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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의식

아이가 내게 책을 읽다가 이해할 수 없는 말이 있다고, 물어봐도 되겠냐고 한다. 하라고 했다. ‘도대체 말 할 수 없는 것을 말한다는 것이 어떤 상황이에요?’, 그리고 ‘그 불가능성을 말하는 데, 가능하지도 않은 것을 어떻게 (시도)한다는 말인가요?’라고 묻는다. 허, 쉬운 질문이 아니다. 그렇다고 설명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나 또한 수없이 이와 같거나 유사한 문장들을 접했었으니 말이다. 언뜻 칸트가 떠올랐지만, 그의 형이상학을 무턱대고 아이에게 들이민다면 더욱 난감하게 만들 공산이 컸다. 하지만 우리네 일상적 사고방식을 생각하면 그리 어려울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런데 이 물음에 답하다보니 몇몇 생각이 더불어 엉켜 떠올랐기에 몇 글자 적어두기로 했다.

 

1.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한다는 것

 

왜 말 할 수 없는 것을 기어이 말하려는 것일까? 그저 할 수 없다면 안 하면 되는 것이지, 이것이 왜 문제가 될까. 우선 말 할 수 없는 상황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을 것 같다. 첫째는 존재하지만 자신의 정신(지성)의 범위 내에 존재하지 않아 생각할 수 없으며, 따라서 말 할 수 없는 경우다. 아이가 질문 하듯 그 문자적 내용의 이해 같은 것 말이다. 그리고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관심이 없어서거나, 회피하거나 배제해버려 알지 못해 말 할 수 없는 경우도 포함될 수 있겠다. 이러한 경우는 너무도 다양하게 많아 열거하는 것이 불가능할 것이다. 둘째는 인간의 인식 범주를 뛰어넘은 것, 이를테면 종교에서 말하는 궁극의 진리(혹은 지극한 도)이거나, 가톨릭 등 유일신 종교의 신의 존재에 대한 것과 같이 말 할 수 없는 것들이다. 이들 경우에 따라 그 말 할 수 없음의 의미는 달리 표현 될 것이다.

 

첫 번째의 경우는 보고 듣고 이해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일종의 자기 앎, 자기 정신에 의한 해석으로서 지평(地平), 즉 자신의 정신적 시야가 작동하는 범주를 초과하는 낯설고 모르는 것에 대한 문제다. 이것은 철학이나 여타 종교적 언어에서 초월적(超越的, transcendent) 혹은 *내재적(內在的)이라는 표현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예수나 성자, 부처를 접하는 경험과 같은 신성한 체험을 한 사람들이 말하는 자신의 감각에 나타난 성스러운 감각을 초월적 경험이라 말하는 것과 같이 자신의 감각이나 정신을 넘어 다가오는 경험이다.

 

이를 자기 지평 밖의 세계, 자신의 정신 너머의 세계에 대한 체험이어서 초월적이라 말하지만, 이미 자신이 알고 있는 그 어떤 존재나 양태와의 만남이라는 점에서, 결국 평소 자신이 알지 못했던 것에 대한 마주함을 자신의 지평 안에 있는 것으로 의미를 부여하고 해석한 것에 불과할 것이다. 익숙한 지평 안에 끼워 맞춘 것이다. 따라서 초월적이라는 마치 지평 밖으로 자신의 정신 너머의 체험처럼 보이지만 자신이 아는 범주, 즉 자신을 둘러싼 시선이 가닿고 의지하는 생각으로 이해한 것 이상이 아니다. 이 말은 결국 내재적 인식의 범위, 근본적으로 자기 지평을 넘어서지 못한 것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반면에 두 번째 말 할 수 없는 경우는 낯설고 전혀 알지 못하는 지평 밖의 마주함으로 그 어떤 생각도 할 수 없어 의문을 그대로 끌어안고 가는 물음만이 있는 경험이다. 이것이 초험적(超驗的, transcendental) 경험(인식)이다. 지평의 진정한 넘어섬, “자신을 넘어선 것을 넘어선 그 자체로 대면하는 인간 인식의 넘어섬(이진경 著, 『예술, 존재에 휘말리다』에서)”이다. 그 낯설고 당혹스러움을 그대로 껴안고 그것에 물음을 제기하며 자신이 지닌 지평 밖으로 나아가는 처절한 고투의 체험이다. 이 초험적(선험적) 경험으로서 넘어섬은 결코 쉽사리 가능한 접근이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러한 세계를 상상하고, 그에 대한 자기 아집이라는 세계의 협소함을 벗어나기 위한 노력을 경주해 볼 수는 있을 것이다. 그래야만 자기 지평에서 배제된 이 세계의 수많은 존재자들과 양태들의 그 이질적이고 생경함과 함께 할 수 있을 것이니 말이다.

 

우리는 아주 빈번하게 지평 밖의 세계를 자신들이 아는 범주, 지평 안의 의미로 해석하려 드는 많은 사람들의 오류를 접하곤 한다. 자기 앎의 언어로 말하려보니 말 할 수 없는 것에 대한 표현이 궁색하거나 편벽됨을 면치 못하게 되고, 지평 밖의 진정한 의미는 여전히 배제되고 만다. 이것이 내재성, 또는 소위 초월적 인식의 한계다. 말 할 수 없는 것을 말하려는 것은 이처럼 내재성(초월성)과 선험성(초험성)에 따라 그 시선은 극명하게 다르다. 아전인수격 이해와 모름에 대한 인정에서 출발하는 적극적 접근을 통한 참된 본질을 향한 길은 이 세계에 확연히 다른 질서와 체계, 삶의 질을 만들어낸다. 갈라치기, 양극화, 온난화로 인한 기후변화, 등등 인간과 비인간 모두의 공존을 위협하는 내재성(초월성)의 인식은 지양(止揚)되어야 할, 진정 말 되지 말아야 할 말이 출현하는 데 있다. 말 할 수 없는 것을 말하여야 하는 것은 오히려 초험성(선험성)의 그 곤혹스런 표현 불가능한 지대의 무엇이다. 그것이 진정 ‘말 할 수 없는 말’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 되어야 하는 것이다.

 

2. *트라시마코스와 필라테스의 짧은 대화

 

내재적 경험(인식)과 선험적 경험(인식)은 자기 앎의 인식 한계에 대한 문제이고, 지평(地平) 넘어서 출현하는 문제이다. 쇼펜하우어는 이 문제를 그리스 두 철학자의 짧은 대화로 소개하고 있는데, 바로 고질적인 사후세계의 물음, 인간의 참된 본질이 죽음에 의해 파괴되는 것인지 여부에 관한 담론이다. 그 핵심 물음과 답변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트라시마코스: 내가 죽고 나면 나는 어떻게 되는지 분명하고도 간단히 말해 보게.

  필라테스: 모든 것이 되기도 하고 무(無)가 되기도 한다네. 」


트라시마코스는 필라테스의 대답을 낡은 계략이라고, 모순투성이의 뻔한 말이라고 비아냥대지만 필라테스는 트라시마코스의 물음이 이미 초험성(선험성)을 담고 있어, 내재성, 즉 인간 인식을 위해 창조된 언어로는 이렇게 표현하는 외에는 말 할 수 없는 것이라고 대응한다. 그러고는 선험성과 내재성을 설명하는데, “선험적이란 경험의 모든 가능성을 넘어서서 그 자체로 존재하는 사물의 본질을 규정하려 애쓰는 인식이고, 내재적이란 경험의 가능성을 벗어나지 않으므로, 오직 현상에 대해서만 말 할 수 있는 인식”이라고 말한다.

 

그러니 필라테스는 트라시마코스의 물음을 각기 선험적 인식과 내재적 인식에 따른 표현 가능한 말을 하려고 애쓴 것이고, 그 답변은 무한한 것과 무(無)라는 마치 극단의 표현처럼 여겨지는 말만이 가능했던 것일 게다. 우선 내재적 인식의 지평에서 죽음을 생각하면, 우리 인간의 육체라는 개체성은 죽음과 함께 끝난다. 즉 무로 소멸한다. 반면에 선험적 인식으로 죽음을 이해하려하면 개체란 궁극의 본질이 아닌 질료의 임시적 형태이고, 본질의 시간적 발현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죽음은 시작도 끝도 없는 무한이라는 전체로의 회귀다.

 

한 존재자의 죽음이 사실 무도 되고 무한도 된다는 것은 이만저만 모순이 아니다. 그런데, 이 모순을 말하는 인식은 인간의 내재적 인식이라는 지평 안으로 끌고 들어가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지, 그것을 초험성의 영역으로 데려가면 그저 말 할 수 없는 모든 것이라는 말 이외에는 형용할 언어가 없는 것이다. 어쩌면 이 선험성의 표현 불가능한 양태를 어떻게든 말하려하면 그 말의 논리 속에는 심연이 존재한다. 이것은 우리들 말의 궁지(窮地) 탓이다.

 

대승불교의 사상체계를 정립한 인도의 고승(高僧) 나가르주나(龍樹,150~?)는 “어떤 것에 대해서도 본성이 없이 공(空)하다.”고 궁극의 진리, 지극한 도를 말했다. 그런데 모든 것이 공하다고 말했으니 이 문장 자체도 공한, 의미 없는 것이 되고 만다. 궁극의 진리를 말로 표현하다보니 궁지에 이른 것이다. 문장이 말한 바가 자신에게 돌아와 작용되는 것을 ‘자기 언급’이라고 한다. 자기 언급을 통해 스스로가 부정되는 역설이 발생하는 것이다. 서구의 철학에도 거짓말의 역설이라는 유사한 사유가 있다. 무언가 우리의 인식 너머를 말하려 할 때면 우리는 이러한 궁지에 이르기 일쑤다. 이것이 바로 말 할 수 없는 것의 말하기의 불가능성이다. 여기에는 말 할 수 없는 존재에 대한 커다란 심연이 있다. 이 심연을 우리는 말하려 애쓰는 것이다. 자신을 무력화하는 피할 수 없는 역설이 우리들의 말에는 있다.

 

3. 맺는 말


여기서 우리들이 알아차려야 할 것은 이 피할 수 역설 속에 자리 잡고 있는 그 어둠이다. 그 어둠의 지대에 있는 존재를 말해야 우리는 그나마 우리들의 지평 밖에 있는 것을 끌어안을 수 있다. 비록 명료한 언어가 되지 못했지만, 그럼으로써 우리는 그 불명확하고 알지 못하는 것에 접근 할 수 있다. 유발 하라리가 『넥서스』에서 지적하는 인류가 그 엄청난 지식의 축적을 으스대면서도 전혀 지혜는 축적시키지 못했음을 탄식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자신들의 지평 안으로 지평 밖의 낯섦을 들여와 그 알량한 인식의 범주에서 자의적으로 해석하려는 익숙한 습성 때문이다.


아마 이 지평의 경계라는 분별심에 의해 나누고 구분해서 판단하려는 마음에서 떠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본래 세계란 지평 안과 밖이라는 그 어떤 간극이나 위계란 것이 없다. 자기 안의 앎의 세계와 외부로 가르면 말 할 수 없는 것이 무진장하게 늘어날 것이다. 이것을 눈가림하기 위해 좁아터진 자기의 언어로 말하다보면 그것은 거짓과 기만, 무지의 언어가 되고, 세계의 진실과는 점점 멀어질 것이다. 어쩌면 작금의 한국 정치사회에서 펼쳐지는 이 혼돈의 상황도 이 지평의 문제요, 선험적 인식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되는 것일 게다. 아이의 당연한 의문이 여기까지 왔다. 말 할 수 없는 말을 한다는 것, 그 불가능에도 불구하고 말하려는 것은 아마 이러한 것이지 않을까. (終)

 















*내재적 경험(인식): 이 표현은 쇼펜하우어의 표현으로 그는 인식(경험)을 내재적, 선험적으로 분류하고 이 둘을 초월성의 두 범주로 설명하고 있다. - 쇼펜하우어의 논문, 「우리의 참된 본질은 죽음에 의해 파괴되지 않는다는 것에 관한 이론」 8절 ‘트라시마코스와 필라테스의 짧은 대화’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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