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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의식
  • 다정의 온도
  • 정다연
  • 15,120원 (10%840)
  • 2024-11-20
  • : 1,335


“바라건대 나는 우리가 스스로에게 좀 더 다정해 질 수 있으면 좋겠다.

이 책의 단 한 줄이라도 그 일에 요긴하게 쓰인다면 바랄 것이 없겠다.”

- 10쪽, 시작하며 「다정의 온도」에서

 

【정다연 시인의 그림 9쪽, 책속에는 시인이 그린 10점의 작은 그림이 수록되어있다】 


시인은 위의 인용 문장처럼 ‘스스로에게 다정해 질 수’ 있다면 바랄 것이 없다고 쓰고 있다. ‘다정’이란 단어에 대해 내가 품고 있는 의미란 정(情)의 오고 감에 있어 따뜻하고 애틋한 감정이 전달되는, 해서 어떤 배려가 내재된 평온과 안전의 느낌이다. 물론 이 단어에 대해 느끼는 정서는 조금씩 차이가 있겠지만 아마도 유별나게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을 것 같다. 이 감정의 언어가 사용될 때는 대개 타자가 내게 주는 정서이지만, 시인은 ‘스스로에게’라면 좋겠다고 말하고 있다. 아마 스스로에게라는 다정의 어떤 방향성을 지시하는 말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동묘시장에서 구입한 원형의 갈색 얼룩을 지닌 가을 외투나, 답십리 고미술 상가에서 마모된 모서리의 액자를 지닌 그림 한 점을 구입하며 “사람과 사물, 시간이 함께 부딪히며 만들어 낸 오묘함”을 말하는 첫 번째 에세이 「빈티지」에서부터, 유년의 장소로 거슬러가 “잃어버리기 쉬운 무용한 감각들의 기억들에 작은 불씨를 지펴 사물 자체에 호기심을 가지고 그 안에서 기쁨을 발견하는 순간”을 그린 「계수나무」와, 「얼굴 생각」이나 「분갈이」등 사물과 식물 등 비인간과 인간의 얽힘을 상상하는 것, 그리고 마지막 에세이인 「같이 살자는 마음」에 이르기까지 나와 너의 어울림이라는 조응(照應), 즉 서로 비춤의 글들과 같이 다정함이란 주의 깊게 듣고 세밀하게 바라보는 그들과의 교감이다. 다정함의 방향성이란 애초에 존재한 적이 없는 것, 서로 혼효적으로, 얽혀드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시인은 사람, 사물, 식물, 동물을 막론하여 그들의 시간과 삶의 역사를 세심하게, 그리고 보이지 않지만 그 자체로 충만한 그들 너머의 세계를 읽고 상상해 낸다. 한동안 살았던 곳이 중림동 어느 곳이었던 모양이다. 제법 큰 나무 장이 있어 함께 생활하던 ‘밤이’가 좋아하던 공간이기도 했으며, 그녀가 남몰래 울었던 장소이기도 했던 낡은 나무 장에 얽힌 얘기이다. 이사를 하게 되면서 나무 장과도 이별하게 되었는데, 그 장을 한 번 열어 보고 싶은 마음을 그린다. 시인의 일부, 그 손과 숨결, 그리고 사연을 지켜보았던 사물에 대한 뗄 수 없는 연결을 보게 되는 것인데, 이처럼 사물을 매개로 하여 가닿는 사람과 장면, 시간과 장소의 연결은 「얼굴 생각」이라는 에세이에서 책상 위 글이 써지기를 기다리는 백지로부터 시작되기도 한다.

 

이것은 다시 백지 위의 써지는 글을 통해 누군가라는 사람, 사연, 장소에 도달한다. 나는 이러한 장면의 글들에 살짝 매료되기 시작했는데, 시인은 그 무엇으로부터도 듣고 보고, 그 무엇의 너머를 상상하고자 하는 마음의 목소리를 지녔구나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특히 에세이 「분갈이」는 작은 화분을 뒤늦게 분갈이 하게 되면서 그 작은 터전에서 부단히 뻗어 갈 곳을 찾았을 “식물 뿌리의 어둠속 막막함”을 생각하며, 마침내 늦은 분갈이가 식물이 서서히 쇠약해질 수 있음을 알게 된 시인의 삶의 현실과 존재자의 가까운 이야기로 이어지는 일련의 사유작용, 바로 그것일 게다. 나와 타자, 과거를 인식하고 현재의 조건과 섬세하게 조응하며 미래의 가능성에 유연하게 열려 있는 삶을 살아가는 시인의 세계, 그녀가 만나는 말의 근원을 발견한 것만 같은 기쁨을 느끼기도 했다.

 


이 과거의 인식과 현재의 조건들이 조응하는 그 열려진 세계는 사용하지 않는 메일계정 속 옛 편지를 통해서, 그리고 “하나의 미래를 열기 위해서 버려야 했던 엄마의 무수한 미래를 가늠하게 하는” 보석함으로, 시간 속에서 희미하게 지워질 기억들의 불씨를 되살려 놓는다. 시인에게 이들 물성은 그저 생명 없는 대상으로서의 사물이 아니라 수많은 기억들과 시간을 품고 무언의 대화를 건네는 존재로 여겨진다. 이러한 인식은 「내 글은 공룡」에 등장하는 설치 미술가 김범의 “실제로 나무 위에 돌을 얹어 둔” 〈자신을 새라고 배운 돌〉이라는 작품처럼 돌은 단지 인간에게 도구로서의 돌이 아님을 생각하는 장면에서도 드러난다. 아마 시인의 삶의 시선은 오늘날의 사람들이 배제한 좁은 인식의 세계를 넘어 무한대로 확장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한다.

 

「몸의 용도」는 시인의 무릎을 계단으로 또는 베개로 생각하는 반려견 ‘밤이’의 무게를 온전히 느끼는 인간과 비인간 존재의 얽힘이 주는 세상의 새로운 만남을 생각게 한다. “사랑은 한 존재의 몸을 창의적 뒤바꾸고 기꺼이 사용하게 만들며, 그로 말미암아 세상과 새롭게 만나게 한다.”는 시인의 목소리 바로 그것일 게다. 시인이 지금 함께 하는 존재는 비인간 밤이, 그리고 인간 윤주로 여겨진다. 밤이는 시인이 시집 『서로에게 기대서 끝까지』를 헌정한 존재다. “인간을 사랑해 준 (...) 밤이에게 이 책을 바칩니다.”라는 그 존재와 함께하는 시인의 일상을 알게 된 것, 그리고 시인의 가장 다정한 사람 동료 윤주, 잠깐 함께 살았던 엄마와의 생활 속 갈등과 사랑의 이야기들이 먼 추억처럼 내게도 이입되어 오기도 했다.

 

그래 시인의 글들은 조금 더 껴안아 주는 이야기들이다. 그럼에도 가장 소홀히 하는 우리들 자신, “가장 안아주기 어려운 자신의 모습부터 껴안아”주고자 하는 이야기다. 그것은 이 세계의 모든 타자들과 우리는 서로 얽혀 살아가는 존재임을 이해하는 것일 게다. 「같이 살자는 마음」에서 시인이 하는 말이 이를 정리하는 맞춤의 말이기도 할 것 같다. “한 사람이 건강하게 살기 위해선 얼마나 많은 돌봄이 필요한지, 아무도 없다고 생각한 순간에도 타인에게 어떤 도움을 받으며 살아왔는지를 절감하면서 말이다.” 다정은 바로 이처럼 타자의 많은 손길과 보이지 않는 숨결이 건네는 사랑의 밀어의 다른 이름인 것만 같다. 따뜻함과 애틋함이 푸근한 정감의 언어들로 채워진 아름다운 사랑의 기록이며 일상의 소중함을 다시금 깨우치게 하는 전언이다. 이제 호감과 믿음을 혼동하지 말라는 시인의 조언을 기억하며, 책속 글들을 통한 시인과의 만남을 좋은 기억으로 남겨 놓는다.

 

“이 시를 읽으면 콩 한 알에서도 자유를 읽어내는 눈을 가질 수 있어요. (...) 마지막 문장까지 따라 읽으면 기억에서 깨끗이 지워지는 평범한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 수 있어요.”  - 「시 창작 교실」, 84쪽에서


 

이 감상글은 '현대문학'으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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