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편 3권 : 6·25 전쟁에서 4·19 혁명 전야까지> 강준만 / 인물과사상사 (2004)
[My Review MMCLXX / 인물과사상사 28번째 리뷰] 2025년 현재의 대한민국의 국제적 위상을 생각하면 과거 70여 년 전의 '1950년대의 대한민국'을 상상하기 힘들다. 1948년부터 1960년까지 이승만 정부가 이끌던 대한민국은 그야말로 엉망진창이었고, 전쟁으로 망가질 대로 망가졌으며, '대통령 한 명'이 무능하면 얼마나 나라가 나락으로 빠져들고 마는지, 그야말로 '교과서'적으로 잘 보여줬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이런 비극적 교과서가 이승만을 필두로,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이명박, 박근혜, 그리고 윤석열까지 계속 이어져 왔다는 것을 보면 정말이지 아찔할 정도다. 그나마 박정희는 '경제 부문'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한다고 쳐도 자칭 '보수정권'이라고 부르는 대통령들이 하나같이 '민주주의 파괴자'로 등장했다는 것에 통탄을 금치 못할 정도기 때문이다. 각설하고, '50년대편 3권'에서는 이승만의 장기집권 욕심 때문에 얼마나 나라꼴이 우스워지게 되었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지금부터 총정리를 한다.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 '김구'라는 인물과 맞붙어야 했다면, 초대 대통령에 한해서 사실상 '영구집권'을 꾀했던 54년 '사사오입 개헌'을 밀어붙이는 야욕을 벌이자, 이를 막기 위해 새로 등장한 정치세력이 민주당과 진보당이었다. 그리고 56년 5·15 선거에서 조봉암은 대통령 후보로 총 투표수의 23.8%인 216만 3808표를 얻으며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물론 이승만을 이기지 못해서 2대 대통령 자리도 이승만에게 넘겨줄 수밖에 없었지만, 3대 대통령 선거에서 '조봉암'은 김구 못지 않은 경쟁자가 될 것이 자명했다. 물론 이승만은 가만 있지 않았다. 안두희를 이용해서 김구를 암살하였듯이 조봉암도 간첩으로 엮어서 '사형'에 처했기 때문이다. 이른바 '조봉암 죽이기'가 실행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승만의 주장(?)대로 조봉암은 '공산주의자(빨갱이)'였던가? 이에 대해 조봉암은 '사형집행'을 당하기 직전에 유언으로 남긴 말 가운데, "이 박사는 소수가 잘 살기 위한 정치를 했고, 나와 나의 동지들은 국민 대다수를 고루 잘살게 하기 위한 민주주의 투쟁을 했다. 나에게 죄가 있다면 많은 사람이 고루 잘 살 수 있는 정치운동을 한 것밖에 없다. 나는 이 박사와 싸우다 졌으니 승자로부터 패자가 이렇게 죽음을 당하는 것은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다만 내 죽음이 헛되지 않고 이 나라의 민주 발전에 도움이 되길 바랄 뿐이다."(정태영, <한국 사회민주주의정당사>, 세명서관(1995), 476쪽)라는 대목이 있단다. 이 대목에서 이승만이 내세운 '자유민주주의'는 소수를 위한 정치 행위였고, 조봉암은 이런 문제점을 극복하고자 '사회민주주의'를 내세워서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고르게 잘 살자는 정치 행위를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많은 이들이 '모두가 잘 사는 정치행위'를 북한 공산당의 주장과 일맥상통하다며 곡해하고 조봉암을 '빨갱이'로 몰아가곤 한다. 이는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오해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우리 나라에서는 이 둘의 차이점이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의 인식을 갖고 있다. 그러나 공산주의는 '완벽한 평등'을 주장하며 '사유재산'을 절대 인정하지 않지만, 사회주의는 '사유재산'을 어느 정도 인정한다는 점에서 완연한 차이를 보인다. 그렇기에 결론적으로 전세계적으로 완벽한 공산주의 국가는 단 한 나라도 없는 셈이다. 과거의 소련은 말할 것도 없고, 중국도, 북한도 모두 '유사 공산주의'를 표방한 '사회주의 국가체제'를 운영하고 있었고, 지금도 '사회주의'를 실질적으로 하고 있으면서 '공산당 독재'로 폭망하고 있는 나라들이다. 그렇다면 조봉암도 현재의 중국과 북한과 다를 바 없는 '공산당 독재체제 아래 사회주의 국가'를 만들려 했었던가? 사실은 그렇지 않다. 조봉암이 내세웠던 '사회주의 노선'은 오늘날 북유럽 국가들이 취하고 있는 '사회당 집권' 아래 정부를 꾸리고 시민들의 사회복지를 위해서 높은 세금으로 복지자금을 확보해서 전국민이 고르게 부를 누릴 수 있는 국가를 꿈꿨던 정치인이었다.
물론, 1950년대 당시 대한민국 경제수준으로 북유럽 국가들과 맞먹는 정도의 사회복지국가를 실현했을 가능성은 매우 낮을 것이다. 허나 조봉암이 이승만을 압도하고 민주적인 방법으로 평화롭게 정권교체를 해냈다면,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더 빨리 안착했을 것이다. 그것으로 '한강의 기적'을 일으켰다면 우리는 그 뒤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같은 '군사독재 시대'를 건너뛰고 발빠르게 중진국을 넘어 선진국 대열에 올라서는 기적같은 일을 성취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럴 수 있었던 증거로는 우리 나라의 높은 '교육열'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전쟁이 벌어지는 와중에도 끼니를 굶는 한이 있어도 자녀를 학교에 보내서 '신분상승'을 꾀했던 광풍은 일제강점기 때부터 한국인들의 DNA에 원래부터 박혀 있었던 듯이 불어 재꼈으니 말이다. 그런 열의가 이념갈등으로 만들어진 '빨갱이 색출' 같은 잘못된 방향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민주화와 경제성장, 세계와 경쟁력을 갖춘 과학기술의 발달이란 옳은 방향으로 표출되었더라면 분명 '한강의 기적'은 온 국민이 고르게 잘 사는 나라를 이룩하는데 큰 업적으로 달성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시련은 조금 더 진행되어야만 했다. 진보당의 조봉암 사형집행이 이루어진 뒤에, 민주당 후보였던 '조병옥'까지 돌연사를 하고 만다. '신익희'에 이어 두 번째다.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만들려는 '자유당'만 좋은 일이 연이어 벌어진 셈이다. 이때가 1960년 2월 15일이었다. 허나 여론은 좋지 않았다. 이승만 정부의 무능함을 너무 오래 겪었기 때문이다. 이런 무능함 때문에 민주당의 선거구호였던 "못 살겠다 갈아보자"가 온 국민들의 마음을 후벼 팠던 것이다. 자유당 측에서 아무리 "갈아봤자 별 수 없다", "갈아봤자 소용없다"를 외쳐도 당시 신익후 후보를 냈던 민주당에 인기를 막지 못할 정도였다. 그래서 치졸하게도 "못 살겠으면 북으로 가라"고 외치는 수준 낮은 협잡까지 했지만 별로 잘 먹히지 않았다. 그런데 달리는 열차 안에서 신익희는 돌연사 했다. 선거 유세를 돌다 지쳐서 생긴 일이겠지만, 대한민국 민주화에는 치명타를 안겨준 셈이었다. 이때가 56년이었는데, 그 뒤 바통을 이어받을 조봉암까지 59년에 사형집행을 당하고 마니, 60년 3월에 벌어진 '3·15 부정선거'는 부패한 이승만 정권이 벌인 '최후의 발악'이었던 것이다.
이승만이 85세의 고령이었지만 '대항마'로 지목되었던 야당 후보들이 연이어 사망했기 때문에 60년 대선에서 이승만 대통령 당선은 '기정사실'로 보일 정도였다. 허나 문제는 이승만을 든든히 보좌할 '부통령 선거'에서 자유당의 이기붕은 인기가 없었다. 그래서 민주당 후보였던 '장면'이 부통령 당선이 유력했는데, 고령의 대통령 유고시에 부통령이 '자동'으로 대통령이 된다는 점에서 이기붕은 안달을 냈던 것이다. 그래서 3·15 부정선거는 조직적으로 실행에 옮겨졌다. 야당 유세에는 정치깡패를 동원해서 행패를 놓기 일쑤였고, 선거벽보에서 '장면 후보의 사진'을 훼손하는 일 정도는 얌전한 방법이었다. 조직적인 '인력동원'으로 여당의 선거유세에는 참석을 유도하였고, 반대로 야당의 선거유세 때에는 온갖 명분을 갖다 붙여서 참석을 방해하기에 이르렀다. 학부모들에게 '가정방문'을 한다면서 교사들에게 특별수당을 지급하는 따위로 말이다. 이에 학생들은 "학교를 정치도구화 하지 말라"는 구호를 외치며 가두시위에 나섰고, 경북고 학생들을 시작으로 다른 학교들도 시위에 참가했다. 시민들은 학생들의 시위에 박수를 쳤지만, 이내 경찰들이 투입되면서 시위는 번번이 해산되고 말았다. 하지만 자유당은 멈추지 않았다. 투표함 바꿔치기는 말할 것도 없고, '3인조 공개투표'를 예행연습까지 시키는 바람에 '부정선거의 정황'은 발빠르게 소문이 번졌으며, 마산시의 민주당 간부들은 경찰의 제지를 뚫고 투표소 안으로 들어가 '40% 사전투표'와 '3인조 공개투표' 등의 부정선거 현장을 확인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마산의 시민들은 민주당 의원들이 앞장 선 시위에 합류했고, 시위군중은 수천 명으로 불어났다. 경찰이 시위지도자인 민주당 의원들을 연행하며 강력 대응을 하자 시위군중은 더욱 불어나 만여 명을 넘겼다. 이에 경찰은 발포를 했고, 시위대는 분노하며 자유당 당사, 서울신문사, 파출소 등을 파괴했다. 이때 경찰의 발포로 7명이 사망하고, 870명이 부상 당했다.
이런 혼란 속에서도 개표결과가 나왔다. 이승만과 이기붕이 얻은 표가 '유권자수'를 초과한 것이다. 이 자체로 '부정선거'였던 셈이다. 그러자 득표수를 80%나 70%로 하향조정하라는 지령이 전국 개표소에 하달되었다. 그리고 서둘러 '마산 사건'을 무마하려고 했다. 허나 이기붕은 정치부 기자들과의 회견자리에서 "총은 쏘라고 준 것 아닙니까?"라고 말을 꺼냈다. 곧 실수임을 깨닫고 주워 담았지만, 이승만 정권이 국민을 대하는 자세가 어떠한 것인지는 명백하게 드러나게 된 셈이다. 마산 경찰당국은 '공산당 지하조직의 폭동'이라고 조작이라고 발표했다. 마산 경찰은 시위주모자로 잡아들인 26명을 공산당으로 몰아 혹독한 고문을 했고, 거짓 자백과 증거물 조작을 시도해 내놓았다. 심지어 경찰의 총에 맞아 죽은 학생의 호주머니에 '인민공화국 만세'라고 쓴 전단을 집어 넣기까지 했다. 이승만은 마산 사태의 책임을 지고 책임자를 문책 해임하는 선에서 무마하려 했다. 일단은 잠잠해지는 듯 싶었다.
허나 4월 11일 정오쯤에 마산 앞바다에서 교복차림의 10대 소년의 시체가 발견되었다. 눈에는 최루탄이 박힌 채였다. 이 사실이 '사진'과 함께 널리 알려지자 시민들은 분노를 참지 않았다. 마산상고 1학년 김주열 군이었다. 그는 3월 15일 시위에 참가했다가 실종되었는데, 실종 27일만에 참혹한 시체로 발견된 것이다. 그날 밤 3만여 명의 시위대는 시청과 경찰서 등을 습격했고 기물을 파괴했다. 자유당과 관련된 기관이나 개인 집까지 습격 대상이었다. 시위는 걷잡을 수 없이 커져 갔고 15만여 명으로 불어났다. 이제 '이승만 정권 규탄 시위'로 전환된 것이다.
시위는 멈추지 않았다. 마산에서는 12일, 13일까지 계속 되었다. 이 소식을 접한 전국의 중고등학생들은 연일 시위에 동참했고, 이승만 정권을 규탄했다. 전국의 학생들은 이 소식을 어떻게 접했을까? '언론의 자유'가 살아 있었기 때문이다. 박정희 정권 때처럼 정부가 '언론 탄압'을 하며 통제하고 있었더라면 4·19 혁명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역사는 무능하고 부패한 이승만 정권에 준엄한 심판을 내리는 쪽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아이러니 한 것은 시위를 주도한 것은 '중고등학생'이라는 점이다. 대학생 참여는 4월 18일 고려대학생의 시위 참여가 처음이었고, 그전까진 다른 유명 대학의 동참은커녕 무력한 모습마저 보여줄 뿐이었다. 특히 지방의 시위는 점점 격해지는 대도 '서울 시위'는 잠잠했다. 무려 34일이나 지나서야 고려대학생이 나선 뒤에야 혁명의 완성일인 4월 26일까지 이어진 것이다. 오죽했으면 중고등학생들이 '선배들은 각성하라', '선배들은 썩었다'는 구호를 외쳤을까. 서울에 포진하고 있던 유명대학생들은 4·19 혁명의 주역이 절대 아니었음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한다.
이승만 정권의 최대 업적을 꼽으라면 연평균 10%에 해당하는 예산을 '교육 부문'에 쏟아부은 것이라 한다. 1인당 GNP가 100달러도 안 되는 나라의 살림으론 높은 비중이다. 그로 인해 '문자해득률'도 45년 22%에서 59년 78%로 증가했단다. 이를 긍정적으로만 평가한다면 분명 이승만 정권의 최대 치적으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다른 것은 워낙 무능하였기에 보여줄 가치조차 없을 지경이다. 그러나 이조차 오로지 이승만 정권의 공으로 보기에 무리라고 한다. 우리 민족이 지닌 '교육의 한(恨)'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때 근대교육이 시작되면서 얼마나 교육열이 불타올랐던가? 조선 시대 폐쇄적인 신분제로 인해 '양반이 못된 한'을 뜨거운 교육열로 불태웠다. 일본제국주의로 인한 조선인 차별에 의해 '교육열'을 다시 불타올랐다. 해방이 된 후에도 교육열은 식을 줄 몰랐다. 이승만 정권이 '친일파 처단'에는 소극적이면서도 '빨갱이 소탕'에는 적극적인 것도 한 몫 했다. 이른바 '고학력'과 '저학력'을 나누는 기준이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한국전쟁 당시 전쟁터에 끌려가는 기준도 '고학력'은 면제, '저학력'은 징병이었을 정도다. 이런 시국이니 교육열이 높지 않을 이유를 찾기 어려울 정도였다. 일단 서울명문대에 입학하고 졸업만 하면 출세는 보장된 사회에서 뜨거운 교육열을 불태우지 않으면 이상한 셈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승만 정권은 그 훌륭한 학력을 소유한 이들을 포섭해서 '무능하고 부패한 정부 요인'으로 채용할 뿐이었으니, 이조차 최대 업적으로 삼을 수 없는 까닭이다.
허나 뜨거운 교육열 속에서 제대로 된 민주주의를 배운 중고등 학생들의 정의감이 '한국전쟁'의 승패를 가를 진정한 힘이었고, '4·19 혁명'에서 민주화 운동의 주역으로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에게 민주주의는 '서양의 이데올로기'였고, 그것이 '미국 숭배'에서 비롯된 점이 옥에 티일 수는 있겠으나, 그럼에도 우리가 옳다고 여긴 것이 '민주주의'였고, 이를 '실천'으로 옮길 능력이 충분했기에 대한민국은 오늘날 전세계의 민주주의 모범으로 극찬 받은 것이 틀림없다. 이런 엄청난 업적이 '이승만 정부의 무능' 덕분(?)이라는 것이 역사의 아이러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