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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있는 구석방
  • 한국 현대사 산책 1980년대편 3
  • 강준만
  • 10,800원 (10%600)
  • 2003-05-12
  • : 1,862

<한국 현대사 산책 1980년대편 3 : 광주학살과 서울올림픽> 강준만 / 인물과사상사 (2003)

[My Review MMCCC / 인물과사상사 40번째 리뷰] 고품격 월간 리뷰전문잡지 <책이 있는 구석방> 일백스물아홉 번째 리뷰는 대한민국 제5공화국 전두환 정권의 민낯을 낱낱이 파헤친 <한국 현대사 산책 1980년대편 3>이다. 강준만은 박정희 정권을 '기회주의 공화국'이라 평가했다. 그럼 전두환 정권은 뭐라 평가해야 할까? 딱히 표현된 것은 없지만 그저 '광기와 야만의 공화국'이라고 정의하는 것이 편할 것 같다. 전두환 정권 때에는 모든 사람들이 미치지 않고서는 제정신으로 살 수 없는 그야말로 '혼돈의 시대'였기 때문이다. 1980년대는 신군부의 독재에 의해 '광주학살'로부터 시작했다고봐도 무방하다. 소설가 한강의 책 <소년이 온다>에도 자세히 나와 있지만 신군부는 자신들의 권력 탈취를 위해서 광주를 무참히 짓밟았다. 다른 지역에서는 그 사실을 몰랐다가 나중에 알고 나서는 그저 먹먹하기만 했다. 자신들이 일보후퇴를 했을 때 광주는 홀로 외롭게 투쟁했었고, 그 결과 광주는 잔인하게 유린 당했다. 이런 시국인데도 전 국민은 전두환 정권 때 출범한 '프로야구'에 열광하며 스포츠에 열광했다. 아, 그러고보니 전두환 정권은 '스포츠 공화국'이기도 했다. 86 아세안게임(종합 2위)과 88 올림픽(종합 4위)을 성공적으로 치루면서 전 국민을 국뽕의 도가니로 몰아넣었기 때문이다. 허나 그뿐이었다. 군사정권의 억압과 광기에도 굴하지 않던 용감한 시민들의 저항은 이어졌지만, 그에 못지 않게 전두환과 노태우 등의 군부독재의 지도부는 철저한 탄압으로 일관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 국민은 87년 대통령직선제를 얻어내는 민주주의적 승리를 탈환했다. 이런 아이러니한 80년대를 좀 더 파고 들어가 보자.

<한국 현대사 산책 1980년대편 3> 관점 포인트 : 박정희가 죽고 난 뒤에 우리 모두는 잠깐의 자유를 누렸다. 이른바 '서울의 봄'이라고 불리는 그것이다. 신군부는 정권이양을 하기 전까지 '하고 싶은 것, 다 하라'는 식으로 그저 방관만 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래서 지식인과 대학생을 주축으로 민주주의를 위한 목소리를 한껏 높였는데, 전두환을 위시한 '신군부 세력'이 정권이양을 안정적으로 확신하자마자 군홧발로 짓밟기 시작했고 전국적인 시위도 잠잠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탄압이 심했던 것이다. 그런데 유독 '광주'에서만은 굴하지 않았다. 그리고 잔인하게 짓밟혔다. 이른바 '광주학살'이다. 공수여단을 투입해 우리 국민을 향해 총부리를 겨누고 '실탄'을 발사한 것이다. 그리고 장악한 언론을 통해 광주에서 '북한 간첩'이 난동을 벌이고 있어 우리 국군이 척결했다고 발표했다. 국민들은 깜짝 놀랐다. 광주에까지 '간첩'이 버젓이 활동하고 있었다니, 그걸 또 우리 국군이 용맹하게 진압했다니, 간담이 서늘했지만 딴에는 안심 되는 소식이었다. 그러나 시일이 지나자 그날의 '진실'이 퍼지기 시작했다. 전두환 일당이 저지른 만행은 실로 끔찍했고 그 대상은 무고한 광주시민들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누구도 그 진실을 함부로 말할 수 없었다. 공공연하게 떠들고 다니면 '똑같은' 폭력을 당할 것이라 여겼던 것이다. 아무도 그런 말을 하지 않았지만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미 박정희 정권 때 경험했던 일이었고, 새로 집권한 '신군부세력'은 더하면 더했지 덜할 놈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신군부도 그런 눈치를 챘다. 그래서 국민들의 이목을 돌릴 '수단'이 필요했다. 그것이 '3S 정책'이었다. 스포츠, 스크린, 섹스 말이다. 프로야구가 이때 개막된 것은 철저히 의도된 것이었다. 검열되어 들여오지 못했던 영화가 물밀듯이 들어온 것도 바로 이때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성의 자유화'를 선언하며 쾌락이란 쾌락은 마음껏 누릴 수 있는 '자유(?)'를 허했다. 그러나 뜻있는 지식인과 대학생들은 이런 자유 말고 '진정한 자유'를 꿈꿨다. 그래서 80년대에는 시위가 끊이질 않았고, 서울 도심에 '최루가스'를 맡지 않는 날이 없었을 정도였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80년대는 '단군이래 최대 호황'을 맞았다. 신군부가 들어서고 88 서울올림픽 개최가 확정되었다. 또한 86 아시안게임도 개최하게 되었다. 신군부는 이를 자신들의 정권을 빛낼 절호의 기회로 삼고 '스포츠 성과'를 통해서 치적 쌓기를 하려고 심혈을 기울였다. 마치 박정희 정권이 '경제성장'에 목을 맨 것처럼 전두환 정권은 '스포츠 성과'로 자신들이 부당하게 차지한 정권에 '정당성'을 심으려 했던 것이다. 그 덕분이었을까? 온 국민을, 특히 중고등학생을 체육대회 봉사대원으로 차출해서 공을 들인 결과, 86 아시안게임에서는 금메달 94개의 중공에 이어 '금메달 1개 차이'로 종합 2위에 올라섰다. 일본과는 무려 금메달 34개의 차이를 보인 것이다. 전두환은 이런 쾌거를 '자기 홍보화'하며 대한민국이 세계로 발돋움하게 되었다고 선전했다. 더구나 시기적으로 86년부터 저달러, 저금리, 저유가의 '3저 호황'으로 인해 GNP 성장률은 전년 대비 2배 이상 오르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국민들은 '국뽕'이 차오르는 쾌감을 만끽했다. 한국인에게 '먹고 사는 문제'만큼 민감한 문제는 없었고, 경제호황을 맞아 살림살이가 나아지는듯 하니 '신군부세력'은 이를 자신들의 치적으로 삼으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어림도 없는 소리다. 국민들은 그간 신군부가 저지른 온갖 비리와 부정부패를 눈감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전두환 정권의 7년 임기가 끝나가는 시점에 1987년 1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접한 시민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여기에 경찰의 발표는 뜨겁게 타오르는 불에 기름을 붙는 격이었다. "책상을 탁 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뉴스는 삽시간에 퍼져나갔고, 시민들의 분노는 걷잡을 수 없이 끓어오르게 만들었다. 여기에 5·18 광주항쟁 희생자 7주기 추모 미사 때 가톨릭 정의구현 전국사제단의 이름으로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은 조작되었다"는 성명서를 발표했고, 박종철을 고문해서 죽인 진범은 따로 있다며 진실을 폭로하니 국민들은 또다시 들고 일어섰다. 전국적인 시위가 수없이 벌어졌고, 6월에 들어서자 전두환은 장기집권의 꿈을 접고 자신의 친구이자 당시 민정당 대표였던 노태우를 '대통령 후보'로 지명하겠다는 발표를 했다. 자신도 '체육관 선거'로 집권했으니, 노태우도 그 방식으로 '신군부세력'의 집권을 이어갈 수 있을 것이라 여겼을 것이다.

허나 87년 6월 9일 연세대에서 시위하던 이한열이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쓰려져 동료 학생들의 부축을 받아 병원에 갔으나 안타깝게 한 달 간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7월 5일 사망하고 말았다. 더구나 당시 이한열이 피를 흘리며 동료에게 의지하고 있는 사진이 '로이터 통신 사진기자 정태원'에 의해 촬영되었고, 이 사진이 <중앙일보>에 게재되었는데, 이 한 장의 사진에 의해 군사독재정권은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노태우가 차기 대통령으로 지명을 받아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 있을 때, 시위대는 최루탄에 맞아 병원에 실려간 이한열을 살려내라며 비통한 눈물을 흘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6월 10일을 기점으로 시위대는 전국 500여곳이 넘는 곳에서 50여만 명이 합세했는데, 대학생 뿐만 아니라 일명 '넥타이 부대'까지 합세하면서 서울 명동일대는 시위대의 열기로 뜨거워졌다.

나가는 글 : 그러나 5공 정권은 이때까지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단다. 그저 6·10 시위 이후 서울 명동 일대가 '불순 폭력 세력'에 의해 점거되었다데 충격과 우려를 금치 못한다는 성명을 내놓을 뿐,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허나 착각이었다. 한국의 '중산층'이 움직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제 시위대는 '한열이를 살려내라'는 외침과 함께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전두환에게는 치욕적인 요구조건이었을 것이다. 어떻게 잡은 정권인데, 맘 같아서는 '광주학살' 때처럼 또다시 군병력을 풀어놓고 시위대를 강제진압할 생각이 굴뚝이었을 것이다. 허나 올림픽이 코앞이었다. 미국 레이건 대통령도 쿠데타는 불가하다는 메시지를 강력하게 전했다. 사마란치는 서울에서 대규모 소요사태가 발생한다면 올림픽 개최지를 다른 장소로 변경할 수도 있다고 거론했다. 그래서 전두환은 급히 김영삼과 회담을 추진했고, 김영삼은 '직선제, 국민투표, 구속자 석방(김대중)' 등을 요구했지만, 회담은 결렬되었다.

시위는 2145회를 넘겼고, 최루탄은 35만 발 넘게 쏘았단다. 단 17일 동안의 대기록이었단다. 그리고서 6·29일 전국민을 향한 거대한 쇼가 펼쳐졌다. 이른바 '노태우의 6·29 선언'이다. 대통령 직선제 수용, 김대중 등 사면, 대통련 선거법 개정, 국민기본권신장, 언론자유 창달, 지방자치제 실시 등의 8개항을 제시했다. 신군부가 저지른 가장 악질적인 만행 '광주학살'에 대한 사죄와 무거운 책임을 지겠다는 조항은 빠졌지만, 국민들은 일단 환호했다. 자신들의 승리이자, 민주주의의 승리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연 정말 승리였던 것일까?

6·29 선언은 국민들의 거센 저항을 일단 막고 '거리의 정치'를 '제도권 정치'로 되돌리는데 성공적인 효과를 거두었기 때문이다. 일단 '직선제 수용'을 통해서 전두환에서 노태우로 안정적인 정권이양할 길은 막혔지만, 승산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전두환은 이것조차 다 계산에 넣어두었던 것이다. 그리고 사면복권되는 '정치인과 학생'들도 선별적이었다. 일단 김대중과 김영삼을 대립 구도로 만들고, 극렬하게 저항하는 학생들도 일부만 석방시키는 등 '내부 분열'을 조장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민주 진영은 6·29 선언 이후 끝없는 분란을 일으키고 말았다. 이른바 '민주화 투쟁과 학생운동의 구심점'이 분산되는 기막힌 일이 벌어진 것이다. 여기에 7, 8월에는 '노동자 투쟁'이 대대적으로 발생했다. 박정희 정권 이후 대대적인 노동자 탄압에 의해 '노동조합의 취약성'이 여전했고, 전두환 정권 때에도 철저하고 집요하게 탄압한 결과 '노동자 투쟁의 무력함'이 팽배했던 것이다. 그러다보니 노동자 투쟁은 큰 결실도 맺기 전에 보수언론에 두들겨 맞고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진퇴양란에 빠져버렸다. 이에 실망한 중산층은 노동자 투쟁에서 시선을 돌려 '엘리트'를 지향하게 되었다. 뭐라도 똑똑한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을 직감한 것이었다.

이렇게 6·29 선언으로 일보후퇴한 전두환과 노태우는 민주화 투쟁도 잡고, 노동자 투쟁도 와해시키는 일거양득을 얻었다. 그리고 약속한대로 '대통령 직선제'를 시행하며 정정당당하게 승리를 쟁취하겠다는 작전을 은밀하게 시작했다. 더구나 3저 호황으로 경기는 순풍에 돛단 듯 날아갔다. 중산층은 이런 호황을 '노동자 대투쟁' 같은 것으로 좋은 기회를 날려버릴까 두려웠던 것인지도 모른다. 거기다 그해 11월 대통령 선거를 2주 남겨두고 KAL기 폭파사건이 발생했다. 범인은 남자 한 명과 여자 한 명이었는데, 그 가운데 여자 한 명을 생포했고, 그녀의 정체가 북한 공작원 '김현희'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북한 김정일이 88올림픽 참가 방해 공작을 펼치기 위해 대한항공 여객기 폭파 지령을 내렸다는 것이다. 북한으로서는 자유진영 뿐만 아니라 공산진영까지도 대거 88올림픽에 참가한다는 사실이 부담으로 작용했던 듯 싶다. 그렇게 국제사회에서 고립을 느낀 북한이 '국면 전환용'으로 일으킨 사건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그간 쌓아온 민주화 투쟁의 성과가 하루 아침에 날아가버린 셈이다. 국민들의 뇌리 속에는 오직 '정권 안정'만을 떠올리기 딱 좋은 사건이었다.

1987년 대통령 선거는 짜고 치는 고스톱 판이 되어 버렸다. 6·10 항쟁으로 사면복권된 김대중은 당시 '불출마 선언'을 했다가 이를 번복하고 '대통령후보 출마'를 선언한다. 이에 김영삼은 '민주진영 후보단일화'를 주장했지만, 김대중 측은 이를 일축해버린다. 결국 13대 대통령 선거는 노태우의 일방적인 승리로 장식했다. 노태우 36.6%, 김영삼 28.0%, 김대중 27.1%였다. 양김의 분열이 가장 큰 패배원인이었지만, 때마침 터진 KAL기 폭파사건이란 '북풍'과 신군부의 지역감정선동, 부정·불공정선거, 언론의 왜곡 편파보도 등도 노태우 당선에 큰 기여를 했다. 허나 문제는 조직적인 관권 선거를 예상했음에도 이를 이겨내지 못한 '민주진영의 안일함'이 가장 큰 문제였다. 김영삼과 김대중이 각각 경상도와 전라도를 양분해버리는 바람에 '지역감정'은 불붙어 버렸고, 그로 인해 전국에서 '기득권 세력'의 표를 고르게 가져간 노태우가 압승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으니 말이다. 모처럼 타오른 '민주화 열망'은 이렇게 어이없게 실패로 끝맺고 새롭게 6공화국이 열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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