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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의식

요즈음 나는 사랑에 목말라하고 있는가 보다. 계절이 바뀌는 까닭일까? 부쩍 사람의 마음이 그립다. 그러다보니 읽는 책들의 글마다 마음, 손길, 친구, 선한 영향력, 동고와 같은 단어들에 시선이 붙들려 꼼짝하지 않곤 한다. "모든 참되고 순수한 사랑은 동고(同苦)이고 동고가 아닌 모든 사랑은 사욕이다." 라는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제4권 「의지로서의 세계에 대한 제 2고찰」의 한 문장이 그 시작점이 될 것 같다.

 

예스런 ‘동고(同苦)’라는 단어를 말하는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의 사유로부터 우리 인간의 모든 고민과 고통을 읽는다. 그가 말하는 의지(wille;意志)란 인간의 욕망에 따라 통제, 지향할 수 없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그것 자체로 존재하게 하는 힘”을 의미한다. 때문에 우주 전체를 관통하는 목적 없는 충동인 이 의지를 인간은 다만 오감으로 직관하여 파악할 뿐인 ‘표상’으로서 이해할 수 있을 밖에 없다.

 

이 목적 없는 움직임인 의지를 이해하지 못함으로 인해 야기되는 인간의 모든 번민과 고통은 바로 타자인 개체가 바로 ‘나’의 의지의 표상에 불과함을 인식하지 못하는데서 오는 착각이라는 것을 수시로 망각하곤 한다. 타자인 실재와 내 의지의 표상과의 불가피한 간극, 그로부터 출현하는 서로 다른 의지들의 충돌로 갈등하고 적대한다.

 

우리 인간 모두는 의지의 현상체에 불과한 것을, 의지에 어쩔 수 없이 좌우될 수밖에 없는 존재들인 것을 이해하게 된다면 우린 서로 애틋하게 바라볼 수 있을 텐데 말이다. 그래서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의 고통을 자신의 것으로 느낄 수 있는 사람의 성정을 뜻하는 '동고(同苦)'야말로 모든 참되고 순수한 사랑의 유일한 동기라 말할 수 있는 것일 게다. 모든 존재가 의지의 맹목성에 좌우되기에 고통에 시달린다는 것을 인식할 줄 아는 삶의 의지에 대한 통찰이 아무렴 요구되는 즈음이다. 사실 안다고 해결되는 일은 아닐 것이다.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각성하고 의지로부터 자유, 의지의 부정으로 나아가는 평정의 길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치열한 자기 성찰의 길은 가까우면서 한없이 멀게만 느껴지기도 한다,

 

이제 얼추 나이든 세대에 속하게 되면서 내 삶에서 친구나 신의(信義)의 자리에 고작 메마른 성(性)이나 자리를 차지하고, 게다가 우정은 동성애라는 의심의 눈초리로까지 변질되어 우정이 발 딛을 공간이 극히 협소해졌음을 느끼게 된다. 사람간의 유대를 점점 상실해가는 지금, 내 주변의 공동체는 부쩍 약화되어가고, 동고의 연민은 극단적으로 희소해졌음을 체감한다. 18세기 실학자 이덕무는 『청장관전서』 63권에 이렇게 쓰고 있다.

 

"마음에 드는 계절에, 마음이 맞는 친구를 만나, 마음에 있는 이야기를 나누며, 마음에 드는 글을 읽으면, 이보다 더한 즐거움이 없다. 하지만 이런 기회가 얼마나 드문지! 일생을 통틀어 몇 번이나 올까?"

 

청장관(靑莊館) 이덕무(李德懋, 1741~1793)는 지성과 사랑, 아름다움과 윤리가 함께 어우러진 벗과의 이 드문 교류를 '최상의 즐거움'이라 말했다. 오랜 굶주림으로 팔 만한 물건이라곤 『맹자』일곱 권이 전부였던 청장관은 이를 팔아 밥을 실컷 먹고 희희낙락하여 벗 유득공(柳得恭 1748~1807)을 찾아가 자랑한다. 이 말을 들은 영재(冷齋, 유득공)또한 굶주리고 있던 터라 『좌씨전』을 팔아 술을 사다 함께 마시며 이렇게 맹자와 좌구명을 칭송한다. "맹자가 친히 밥을 지어 나를 먹이고, 좌구명이 손수 술을 따라 나에게 권한 것과 무엇이 다르겠소.(『간본아정유고』6권)"

 

찾아 온 벗을 대접할 길 없는 가난했던 영재의 마음이나, 책을 팔아 밥을 먹었다는 거짓없는 삶의 얘기를 들려주는 청장관의 스스럼없는 대화가 그들이 아끼는 책의 이야기와 어울려 삶과 우정이라는 그 소소한 일상의 진의를 엿보게 해준다. 이것이 동고이고 사랑이 아니라면 그 무엇을 사랑이라 할까?

 

중국 공푸전옌 영화사 부사장이자 신시대 여성을 대표하는 후이구냥(輝姑孃)은 의기소침해진 우리들이 결코 혼자가 아니라고 말하며, “세상은 몰래 당신을 응원하고 있다.”고 사방팔방 온통 장벽으로 막힌 듯 어떤 돌파구도 찾지 못해 좌절과 체념으로 포기와 죽음같은 나락으로 떨어진 우리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어준다. 우리들이 미처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곳에서 응원하고 부축하고 기도해주는 누군가가 반드시 있다는 믿음의 존재함을 강조한다.

 

그것은 어느 날 무심히 내민 손길이나 신경 쓰지도 않던 평범한 말 한마디가 우리의 영혼을 두들기고 구원의 한줄기 빛이 되어 용기와 희망의 언어가 되어준다는 것이다. 세상은 어쩌면 전혀 기대치 않는 때에 우리에게 온기를 보내고, 고통스런 인생을 바꿀 용기를 주어 그 자신을 증명하는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나'라는 개체를 중심으로 세계를 생각하고 자신의 구현된 의지만을 긍정하려 할 때 얼마나 무시무시한 오류, 오판을 저지르는가? 내 외로움은 어디선가 응원하고 있을 또 다른 의지의 이해로 위안을 받는다. 고작 표상에 붙들려 갈구하는 이 척박한 외로움에 대한 소박한 이해가 나의 걸음에 용기를 불어넣는다.

 

불현 듯 "추론이라는 것은 대부분 우리가 믿고 있는대로 계속 믿기 위한 논리를 찾는 과정일 뿐이다."라는 구절이 떠오른다. 한없이 우호적인 환경 속에서도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의 생각으로 바꾸기는 사실 불가능하다는 것을 느끼곤 한다. 아마 나는 서로 다른 의지의 소산인 그 분개하는 마음을 알기에 오히려 내 마음을 걸어 잠그기 일쑤였던 것 같다. 아마 내 믿음이라는 자존감을 형성하는 근본 축의 훼손을 방어하기 위한 무의식적 행동이었을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인간관계에 대한 힌트를 제공한다. 이를 반대로 투영하는 것이다. 타인의 자존감을 존중해주어 그의 믿음이 훼손당했다고 생각지 않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또한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동고일 것이다. 상대의 의견을 진심으로 인정하는 것, 공감이라는 우호적 존중은 곧 친근감으로 돌아오고 그럼으로써 상대가 자신의 의견을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는 여유와 관대함으로 이어지고, 급기야 자신의 추론을 변경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낸다는 것을. 우리 인간의 신념이란 수많은 약점을 태생적으로 지니고 있다, 이를 인정한다면 우리들은 서로 동류(同類)에 대한 연민을 바탕으로 한 관계를 마련해 낼 수 있지 않을까?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파듯, 사랑을 찾기 위한 내 인식을 돌아보는 시간을 갖는다. 선한 영향력을 주고 우정을 쌓는데 인간의 생래적 취약점을 어루만지는 능력을 갖는 것이 당연히 그 시작이 되어야 한다는 가르침들은 분명 나만 모르는 비밀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제 조금은 어제보다 나은 세상이 펼쳐지기를 기대해 본다. 서로의 마음이 부둥켜안고 어루만져주는 그런 동고의 세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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