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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테레사의 오리무중
  • 박지영
  • 12,600원 (10%700)
  • 2024-01-15
  • : 619

자음과모음의 트리플 시리즈는 세 편의 소설과 한 편의 에세이로 구성된 정형화된 형식(포맷)을 지닌 소설집이다. 아마 박지영 작가의 이번 작품집은 이 일정한 형식성에 소설의 내용이 가장 잘 부합한다고 생각된다. 수록된 소설들이 바로 인간 조건, 다시 말해 오늘을 사는 사람들의 삶의 토대, 내면화된 삶의 형식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삶의 양식 그 자체이기에 당연시하고 의문시 되지 않는 인식들 말이다. 임시직, 계약직, 단기직, 영업직 그 무엇으로 불리든 극도로 불안한 고용상태에 놓인 사람들을 이 사회의 계급적 안전 담보물처럼 보전시키면서 멸시와 깔봄, 혐오의 대상으로 삼으며 우월감과 존재감을 지탱하는 양상 말이다. 우리들이 내면화시킨 불공정의 공정성에 대해서.

 

우리들 삶의 태도에는 너무도 무심히 이러한 터무니없는 환상이 깊숙이 체화되어있다. 이런 사회, 즉 “정상이란 것이 존재해서 그 정상을 향한 열망같은 것이 조성되면 그 사회가 병들고 있는 것”이라고 프랑스의 행동하는 철학자 시몬 베이유는 그의 책 『뿌리 내림』에 썼다. 사회적 굴종이 이미 위험한 정도에 이르렀음의 지표라는 것이다. 단편 「올드 레이디 버드」에 등장하는 박물관 계약직 사원 영우란 인물은 이러한 계층적 경계가 철저하게 내면화되어 있어 학예사 ‘정’이라는 인물로 상징되는 정상성을 갈망하고 신비화하기까지 한다. 그의 언행은 정의 심사를 거스르지 않으려는 노심초사로 이루어져 있으며, 정의 무심한 일상적 행위조차 자신의 행동에 대한 어떤 반응으로 여긴다.

 

그런가하면 표제작인 「테레사의 오리무중」의 ‘바른 먹거리 센터’에서 포장 일을 하는 단기직 노동자 ‘테레사’는 작업반 임시직에서 어부지리로 중간관리자가 된 주경으로부터 “여사님은, 마스크를 쓰시는 게 좋겠어요” 라며 모든 작업자들이 마스크를 쓰지 않고 있음에도 당신은 드러난 자아를 감추지 못하니 마스크를 써서 얼굴을 감추라고 지적하는 것도 이러한 맹목적 차별과 지배 의식 때문이다. “하라면 좀, 그냥 하라는 대로 하세요” 함부로 하대해도 될 존재가 항상 거기에 있다는 듯이, 지배에 통제되는 것이 당연한 존재란 듯이, 당신과 같은 부류들은 얼굴에 마음을 드러내는 표정을 가려야만 된다고, 절대 태도란 것을 지녀서는 안 된다고. 그게 사회생활의 정상성이라고 암묵적 압박을 가한다.

 

테레사는 이러한 상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안다. 그래서 손상되는 자존감, 모멸감으로 부르르 떠는 자아를 분리하여 집에 두고 출근하기 시작한다. 그러니 일터에 나온 테레사에게는 자아가 없다. 자아가 없는 존재니 내면이 표정에 드러나는 법이 없고 마스크를 벗어도 더 이상 무어라는 시비가 없어진다. 제목에 있는 ‘오리무중’은 이 분리된 자아, 특히 아홉 번째, 아니 일곱 번째로 밝혀지지만 그 자아의 행방이 묘연해졌음을 뜻한다. 사라진 테레사의 자아인 성 테레사의 행방을 주경과 함께 찾아 나서는 이야기다. 떠도는 영혼들의 외로움과 불온하게 변질된 위계의 심리를 돌아보게 하는 작품이다.

 

단편 「올드 레이디 버드」는 고양이 양육 집단이 하나의 신분과 계층적 상징물로 등장하는데, 계약직으로 여기저기 떠도는 영우란 인물은 이렇게 말한다. “고양이의 귀여움은 취향의 문제가 아니었다. 선악의 문제였다.”, 그가 떠돌았던 직장들에서 사람들은 한결같이 고양이의 귀여움을 입이 닳도록 이구동성으로 떠들었다. 그런 세계에서 영우는 자신의 취향과는 무관하게 동조하여야만 했다, 만일 그 귀여움에 섞여들지 않는다면 곧 이질적 존재, 외부자로 배제되는, 즉 존재가 부정될 수도 있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사실 이 소설에는 “통제에 대한 욕구”, “안전에 대한 감각”이라는 문구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데, 이는 현대적 삶의 형식에 내재된 타자를 향한 ‘환상 소유’라는 지배 감각의 전형적 양식들이기에 아마 오늘을 사는 사람들에게 굴절된 사물화와 소유 의식이 일상적으로 점유된 양상을 읽을 수 있다고 말해도 될 것이다.

 

한편 박물관의 학예사인 ‘정’이란 인물은 계약직인 영우에게 솔직하고 소소하게 직원들의 험담을 이야기하는데, 그는 정에게 동일한 형태의 말을 할 수 없다. “정이 자신의 취약성을 영우에게 드러낼 수 있다는 건 강자”였기에 가능한 것이라고, 허락된 자만이 할 수 있는 말을 영우가 발설하는 순간 외면당하고 만다. 하나의 단편적 장면인데 강렬한 인상을 주는 대화가 있다. 영우가 박물관 경비인 염씨가 건네주는 박카스를 받아 마신 것에 대해 정은 염의 친절이 지나치고, 그 음료에 무엇이 들었는지 어떻게 신뢰할 수 있겠느냐며, 경비라는 직업의 인물에 대한 혐오와 불신의 신호를 보내며 은근한 동의를 구하는 것이다.

 

이때 영우는 자신의 표정에 신경쓰며 무언의 공감을 소극적으로 표시하고 만다. 자기 표정에 신경을 쓴 것은 염의 친절에 대해 정의 말처럼 경계했던 적이 없었기 때문이고, 수동적인 공감을 표시하는 것은 상급자인 정의 견해에 대해 계약직으로서 다른 의견을 말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다고 여겼던 까닭이다. 계약이 만료되고 퇴직 인사를 위해 정을 찾아 간 날, 정은 연차로 출근하지 않아 텅 빈 책상에 먹지 않고 버려지듯 쌓인 음료병들을 보게 된다. 염이 주었으나 마시지 않고 방치된 것들이다, 염의 앞에서는 차별없음과 친절을 가장하지만 정은 의심스럽고 변변찮은 불쾌한 사물로 취급하는 것이다. 영우가 이를 제대로 읽었는지는 불명확하다. 정이 치어죽인 박물관 영내 삼색고양이 사건과 관련하여 계층 경계에 선 그의 열망이 고양이를 떠나지 못하고 맴도는 양상은 지독하게 내면화된 예속의 성질을 생각게 한다.

 


고양이는 「장례 세일」에 앞선 두 편의 작품 모두에 등장하는 ‘주경’이란 인물과 함께 다시 등장하는데, “생각해 본적 없는 선의(善意)”의 매개체인 불공정한 선의로 작중 인물에게 그 의미를 전달하는 듯하다. 내겐 이 작품이 가장 인상적이었는데, 세 편의 작품 모두 검정색 해학이 문장들에 스며있어 뒤틀린 가벼움으로 절로 비판적 목소리가 울려퍼지게 하지만, 단연 유머의 진가를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기 때문이다. 압도적인 유혹이었다고 할까? 죽음을 앞에 두고 벌이는 오락성의 발칙함, 그 무례함 뒤에서 울먹이는 존재를 보았기에 죽음의 상업적 놀음에 아무런 가치판단을 하지 못하게 된다. 우리들을 인식의 무능력 지대와 직면시키기 때문일 것이다.

 

소설은 첫 문장부터 조금은 못되고 무례한 언어로 시작한다. 아버지 독고씨의 묘비명으로 ‘토사구팽(兔死狗烹)’을 생각하는 병원 장례식장 3교대 계약직 경비원인 현수란 인물이 직면한 삶의 실상을 따라가다 보면 문득 정서적 무능력을 실감하게 된다. 토사구팽이란 필요할 때면 쓰이고 쓸모가 없어지면 야박하게 버려진다는 말이다. 이 말처럼 우리들에 내면화된 삶의 형식인 자본주의를 정의하는 표현이 어디에 있겠는가?

 

또한 토사구팽은 은유가 아니라 독고씨와 현수의 삶속에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기도 한데, 토끼를 산 채로 잡아 영업사원인 아버지 독고씨가 회사 상사들과 함께 집에 돌아 온 날의 기억이다. 굽실거리며 산 토끼를 잡아 탕으로 끓여 술안주로 내오고 순종적인 아버지를 닮으라는 어린 현수에게 주절거리는 회사 상사의 무례한 언어는 독고씨의 삶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낸다. 현수가 토사구팽을 떠올린 것은 필연적인 것이고, 독고씨의 묘비명이 ‘그래도 싼’ 것이기에 불공정하지만 일견 정당하다고 여겨질 수도 있을 것이다.

 

독고씨의 죽음 값이 그래도 싼 것인지, 아니면 불공정한 것인지에 대한 고뇌가 소설의 한 줄기이고, 한 생명의 가치를 가늠한다는 것이 대체 무엇인지, 그 가치를 가늠한다는 것이 정말 가능한 것이기라도 하다는 것인지에 대한 윤리적 사유가 또 하나의 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왜 ‘장례 세일’이 제목이 되었을까? 현수는 계약 만료를 앞두고 있으며, 직원에게 할인혜택을 주는 장례비용 30퍼센트 할인 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아버지 독고씨는 의식이란 이미 사라진 채 연명줄로 버티며 요양병원에서 죽을 시점만이 남아있다.

 

“인생은 타이밍이다. 죽음 역시 타이밍이 중요했다. 존엄사라는 건 그런 거였다.” -143쪽

 

가진 것 없는 현수나 자식에게 아무것도 남겨 줄 것 없는, 의식없이 누워있는 독고씨의 보잘 것 없는 생은 독고씨의 죽음에 드는 비용으로 고민하는 남루한 삶을 살아가는 이에게 지극히 죽음의 타이밍이 중요한 사안이다. 현수는 텅 빈 장례식장의 그 공허를 피하기 위한 계획을 세운다. 독고씨의 죽음 비용은 현수가 “고려중인 ‘그래도 싼’ 수준조차도 언감생심이거나 지나치게 고평가된 것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자식인 자신조차 싼 인생으로 취급받는 것은 피해야하지 않겠나? 그래서 흥행계획을 진행시킨다. 흥행성을 결정할 오락적 면을 효과적으로 부과하기 위한 일명 ‘마감 임박 세일을 위한 기본 포맷’을 수립한다. 그것은 “아주 사소해서 세상에 이런 기억을 아직까지 간직하고 있었다니, 이 정도의 감사함을 죽을 때까지 가슴에 품고 자식을 통해 꼭 전하고 싶어 한 삶이란..”라고 자신이 감사한 사랑이었음을 일깨우는 감사 편지를 독고씨가 스쳐지나간 사람들 모두에게 보내는 것이다. 감사 편지를 받은 사람들은 현수에게 독고씨가 운명하면 꼭 상(喪)에 불러달라고 회신한다. 흥행계획은 일단 소기의 성과를 이룬 것 같다. 그런데 독고씨가 숨 쉬는 것을 단념하지 않는다.

 

아니나 다를까, 아버지는 살아서도 맞추지 못했던 타이밍을 죽을 때조차 맞추지 못한다. 계약기간이 끝나서 더는 직원 혜택을 받을 수 없게 되었을 때 죽는다. 이제 관계라는 것이 남아있지 않은 사람에게 누가 조문을 오겠는가? 아무리 플러스를 만들려고 해봐도 어떨 수 없는 마이너스 인생이었던 독고씨는 할인된 죽음, ‘세일 된 맨’의 죽음을 완료한다. 이 풍자적 언어의 해학에도 불구하고 우울함이 이 뒤틀린 언어의 감각을 뒤덮는다. 세일 된 죽음! 그나마 현수의 흥행 작업이 소기의 성과를 낳아 조문객들이 들어차서 너도나도 고인이 자신들에게 사소한 행위에 감사했음을 자랑스레 떠들며 죽음을 품위있게 만들어 낸다.

 

소설의 후반부는 싼 인생을, 마이너스 인생을 살다간 아버지 독고씨의 장례를 품위있고 고결하게, 그리고 가성비에 맞추어 치러냈으나 공정하지 못했다는 기분을 떨쳐내지 못한다.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제대로 슬퍼하지 못하고 장례비용과 화장비용, 장지비용, (,..) 조의금의 최종 액수 따위를 계산해보는 자신 또한 그래도 싼 인생을 벗어날 수 없음에 사로잡힌다. 사실 소설에서도 말하고 있지만 “위풍당당한 죽음과 의기소침한 죽음”이란 이 대비의 말이 얼마나 천박한 말인가. 그렇다고 애도에 가성비를 따져야 하는 세상도 우리들이 오늘 어떤 세계를 살아가고 있으며, 무엇을 당연시하고 있는지 일깨운다.

 

우리들의 행위를 결정하는 삶의 형식이 된 내면화된 믿음들, 얼마나 가증스러운 것들인가? 등급을 나누고, 차별하고, 굴종을 강요하고, 모욕으로 외로움과 고립으로 몰아넣고, “어쩔 수 없음의 윤리와 신념”으로 침윤(浸潤)되게 하는 세상은 벗어나야 하지 않겠나?  인간 존엄과 공정성, 삶의 형식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다. 엄숙한, 아주 근본적인 변화를 사유케 하는 이야기가 지극히 경쾌하고 재미있는 서사로 써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소설들이다. 그러면서 재미에 매몰되지 않고 우리들의 무능력지대를 지속해서 떠올리게 하는 문장들이 촘촘히 게으른 우리들의 마음을 흔들어 깨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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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아, 인상 깊은 하나를 말하지 못한 것 같다. 세 편의 소설 모두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책을 읽는다. 자신이 접하고 있는 당면 현안을 돌파하기 위한 소소한 책들을, 물론 작가가 읽었던 책들일 것이다. 그 책들을 찾아 읽는 것도 또 하나의 즐거움이 될 것 같다. 그리고 마지막에 수록된 에세이는 각 작품들의 장면에 대한 작가의 고민이 씌어 있다. 작가가 의도했던 바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어 줄 텍스트로 읽어도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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