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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있는 구석방
  • 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편 1
  • 강준만
  • 19,800원 (10%1,100)
  • 2025-08-18
  • : 73

<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편 1 : 8·15 해방에서 6·25 전야까지, 개정증보판> 강준만 / 인물과사상사 (2025)

[My Review MMCLXXXII / 인물과사상사 31번째 리뷰] 고품격 월간 전문리뷰지 <책이 있는 구석방> 열한 번째 리뷰다. 역사적 흐름에 따라 리뷰를 하지 못하고 있는데 이 책 <한국 현대사 산책>과 더불어 <한국 근대사 산책>이 좀 그런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진득하니 처음부터 나아가지 못하고 '메뚜기 한 철' 인듯 이리저리 뜀뛰기를 하게 만든다. 기왕 이렇게 된 것 기회를 봐서 <미국사 산책>까지 한꺼번에 시대적 흐름에 맞춰 왔다갔다하며 읽으려 한다. 뭐, 책이 많아지긴 하겠지만 어차피 다 읽을 책인데 뭣을 먼저 읽든 뭔 상관이겠는가 말이다. 앞선 리뷰에서도 언급했지만 '의식의 흐름'에 따라 리뷰를 할 작정이다. 많은 양해를 바라고 언제가 되었든 꼭 리뷰를 하겠다는 다짐을 밝혀둔다. 1940년대다. 다 읽고 나니 마음이 무겁다.

<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편 1> 관점 포인트 : 8·15 해방을 맞이한 순간 조선의 민중들은 어떤 감정이었을까? 21세기 대한민국을 살고 있는 우리는 '히로히토 일왕의 라디오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무조건 항복이라는 대목에서 만세를 외치며 거리를 뛰어다니며 감격에 겨운 환호를 질렀을 거라는 상상을 한다. 하지만 실제 역사 기록은 그렇지 않았다고 한다. 36년간의 일제의 엄혹한 감시와 탄압에 지친 조선민중들은 별로 보급되어 있지 않은 라디오 소리를 직접 듣지도 못했고, 대다수 들리는 소문에 '해방'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숨죽이며 눈치만 보고 있었다고 한다. 도리어 긴장한 것은 조선반도 내에 머물고 있던 '일본군과 경찰'을 비롯한 일본인들이었다고 한다. 그들은 조선인들이 일왕의 무조건 항복 소식을 듣고 '폭도'로 돌변해서 자신들을 해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며 두려움에 벌벌 떨고 있었다고 한다. 지금 당장은 조선인들이 얼떨떨해하며 눈치만 보고 있지만, 그 옛날 3·1 만세를 불렀을 때처럼 들불처럼 번져나가며 조국의 독립 소식에 들떠 철천지 원수 같은 자신들을 용서치 않을 거라며 지레짐작으로 벌벌 떨고 있었고, 한시도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다음날에도 조선민중들이 '일본인 학살'을 했다는 기록은 없었다. 하루가 지나자 해방 소식을 듣고 만세를 부르며 감격에 겨워했지만, 일본인들이 걱정한 폭동과 학살은 전혀 없었다. 도리어 일본 본토에서 패망소식을 접한 일본인이 분풀이로 조선인들을 린치하여 사상자가 속출했다는 기록만 있을 뿐이었다.

이게 뭘 의미할까? 십수 년 전만해도 이런 분위기를 '우리가 못 났기 때문'에 나라 잃은 설움에 슬퍼할 줄만 알았지 분노할 줄도 몰랐노라고 자학적인 해석을 늘어놓기 일쑤였다. 그러니 21세기 대한민국의 위상을 보라. 우리는 '제국주의 국가들'처럼 강대한 힘을 가졌다고 남의 나라를 침공하는 역사를 갖지 않은 세계사적으로도 찾을 수 없는 유일한 나라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는 명백한 증거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수천 년간 다른 나라의 침략에 시달리면서도 '복수'를 꿈꾸지 않고, 강성한 힘을 자랑할 때에도 '정복국가'를 꾀하지 않으며 평화와 번영을 노래하는 나라가 바로 대한민국의 실체임을 여실히 확인하는 순간인 것이다. 우리는 새 시대를 맞아 이러한 역사전통을 자랑스러워 할 만하다.

얼마 전에 미국이 베네수엘라를 침공하는 일이 벌어졌다. 한 나라의 대통령 부부를 생포한 것을 자랑삼아 떠벌리며 '자국의 강대한 힘'을 보였노라며 '함부로 까불면 다친다(FAFO)'는 포스터까지 제작해서 유포하는 일을 벌였다. 이런 미국이 '정상국가'인 것처럼 보이는가? 물론 아직까지도 미국은 초강대국의 지위를 놓지 않고 있기 때문에 미국의 델타포스 대원들이 벌인 활약상을 실시간으로 보고 받으며 미국의 위대한(?) 힘을 여실히 증명해냈다. 그런데 왜 침공한 것이냔 말이다. 미국에 대한 절대적인 안전을 위협할 정도로 베네수엘라가 '악질적인 행위'를 했느냔 말이다. 그렇지 않았다. 미국은 베네수엘라가 자국의 석유자원을 '대중국 수출품목'에 넣어놨기 때문에 미국이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서 베네수엘라의 석유자원을 독차지하는 만행을 저지른 셈이다. 이를 두고서 미국 대통령은 베네수엘라가 안정될 때까지 미국이 대신 통치를 하겠다고 선언했다. 이게 미국이 '약소국'을 대하는 방식이다.

다시 1945년으로 시선을 돌려보면, 미군정에 의한 '남한의 처지'가 딱 그러했다. 해방의 감격을 기뻐할 틈도 없이 일본에 주둔해 있던 '태평양함대 소속의 군대'가 한국의 남쪽으로 건너오기 시작했다. 우리는 일제를 물러나게 한 '해방군'으로 미군을 환영했으나 미국의 속내는 우리를 '적'으로 간주한 '점령군' 행세를 했다. 그리고 우리가 독립의 그날이 오면 시행하려 했던 '건준'과 '임정'을 차례로 무시하며 38선 이남의 땅에서는 오직 '미군정'만이 유일한 합법 정부라고 선언하며 적진지를 점령하듯 무례하게 진압해버린 것이다. 얼마나 무례했냐고? 한 통역관의 증언에 따르면 '호텔 벨보이'로 보이는 소년이 두 손 가득 간식거리를 싸들고 호텔방에서 나와 로비로 뛰어가고 있는데, 미군 장교는 아무런 말도 없이 허리춤에서 총을 꺼내어 소년의 손을 향해 총알을 발사해 손목만 남아 피를 철철 흘리고 있었다. 그러자 한국인 통역관이 깜짝 놀라며 왜 그랬냐고 물으니, 그 미군 장교가 하는 말은 "영락없이 호텔방의 물건을 훔쳐서 달아나는 것처럼 보였다"는 내용이었다. 통역관이 경악을 한 것은 미군 장교의 표정이었는데, '무슨 문제'라도 있느냐는 태평하고 무표정한 얼굴이었다고 한다. 도둑놈을 혼내준 것 뿐인데 왜 그러냐는 의아한 제스쳐와 함께 말이다.

이게 미국의 실재였다. 훗날 한국의 발전상을 보면서 그때의 증언을 한 미국인들은 한결같이 "우리가 한국에 대해서 무지했던 탓"이라며 자신들의 실수(?)였다고 말할 뿐이다. 과연 실수였을까? 실제로 미국이 남한에 미군정을 세우고 통치할 때 아무런 준비가 없었다는 보고는 숱하게 찾아볼 수 있다. 심지어 한국인을 대할 거면서 '일본인을 대처하는 법'이란 미군 교본을 들고 왔을 정도라고 한다. 미군의 눈에는 한국인이 '야만인', '비문명인'이었을 뿐이었다. 더 웃긴 건 구한말 선교사로 왔던 미국의 목사들이 그들이 한 경험담을 들춰봤다는데, 그 기록에조차 '한국인은 게으르고 더러운 미개인'이라는 구절만 가득했단다. 이런 잘못된 기록을 기초해서 한국인을 차별하는데 아무런 가책도 느끼지 않았다고 하니 미국인이 얼마나 멍청한 족속들인지 알만 하지 않겠는가?

오히려 미국의 적이었던 '일본인'에 대해서는 세심한 연구(국화와 칼)까지 해서 적국이지만 '문명인'을 대하듯 존경까지 표했던 미국인들이었는데, 어째서 일본의 야만적인 식민침탈의 희생국가였던 '한국'에 대해서는 무지로 일관했더란 말인가? 그건 답이 뻔하다. 그들은 오로지 '힘의 논리'만을 정의로 생각하는 '문명의 탈'을 쓴 야만적 본성을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꺼내 보였던 것이다. 이런 미국을 우리가 '혈맹' 어쩌구 하면서 떠받들어야 할까? 대한민국도 강대국이 되어 약소국들에게 이런 모습으로 내비쳐야 할까? 천만의 말씀이다.

미당 서정주는 해방의 '그날'을 도둑처럼 찾아왔다고 표현했다. 비단 미당만의 표현이 아니었다. 당시 독립을 염원했던 운동가들도 대부분 이런 식의 감회를 표했기 때문이다. 그렇다. 우리는 느닷없이 찾아온 해방을 맞이할 준비가 아직 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래서 부랴부랴 뒤늦은 준비태세에 돌입했지만, 앞서 말했듯 미국의 야만이 우리의 염원을 바람대로 해주지 않았다. 미국은 한국내 치안 상황을 자국의 군인들만으로 하기에 버겁다고 여겨서 '친일 경찰' 출신을 찾아내어 해결하려고만 들었다. 왜 그들이었을까? 미군정 당시 '공식 공용어'는 영어였기 때문이다. 독립운동에 매진했던 이들은 일제치하에서 제대로 된 교육도 받지 못한 이들이 태반이었다. 그런데 친일 경력이 있는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외국어'를 할 줄 알았고, 미군정에서는 이들의 '협력(!)'이 절실했던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자금력'이었다. 조금이라도 뇌물을 건내주고 말이 통하는 '친일파'들을 주요 요직에 내리꽂으면서 해방정국에서 친일파는 '살길'을 찾아나선 것이다.

친일파들은 미군에만 매달리지 않았다. 좌우를 따질 것도 없이 '정치인'이라면 정치자금이 필요할 테니 자신들이 착복한 자금을 마음껏 쓰라고 용돈을 챙겨주기에 바빴기 때문이다. 그나마 '좌파 정치인'들은 얄짤 없었다. 이들은 입만 열면 '친일파 척결'을 부르짖었기 때문에 친일파들은 '우파 정치인들'에게 매달리며 자신들의 살길을 도모했다. 이때 느즈막히 귀국한 이승만이 친일파들에겐 봉이었다. 미군정의 하지 중장도 이승만을 환대했다. 영어로 말이 통하고, 맥아더가 '반공주의자'라는 보증도 섰으며, 미국 유학출신의 '박사'가 아니었느냔 말이다. 물론 그 박사 학위로 꼴랑 '1년'만에 딴 출처 불분명한 학위였지만, 당시 한국인 가운데 '미국 박사 학위'까지 딴 사람이 귀할 때였으니 그거라도 어디였을까? 그래서 하지 중장은 이승만을 환대하고, 그의 목소리를 전국에 전파타게 해주면서 나름의 구심점으로 삼으려 했다. 이에 이승만은 "나를 따르시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습니다"라는 유명한 대사를 남기며 전국민의 이목을 집중시킬 수 있었다.

한편, 중국 중경(충칭)에 있던 임시정부세력은 뭐하고 있었을까? 미군정은 임정 출신 요인들에게 '개인자격'으로 귀국하라고 엄포를 놓았다. 이에 김구를 비롯한 선발대가 귀국비행기에 올랐는데, 이승만의 소개를 받아 하지 중장과 인사를 나눴고 이승만은 김구를 "스튜(고깃국)에 꼭 필요한 소금"이라는 수식어로 소개했다고 한다. 이에 하지 중장도 흔쾌히 환대를 했다는데, 오래 가지는 않았다. 사사건건 미군정과 임정이 부딪혔기 때문이다.

암튼, 혼란한 해방 정국에서 우리 민중들의 70%는 '사회주의'를 지지했다고 한다. 오랫동안 못먹고 못살던 노동자와 농민이 대다수인 나라에서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그런데 이를 두고 북쪽의 '김일성'과 남쪽의 '이승만'이 서로 반대를 외치는 상황이었다. 여운형, 박헌영, 김구, 조소앙, 김규식 등 쟁쟁한 이들은 '사회주의'를 지지했는데도 김일성과 이승만은 요지부동이었다. 김일성은 '남로당'을 뺀 자신들만으로 '공산주의국가'를 건설하려 했고, 이승만은 누가 뭐래도 남쪽에서는 자신이 대빵이라며 '자본주의국가'를 완성하겠다는 일념으로 다른 노선의 사람들에게 해코지를 서슴지 않았다. 그나마 북쪽에서는 '좌파'가 대세였으므로 김일성을 중심으로 뭉치기 쉬운 상황이었다. 하지만 남쪽은 상황이 달랐다. 북쪽에서 넘어온 '우파'까지 가세한 상황에서 남쪽 내부에서도 '좌우의 갈등'은 좀처럼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60여 개가 넘는 정당이 만들어졌다 깨지는 악순환이 계속되며 정치적 혼란이 계속 이어졌기 때문이다. 대낮에 총질은 기본이었고, 선거 유세라도 할라치면 깡패를 동원해서 해방놓기 일쑤였다. 특히, 청년단이 골치였다. 이들은 '순수한 목적의식'만으로도 불나방처럼 갈등의 한복판에 뛰어들었기 때문에 갈등봉합을 원천적으로 막아서는 일도 빈번했다.

이런 해방정국의 대혼란은 요즘의 '내란으로 인한 여야 대립' 상황과 비슷한 것일까? 특히 '보수'를 자처하는 극우정당의 행패는 '국가가 망하길 바란다'고 오해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망가져버린 상황이니 말이다. 이런 한심한 작태를 보고 있으면 그 당시 혼란은 난리도 아니었다는 비아냥이 나올 정도다. 정말이지 우리 정치는 '쿼바디스(어디로 가나이까?)'라고 되물을 수밖에 없을 듯 싶다.

나가는 글 : 1940년대 정치갈등은 한마디로 엉망진창이었다. 그 살벌했던 미군정과 소군정조차 두손 두발 다 들고 그냥 도망갈 궁리만 하고 있을 정도였을까? 앞서 미군정의 횡포만 언급했지만, 소군정도 다를 것은 없었다. 공산주의 군대는 어딜 가나 '거지꼴'이 기본이었던 탓에 그들이 북쪽에 진주하자 처음에는 '해방군'이라며 환영했고, 처참한 몰골을 보면서 불쌍하다, 애썼다는 마음마저 들어 도와주기도 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그런 해방군이 저지른 횡포는 '강간'과 '강도질'이었다. 밤만 되면 부녀자를 겁탈하고 대낮에도 돈 되는 것을 보면 탐욕스럽게 강탈해갔다. 특히, 손목시계가 주요 표적이었다고 한다. 소련군의 손목에 시계가 4개나 차있는데도 또 손목시계가 보이면 득달같이 달려들어서 빼앗곤 했단다. 그리고 밤이 되면 부녀자들은 집밖으로 나가질 않았단다. 그리고 자경단을 꾸려 겁탈 당하는 부녀자들이 세숫대야 같은 것으로 큰 소리를 내면 구해주는 일이 빈번하게 벌어져서 소련군에 대한 인식이 매우 나빠졌다고 한다. 훗날 소군정이 들어서고 제대로 된 규율이 잡힌 뒤에야 겨우 진정이 되었다고 전하는데, 한 번 당한 나쁜 기억은 좀처럼 잊히지 않는 법이다.

이렇게 북쪽에서는 33세의 젊은 지도자 '김일성'이 주목 받으면서 빠르게 안정을 잡은 반면에 남쪽에서는 혼란 그 자체였다. 민주주의라는 것이 원래 시끌벅적하는 것이라도, 미군정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한국인들은 너무 정치를 좋아해서 탈이라는 것이다. 오죽하면 '한국인 두 사람이 모이면 정당 세 개가 만들어진다'고 말할 정도였겠는가? 각각 한 명이 정당을 꾸리고, 둘이 합작해서 또 하나의 정당을 만들 정도로 한국인들은 '정치질'을 즐겼다고 한다. 그러니 애먼 정당이 우후죽순으로 나타나 저마다 목소리를 높였고, 많을 때에는 60여 개가 훌쩍 넘었다고 하니 무슨 진지한 토론이나 대화를 나눌 수 있었겠는가? 1분씩만 발언을 해도 1시간이 훌쩍 넘기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구심점이 되어야 할 이승만이나 김구, 여운형, 박헌영 등등 쟁쟁한 인물들조차 '좌우'로 나뉘어서 양보를 할 줄 몰랐고, 정치자금을 대는 '친일파'들이 제 목숨 하나 건사하겠다며 이쪽 저쪽을 가리지 않고 돈을 뿌려대니 정치는 '술집(요정)'에서 진행될 판이었다. 이 꼬락서니를 참다 못해 장준하는 "다시 태어나면 일본군 항공대에 입대해서 폭격기를 몰고와 한국정치판을 몰살시켜버리고야 말겠다"는 한맺힌 소리마저 내뱉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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