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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birdb95님의 서재
  • 진리의 발견 (양장)
  • 마리아 포포바
  • 39,600원 (10%2,200)
  • 2020-02-14
  • : 2,712
-에밀리 디킨슨 챕터와 관련

저자는 리처드 파인만의 과학적 지식과 아름다움에 대한 생각을 예로 들며 예술가(에 대한 앎)과 예술의 아름다움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솔직히 나는 잘 모르겠다. 리처드 파인만의 얘기처럼 꽃에 대한 과학적 지식을 더 깊이 알게 된다면 꽃에 대한 아름다움과 감동이 더 커질 것이라는 말에는 백번 동의하지만(그런데 이 경우에도, 과학적 지식을 아는 건 아름다움을 아는 것에 방해가 되지 않는다라는 것이지, 과학적 지식을 모른다면 아름다움도 없다라는 말은 아닐 것이다. 레이첼 카슨은 꽃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고 해도 꽃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고 했다. 때로는 아름다움을 느끼는 게 먼저일 것이다) 이 생각을 예술가와 예술에 적용한다면, 예술가는 꽃이 아니라 꽃을 심은 사람이 아닌가. 꽃을 심은 사람에 대해 아무리 많은 걸 안다고 해도 꽃 자체를 경험하는 일에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저자는 하나의 정체성으로 분명히 말해질 수 있는 예술가는 없다고 했고 동시에 예술 자체만으로 존재할 수 있는 예술도 없다고 했다. 그 생각에 동의하는 부분이 있지만 예술 자체(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예술가는 온데간데 없고 오직 예술만 존재하는 것)가 없다는 말이 예술가에 대해 알아야 한다는 말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예술 자체가 없다는 생각을, 예술을 경험하는 존재(독자이거나 관람자)와 연결지어 생각할 때 더 풍부한 의미로 이어지지 않을까. 예술을 대할 때에 예술가를 무조건 떼어놓아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얼마든지 함께 경험할 수 있지만 예술을 경험하겠다면서 예술가를 해부하듯이 파헤치는 일을 정말 예술가 본인이 원하는가에 대해 생각해본다면. 예술의 진실은 예술가에게 있지 않다. 예술의 진실은 예술가처럼 하나의 정체성으로 고정시킬 수 있는 게 아니다. 고정시킬 수 있다면 그건 디킨슨의 말처럼 운문이 아니라 산문이겠지. 하지만 디킨슨의 말처럼 시인은 산문이 아닌 운문을 쓰고 독자 역시 운문을 경험한다. 예술과 예술가 그리고 관람자에게는 오직 각자의 진실이 있을 뿐이다. 어쩌면 진실은 운문의 형식으로 도착하는 것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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