 기만, 위선을 행할 때면 상황론, 즉 네체시타라는 운명론을 들고 나오면서 그것을 정당화하는 것이다. 나의 독해와 반대 측에 선 정치론자들은 군주론은 선악을 초월한 정치 고유의 윤리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치 고유의 윤리란 것이 인간 사회의 보편적 도덕윤리와 별도로 존재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들의 대답은 대의를 위해 작은 의의는 희생될 수 있다는 논리를 편다. 나는 이러한 영웅주의적 대의 정당화 논리의 역겨움을 여러 지면에서 지적한 바 있다. 제국주의의 논리요, 서세동점의 논리이며, 강자의 논리이다.

 

이것에 적절한 응답이라면 제21장 「탁월한 존재로 여겨지려면 군주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서 발견되는 정치에서의 “어떤 국가든 항상 안전한 선택을 할 수 있다고 믿어서는 안 된다. 어떤 선택이든 꼭 필요한 것인지 의심해봐야 한다.”는 문장일 것이다. 정치에는 완벽하게 안전한 선택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그 선택은 허용되어서는 안 되는 것을 회피하는 것이어야 하며, 배제됨이 가장 작은 다수의 충족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원칙일 것이다. “악이 존재하는 세계에서 선하지 않을 수 있음을 배워야”하는 것만으로는 바른 정치가 설 수 없다. 폭력에 비폭력으로 대항 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어야 하고, 그 비폭력적 저항이 수용될 수 있는 사회만이 인민의 자유와 안전을 보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부 정치 이론가들은 말한다. 수단의 합리성만 다루는 정치론은 오늘의 정치에서 상상할 수 없는 것이라고. 헛소리! 이렇게 기만적인 소리들이 식자연(識者然)하며 이 나라를 어지럽히고 있다. 오늘의 정치는 그 어느 때보다 수단의 합리성, 법적 근거와 국민의 목소리라는 정당성에 기초해야 하는 것이지, 이 수단을 배제하고서는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실천적 결과주의는 지금과 같은 패덕(悖德)을 낳는다. 목적론적 초법적 행위는 언제나 민의 희생을 먹고 살기 때문이다. 이상적 정치를 향한 노력의 경주가 그치는 순간, 다시 말해 민주주의의 근간에 대한 경계의 감시를 게을리하는 순간 인간 사회는 다시금 저 퇴행적 야만의 세계로 회귀할 것이기에.

 

이 책은 그칠 줄 모르고 피바람을 몰고 오는 정치적 격변의 시기에 좌절하는 수많은 인민들의 갈망이 담겨있는 저술이다. 힘의 논리에 의해 수없이 반복되는 불안정한 생의 환경에서 절망하는 민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것이다. 통일된 이탈리아를 세울 강력한 군주의 출현을 위한 한 순간의 대의를 위한 참담한 제언으로 읽혀야 한다. 그래서 마키아벨리는 시종 인민(백성)의 시선을 그 권력의 토대로 삼고 있는 것일 게다. 그는 실효적 진실을 추구함으로써 정치의 그 생생한 민낯을 드러내어 권력의 한계를 인식시키고, 술책의 한계가 절로 떠오르게 한 것이다.

 

이러한 측면을 간과하고 특정 문장의 서술만을 꺼내 그것을 아전인수격으로 사용하는 것은 곧 독재자와 그 기생자들의 불의한 정당화 논리가 될 뿐이다. 이 책은 그야말로 세심하게 읽어야 하는 저술이다. 이것은 독재자를 위한 저술이다. 그러나 그 한계를 말한 것이고, 그 저변에 흐르는 정치 윤리적 토양은 민중주권과 시민참여의 정치다. 군주론으로 마키아벨리를 읽는 것으로 그쳐서는 이러한 그의 정치적 신념을 해독하지 못하는 것이다. 마키아벨리를 읽는다면 필히 공화정과 민주정을 말하는 그의 『로마사 론』을 읽음으로서 완성될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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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아벨리가 다른 곳에서 이미 말했다는 것은 그의 저술 『티투스 리비우스의 로마사 첫 10권에 대한 강론(Discorsi sopra la prima daca di Tito Livio)』이다. 국내 번역본으로는 『로마사 론』, 『로마사 논고』와 『마키아벨리 로마사 이야기』를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 이 글은 세 권의 국역본 군주론을 읽고 그 감상을 쓴 글이다. 주로 읽은 책은 후마니타스에서 출간한 박상훈 옮김, 최장집 해제의 『군주론』이고, 보조 읽기용 책으로 이시연 번역자의 더스트리 출간본이며, 이상두 선생 번역의 범우사 출간본은 내가 처음으로 읽었던 1975년의 번역판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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