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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글은 책 『사랑의 완성』에 대한 두 번째 감상으로 무질의 『생전의 유고(Nachlass zu Lebzeiten)』 에 대한 것이다. 번역본은 북인더갭 출간 본으로 이 중 단편소설 「지빠귀 (Die Amsel)」를 별개로 첫 번째 수록하고, 나머지 산문 중 15편을 「생전의 유고」로 분류하고 있다. 「사랑의 완성세 여인」에 대한 감상은 앞서 남겼다.

 

 

“문학은 삶의 개념을 파악하고자하는 학문과 달리 삶을 무한한 미지의

 현상 자체로서 이해하고 경험하고자 하는 것이다.”  - 로베르트 무질

 

 

1. 『생전의 유고(Nachlass zu Lebzeiten)』 에 대해서

 


유고는 작가의 사후에 미(未)출간된 글들에 대해 붙이는 개념어다. 그런데 작가 생존에 ‘유고(遺稿)’는 모순된 사용이라 할 수 있다. 무질은 이런 까닭으로 변명이 필요하다고 느꼈기 때문인지 “사후 유고의 출판을 못하게 하기 위해 결심”했으며, 이를 지키는 방법은 “스스로 생전에 출판하는 것”이라 밝히고 있다. 그러나 사실 기반의 증언은 “『특성 없는 남자』 2권의 집필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음으로써, 예견되는 출판의 공백을 메우기” 위한 방책이었다는 것도 한 이유가 될 것 같다. 무질은 나치 정권이 들어서자 스위스로 도피하여 생활고를 겪으며 고통스러운 말년을 보냈다. 미국에 도피 중이었던 ‘토마스 만’에게 후원금 5달러 지급 연장을 부탁하는 가슴 아픈 편지가 전해져 온다.

 

『생전의 유고』는 1934년에 출판한 무질 생전의 마지막 작품집이다. 30편의 짧은 산문을 수록하고 있는데, 대부분 아주 짧은 5쪽 미만의 글들이고, 단 하나 「지빠귀」만이 15쪽 분량의 단편 소설이다. 무질은 이 작품들을 네 개의 성격으로 분류하여 각기 「상(像)들, Bilder」 14편, 「불친절한 관찰들(Unfreundliche Betrachtungen)」 11편, 「이야기가 아닌 이야기들」 4편, 마지막으로 「지빠귀」로 배치하고 있다. 국역본 『사랑의 완성』은 이들 중 「지빠귀」를 별도로 구분하였으며, 나머지 29편 중 15편이 「생전의 유고」라는 항목에 편집되어 있다. 수록작 중에서 「불친절한 관찰들(Unfreundliche Betrachtungen)」 11편 모두가 빠져 있으며, 각 분류 항목에서 1,2편씩이 추가로 빠져있다.

 

2. 「지빠귀 (Die Amsel)」에 대해서

 


단편 「지빠귀」는 무질의 작품에 있어 매우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생전에 쓴 마지막 단편소설이라는 의미보다도 이야기와 이야기의 의미에 대한 ‘작가의 소설론(小說論)적 성찰’을 대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설은 액자(틀) 소설의 형식을 지니고 3인칭 화자가 시작하여 1인칭 인물에게 이야기의 주도권을 건네지만 다시 3인칭 화자로 복귀하지 않는, 즉 틀이 닫히지 않고 열린 상태로 끝을 맺는다. 형식이 마무리 되지 않음으로써 소설의 종료는 독자의 창의적 해석으로 넘겨진다. 소위 무질 문학의 전형적 특성이다. 이를 평론가들은 ‘표현과 침묵 사이의 허공을 부유하며 확정과 완결을 거부하는 문체’라며, 바로 이 무한히 열린 가능성이 곧 무질의 문학 의도라 말하고 있다.

 

소설은 딱히 줄거리랄 것이 없지만 아츠바이(Azwei)라는 인물이 친구 아아인스(Aeins)에게 들려주는 어떤 연관성이나 인과성도 없어 보이는 세 이야기가 전부다. 잠들지 못하던 어느 날 창밖의 지빠뀌 노래 소리로 인해 순간 일상적 세계를 벗어나 아주 다른 감각의 세계로 옮겨간 것 같은 느낌으로 사랑하는 아내를 떠나 낯선 곳으로 향하게 되었던 이야기가 첫 번째이고, 두 번째는 전쟁 참전 중 적의 헬기로부터 화살이 날아와 생사의 갈래에 섰을 때의 신비로운 체험담이다, 마지막은 사업 실패로 어려움 겪던 중 어머니와 아버지의 잇단 죽음과 고향 집에서 자신의 옛 시절, 자신이 가장 선하고 좋았던 시절에 대한 회상 이야기다.

 

각 에피소드마다 독자 나름의 공감이나 이해가 있을 수 있으나 사실 뚜렷하게 해석할 테마를 읽어내기가 어렵다. 첫 일화에서는  “수직의 공간 체험을 충분히 이용해 동일성의 공간을 탈출해보겠다는 생각에서였어.” 라는 문장처럼 현실로부터 벗어나 새로움을 추구하는 동기를 읽을 수 있으며, 다음 일화에서는 “목숨이 위태롭지 않은 상황이었다면 그렇게까지 아름답게 느껴지지는 않았을 거야.”와 같이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느껴지는 미의 감각을 상상하게 하고. 마지막에서는 어머니가 자신에게 지닌 고정된 상(像)의 현실과의 불일치, 즉 살아있는 존재의 끊임없이 변화하는 자기증명의 변(辯)이 들려오기도 한다.

 

이야기의 말미에 아아인스는 묻는다. “이 세 이야기에는 모든 것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공통된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암시하려는 것 아니었어?”라고. 그러나 아츠바이는 부인하면서 “만약 내가 그 의미를 알았다면 너에게 이 이야기를 해줄 필요도 없었을 거야.”라며 소설은 종료된다. 세계의 모든 질서는 확고한 것보다 확고하지 않은 것 속에 보다 많은 미래가 있다는 무질의 주장처럼 이 소설은 무한한 가능성만을 남겨두고 독자에게 그 해석의 권리를 넘긴다. 인과법칙도 논리적 연관성도 벗어난 이 소설은 이렇게 읽기를 완강히 거부한다. 해석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무엇이 생성되는지는 독자 개별의 몫이 될 터이다.

 

3. 「생전의 유고」 中 15편의 산문에 대해서

 

수록된 15편의 작품 중 대부분이 무질이 「상(像)들, Bilder」 이라고 분류한 항목에 속한 작품들이고, 「성격 없는 사람」이란 제목 한 편만이 「이야기가 아닌 이야기들」에 속한 작품이다. 무질은 ‘상(像)’을 “정확한 관찰과 기다림 속에서 어느 순간 무심코 표현되는 것”이라 설명하고 있다. 이 말에는 다분히 문학의 근본으로서 역사 구조에 대한 정밀한 관찰의 신념을 읽을 수 있으며, 사실 수록된 산문들도 이러한 설명에 일치한다.

 

「파리잡이 끈끈이」는 문자 그대로 한 여름철 동네 뒷길에 있는 허름한 식당의 천장에서 바닥으로 내리달려 있는 파리 잡는 끈끈이 그것이다. 세밀한 관찰기라 할 수 있다. 자연과학도로서의 무질의 시선이 느껴진다. 벗어나려 발버둥치다 이내 포기하고 죽어가는 파리들을 묘사하는데, 20세기 초 독일 사회 인민들의 양상을 상징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듯 하기도 하다. “극도로 애쓰는 이들의 표정에는 라오콘 보다 더한 절절함이 배어있다.” 라든가, “기이한 순간이 찾아오는데, 현재의 순간적 욕망이 계속 살고 싶다는 강력한 감정을 모두 누르는”, 비장한 무의식의 순간에 대한 관찰은 실로 만만치 않은 생각의 타래를 풀게 한다.

 

「원숭이 섬」은 다소 신랄하고 비판적인, 무질의 문학에서 예외적으로 보이는 작품이다. 단지 묘사되는 대상이 원숭이일 뿐이지, 인간으로 대체해도 하나도 벗어나지 않는 은유라 할 수 있다. 나무와 대지를 지배하는 계급, 그리고 여기에 오를 수 없어 대지 아래 도랑에 머무는 원숭이들의 배치나 이들 지배 원숭이들, 즉 “박해자가 난간을 따라 걸어가자 경악의 파도도 그를 따라 멈춘다.”, 권력 계급이 보이는 폭력성에 대한 피지배계급의 적나라한 모습이다. 비굴함과 거들먹거리며 으스대는 박해자 원숭이의 걸음걸이는 그야말로 천박한 오늘의 권력을 떠오르게 한다. 「말(馬)도 웃을 수 있을까?」, 「재단사의 동화」 등 몇 몇 작품들이 비교적 시선을 끌지만 단연 『특이성 없는 남자』와 연결지어 생각할 수밖에 없는 「성격 없는 사람」은 무질을 읽는 독자라면 한 번은 읽어 볼 이유가 있는 작품일 것 같다.

 

“이 녀석아 넌 쓸 만한 ‘성격’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으니, 대체 뭐가 되려고 그러니?“ 어린 시절 성격이란 이 인용 문장처럼 그것이 없다는 이유로 매를 맞는 구실이 되곤 했다. 그렇다면 이 성격에는 분명 올바르지 않는 것이 숨어 있을 것이라고 여기는 것은 어린이에게는 당연한 발상일 것이다. 부모들에게 이 성격이 무어냐고 물어보면 이렇게 대답한다. ”성격이란 형편없는 성적, 장난치거나 주의력이 산만한 것, 야비한 행위...등과 개념상 정 반대 되는 것“이라고.

 

따라서 이 모든 것의 반대, 즉 쓸 만한 성격은 처벌의 두려움, 들 킬 것에 대한 두려움, 나쁜 짓에 대한 후회, 양심의 가책이 되고만다. 사실 이 추론은 아이들에게 비굴함과 복종, 노예근성을 요구하는 것이니 아이들에게 완전히 불필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아이가 성격 없는 사람을 추구하는 이유이다. 이 작품은 ‘성격 없음’과 관련하여 비교적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특성 없는 남자』읽기에 제법 도움을 주는 선행 독서가 되어 줄 것 같다.

 

무질의 작품들을 읽다보면 이런 생각을 하게 될 것 같다. 모든 사물과 현상을 완성된 것으로 받아들이지 말 것, 모든 질서는 나타나 보이는 것처럼 그렇게 확고하지 않다. 따라서 대상으로부터 거리를 유지하면서 이야기 되어진 것, 현상된 것에 대한 유보를 통해 부단한 서술과 서술의 해체를 거듭하며 가능성을 타진할 것, 그렇게 함으로써 불완전성의 틈을 미흡하지만 메울 수 있으리라는 것, 그것은 이성과 비이성의 결합이며. 현실과 비현실의 통합을 시도함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다는 믿음 일 것이다. 매혹된 차에 무질의 작품 세계를 당분간 지속하여 거닐어야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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