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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철도원 삼대
  • 황석영
  • 18,000원 (10%1,000)
  • 2020-06-01
  • : 33,713

왜 일제 식민 치하의 항일 운동은 사회주의 강령에 의존해야 했는가?


이 작품과 관련하여 조금은 뜬금없는 그러나 관련성은 부정할 수 없는 한국사회의 부패이야기로 시작해야겠다. 미국의 뉴(new)아이비리그 25개 대학의 하나로 정치분야의 석학과 주요 정치리더를 배출하는 콜 게이트대학 정치학 교수인 ‘마이클 존스턴(Michael Johnston)’은 그의 유명저술인 『Syndromes of corruption(부패의 증후군)』에서 ‘한국의 독특한 부패’를 지적하고 있다.

 

“한국 부패 유형은 매우 흥미롭다. 엘리트 카르텔 유형이다. 많이 배운 놈들이 조직적으로 뭉쳐, 국민을 등쳐먹는다.“ 라고.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수치심을 느끼게 된다. 물론 이 지적이 한국사회의 부패 근인을 모두 아우르는 분석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상당부분 적확한 통찰임을 부인하기 어려운 발언이다. 이방인이 쓴 이 아픈 지적으로 소설의 감상을 시작하는 이유는 이제 국민의 대다수가 노동자인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 그 노동자들의 삶의 뿌리를 차근히 들춰보는 100여년의 서사 속에서 똬리를 틀고 앉게 되는 그 부정한 부패의 기원을 보게 되는 까닭이다.

 

우리는 아주 빈번하게 새로이 선출된 권력들이 부패와의 싸움을 주요 정책으로 내걸었지만 흐지부지 되고 만 것을 알고 있다. 마이클 존스턴 교수가 지적하듯 부패가 단지 어느 특정 시기에 발생한 일시적이거나 국부(局部)적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한국사회의 유별나게 파렴치한 부패양상인 ‘배운 놈들이 조직적으로 뭉쳐 국민을 등쳐먹는’, 다시 말해 매우 구조적이고 오랜 시간의 네트워크로 다져진 부패 형상이기에 몇 년에 걸친 특단의 조치로 해결될 것이 아니라는 점이기에 그렇다.

 

바로 지금 한국민들이 체감하는 경제성장 저하, 정치적 불안정, 사회적 불신의 심화와 국제사회에서의 부정적 이미지 증가로 인한 외국인 투자 감소와 경제 손실 유발과 같은 심각한 영향의 근본 원인이 바로 이 고질적으로 고착된 기형적 부패 양상인 ‘엘리트형 카르텔’의 심화에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매우 장기적으로 국가의 건강성과 안정성에 결정적 타격을 가하기에 단순하고 일시적인 법률적 처단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데 그 문제가 있다. 즉 국가적 우선 과제로 다루어져야 하는 것이지 여러 정책 과제의 여느 하나로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만큼 한국사회는 조직적이고 구조적으로 썩어있다는 말이다.

 

 

■ 소설 『철도원 삼대』 - 일제 유산으로서의 한국사회의 부패 고리

 

"혹한의 겨울밤에도 저 굴뚝 아래 아파트와 건물 빌딩들의 빛나는 창문들과 

강변 도로 위를 끊임없이 흘러가는 매끈하고 날렵한 자동차의 헤드라이트

 물결을 볼 때마다 세상은 언제나 그냥 무심하다는 걸 실감한다."  -412쪽


소설은 분할매각을 통해 회사를 해외에 팔아버리고는 시침 뚝 떼고 공장을 폐쇄시킨 상황에서 노동자들을 해고한 파렴치한 자본가를 향해 부당한 해고와 복직을 요구하는 한 노동자의 45미터 굴뚝 위의 농성 장면으로 시작된다. 이 농성은 사백일하고도 열흘 만에 자본가와 기만적인 타협을 이루어내고 내려오는 것으로 끝나지만, 말뿐인 복직으로 돌아 온 공장 현장에는 아무런 기계설비도 없는 텅 빈 장소이다. 해고 노동자들의 외로운 투쟁의 결과는 아무것도 없는 버려짐인 것이다.

 

결국 이 소설은 농성 행위 그 자체가 아니라 농성자인 ‘이진오’라는 인물의 증조부에서 조부와 아버지, 그리고 그 자신으로 이어지는 이 땅 노동자의 역사를 쫓는 것이고, 그 노동자들의 생존을 위한 투쟁을 에워싼 참혹하기만 했던 시대적 상황이란 것이 과연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그들이 오늘에까지 싸워야하는 권력의 실체란 것이 어떻게 변천했는지를 개관하는 것이 될 것이다. 식민지 조선에서 일제의 지독하고 줄기찬 식민지민에 대한 차별과 탄압, 그칠 줄 모르는 폭력과 죽음 앞에서 그들이 무얼 할 수 있었으며, 그 무엇을 행동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였는지를 보도록 한다.

 

본질은 이러한 것일 게다. 국가의 정체성은 물론 역사마저 부정하는 이 땅의 엘리트형 카르텔이라 지칭되는 기득권 집단은 식민 치하에서 독립 운동을 펼쳤던 민족해방 투사들을 빨갱이라며 그 의로움을 부정하고 나라를 팔아먹거나 자기 이익만을 위해 동족을 배반하고 적극적으로 일제 부역자 노릇을 하던 자들을 애국자라 옹호하는 기괴한 짓들을 벌이고 있다. 작가의 말에서 언급되듯 “조선의 항일운동은 너무도 당연하게 사회주의가 기본 이념의 출발점”이 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다.

 

해방 이후 생존권 투쟁에 나선 노동자들은 이러한 연속선상에서 손쉽게 빨갱이로 매도되곤 했으며, 전쟁이후에는 또 냉전체제라는 지정학적 상황을 이용하여 노동 운동은 다시금 빨갱이 짓거리가 되었다. 결국 노동자가 인간다운 삶의 조건을 요구하게 되면 곧 빨갱이 짓이요, 종북 세력이라는 괴이한 낙인을 찍어 권력과 결탁된 자본은 수월한 부패욕구를 지속할 수 있었음을 추적할 수 있게 된다. 제아무리 기술이 뛰어나도 조선인은 철도공작창의 최하위 작업자를 벗어날 수 없었던 시절 이진오의 증조부인 ‘이백만’은 성실성이라는 저항없는 순응성으로 고원(雇員)이라는 뜨내기 직을 이어나간다. 아내 주안댁은 남편 이백만의 생활비도 안 되는 임금을 보충하기 위해 시장을 누비며 억척스럽게 살림을 꾸려나가지만 급작스럽게 생을 마감한다.(소설은 먹은 것이 체해 죽은 것처럼 묘사하고 있지만 아마 심장마비였을 것이다.)

 


이백만은 슬하에 아들 일철(一鐵, 한쇠)과 이철(二鐵, 두쇠)을 두고, 일철은 철도원양성소를 졸업하여 일본인이 독식하던 기관사가 되는 어려운 길을 걷는다. 이철은 아버지 이백만과 같이 철도공작소의 말단 공원(工員)이 되지만 노동쟁의에 가담했다는 이류로 해고되어 방직공장 임시기술직으로 들어가 자본에 의해 저질러지는 노동착취와 차별적 대우에 조직적인 항거를 위한 노동자 조직을 일궈 나간다. 식민치하의 노동자들의 단결은 제국주의 일본의 자본 이익에 반하는 행위였으니 그 낌새만으로도 잔악한 탄압의 대상이었다. 이때 민족주의를 표방하는 그 어떤 세력도 식민지 조선인들의 곤궁한 삶의 형편을 위해 대변자로 나서지 않았다. 노동자들의 계급투쟁과 평등한 노동처우의 요구는 러시아를 중심으로 하는 공산주의 이념과 그들의 지원이 유일한 돌파구였다. 따라서 일제 식민지하의 조선인 노동자들의 불가피하게 지하화된 조직은 공산주의 강령에 의존한 것일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다.


“한일합병 직후, 잠재적인 앞잡이(부역자 무리)로 본다면 그 숫자는 수십만이 

될 것이다.  한쪽에서는 가산과 가족까지 버리고 목숨을 바쳐 일제와 싸우는 이들이 있는가하면 적의 앞잡이가 되어 몇 푼의 생활비와 권력을 탐하는

 자들이 그렇게나 많았던 것이다.”    -306쪽

 

이쯤에서 오늘날의 한국사회에 특이한 부패 유형인 엘리트 카르텔의 발원이 목격되기 시작하는데, 바로 친일 부역자 무리다. 돼지 도살로 살아가던 최달영이란 인물의 일제순사 밀정으로의 변신과 후일 고등계 형사가 되고, 해방 후 용산 경찰서장이 되어 동족에게 폭력을 거침없이 겨누고 죽음으로 몰아댔던 그 비열한 세력들이 이 땅의 주요 정치경제세력이 되는 과정이다. 일본 순사들보다 더욱 극악하게 조선인을 못살게 굴던 인간, 식민 기간 내내 노동자들 조직을 괴멸시키고, 수많은 노동자들을 각종 고문으로 절명시키고, 그 가족을 파멸시키는데 주도적인 성과를 이뤄낸다. 일제의 개(走狗)가 되어 가치를 입증함으로써 일본의 정식 고등계 수사과장에 올라 불의한 부와 권력을 쌓아올린다.

 

해방된 조선의 통치자는 일제에서 미군정으로 점령군의 이름만 바뀌었으니 조선의 독립이란 말은 사실 공허한 얘기에 가깝다. 미군정은 고스란히 일제의 관료시스템과 관료들을 그대로 인수했다. 이에 조력한 인물이 바로 이 나라 최초의 탄핵 대통령이 되어 쫓기듯 권좌에서 내려온 썩어빠진 이승만이란 인간이다. 다시 말해 해방 후 이 땅의 정치 경제 세력은 친일부역자들이 그대로 - 동족을 착취하고 죽여 쌓은 부정한 지위와 재산을 - 이어가게 되는 부조리함이다. 이이철은 야마시타(최달영)에 잡혀 고문으로 망가진 몸을 이기지 못하고 수감된 감옥에서 사망한다.

 

형 일철은 조선인이 차지하기 어려운 기관사라는 자리를 성취하지만 항일 운동을 위해 공산주의 노동자 조직을 위해 투쟁하던 동생의 행동을 암묵적으로 지지한다. 해방 후 일철은 노동운동의 주요 인사가 되어 참여하지만, 이름을 바꾸고 경찰서장이 된 최영(야마시타)은 기세등등하게 나타나 노동운동 조직은 빨갱이 짓이니 조심하라고 협박한다. 일철은 일제의 주구였다가 다시금 미군정 경찰의 개에게 쫓긴다. 붙잡히면 개처럼 죽을 것이다. 그는 미국에 의해 분단된 38선을 넘어 북으로 탈출하고, 북쪽의 기관사 양성교육자로 살아간다. 이제 일철의 아들 이지산은 아비를 찾아 할아버지 이백만과 어머니 신금이를 떠나 북으로 떠나 아버지로부터 기관사의 교육을 받지만 전쟁 기간 물자배송을 하다 포로가 된다. 한쪽 다리가 잘려 나간 불구의 몸을 하고 어머니 신금이가 있는 영등포 고향집으로 찾아든다. 발전소 굴뚝에 올라 고공농성을 하는 이진오는 그렇게 살아 돌아온 이지산의 아들로 태어나게 된다.


 “온 세상은 우리의 편이 아니며 겨우 한발짝씩

아주 느리게 변할 뿐이라는 것을 누구나 잘 알게 되었다.” -408쪽

 

일제 때부터 전쟁까지 겪으면서 우리 집 남자들 모두가 노동자였거든. 이라고 세기가 지난 21세기 오늘에도 여전히 변하지 않고 똑같은 한국사회를 말하는 이진오의 기억은 한국사회의 부패와 맞닿는다. 이 부패는 역사적 부정과 불의에 대한 국민적 정리를 하지 못한 실패의 되새김이며, 이의 여아한 정리만이 외부의 시선이 지적하는 한국사회의 기형적 부패의 고리를 끊는 시작이 될 것이다. 일제의 유산을 물려받은 민족배반의 세력들이 여전히 이 땅의 지배권력자로 군림하며 역사를 부정하고 친일을 미화하는 불의한 시간에 우리들은 서있다. 일제와 해방후 국가 행정권력을 쥔 친일집단은 노조파괴와 노동운동가 개인에 대한 테러를 정치적 목표로 하여 자신들의 이익과 권력을 확대하는 데 몰두한 세력들이다, 이들이 곧 오늘의 엘리트 카르텔이라는 국민을 등쳐먹는 세계에서 찾기 힘든 희한한 부패 형상이다.

 

작가는 이 작품을 그의 1989년 방북에서 영등포가 고향인 북한의 한 노인과의 대화로부터였다고 구상하게 된 연유를 밝히고 있다. 대동강변에서 들려주던 철도 기관수였던 노인의 월북과 군수물자를 수송하다 돌아오지 않은 아들의 이야기는 이렇게 거장의 30년에 걸친 집필의 노고로 독자의 눈앞에 놓였다. 그리고 그 강렬한 서사는 이 땅의 백여 년에 걸친 핍박받는 노동자들의 삶의 노정을 거쳐 그 뿌리를 드러내 여실하게 이 사회의 실체를 보여준다.

 

이것은 오늘 기묘하게 신자유주의의 자본탐욕과 일제부역자들과 그 후손들의 역사부정과 맞물려 괴물스런 기시감을 불러일으킨다. 이 작품의 초판이 출간된 2020년에서 4년이 흐른 2024년, 소설 속 이야기를 더욱 현실적 문제로 극명하게 이해할 수 있는 환경으로 변하였다. 한국인의 삶의 역사에서 일제부역자의 민족 배신행위를 망각하는 것은 국가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짓거리고, 또한 인간 존엄성에 대한 부인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고공농성을 하는 노동자가 사라지지 않는 한 우리의 세상에서 노동자 삶의 조건은 결코 달라진 것이 없다는 말이 될 것이다. 아주 느리지만 이 변화의 속도를 조금은 빨리할 방법이 있을 것이다.

 

 

※ 우리 한국민의 역사적 정서를 대표하는 문학거장, 황석영 작가의 부커상 수상을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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