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사장의 지대넓얕 11 : 시공간의 비밀> 채사장, 마케마케 / 돌핀북 (2024)
[My Review MMCLVII / 돌핀북 11번째 리뷰] 솔직히 말하자면, 그동안 '양자역학'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뉴턴이 '고전 물리학'을 최종 정리한 뒤에 아인슈타인이 등장해서 뉴턴을 뛰어넘는 '상대성 이론'을 밝혀내면서 '양자역학의 기틀'을 마련하는 계기를 제공했는데, 정작 아인슈타인은 만물이 고정불변이라는 '고전 물리학'에 집착하면서, 모든 것은 예측될 뿐, 고정된 것은 없다는 양자역학(불확정성의 원리)을 끝내 부정했기 때문이다. "신은 주사위 놀음을 하지 않는다"는 유명한 말도 바로 여기에서 기원한 것이다.
그런데 난 이런 아인슈타인이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는 왜 고전 물리학의 패러다임을 깨버렸으면서도 어째서 '현대 물리학'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일까? 그런데 이 책 <채사장의 지대넓얕 11>을 읽으니 드디어 이해가 되었다. 바로 토마스 쿤이 지적했던 '패러다임의 문제'였던 것이다. 과학은 혁명적으로 급변하지, 점진적으로 발전하면서 변화하는 것이 아니다. 과학 혁명은 '정치적인 권력 투쟁의 결과'처럼 일관성도 없고, 방향성도 없는 '수평적 변화'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진보를 함에 있어서도 '지체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아인슈타인도 바로 그 '지체현상'을 보인 것 뿐이었던 것이다. 그동안에는 그렇게 똑똑한 사람이 왜 '현대 물리학'의 문을 활짝 열고서 다른 과학자들이 다 건너갈 때, 아인슈타인 혼자만 '고전 물리학'에 남으려 했는지 도통 이해를 할 수 없었는데, 이 책에서 '양자역학의 역사'와 '토마스 쿤의 패러다임'을 비교분석하면서 보여주니 쉽게 이해가 되었던 셈이다. 정말이지 채사장의 인문학적 교양은 정말 범접하기 힘든 경지에 올랐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대단하다 정말.
채사장의 표현을 빌리자면, 갈릴레이, 뉴턴, 아인슈타인 같은 과학자들은 '고전 물리학'의 대표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원인과 결과'가 딱 맞아떨어지는 결정론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이 '상대성 이론'을 증명하자 본격적인 '양자역학의 시대'가 열렸고, 흔히 '코페하겐 학파'로 불리는 닐스 보어,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볼프강 파울리, 막스 보른 같은 과학자들이 등장했고, 이들은 소립자의 세계를 연구하며 '현대 물리학'을 크게 발전시켰다. 그리고 이들은 양자역학의 결과값이 확률로만 예측할 수 있을 뿐, 확정된 것은 없다고 보았기 때문에 비결정론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다. 정리하면, 고전 물리학자들은 '절대주의'에 속하고, 현대 물리학자들은 '상대주의'에 속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아인슈타인 이후 '양자역학'은 크게 발전하였다. 그리고 소립자를 연구하면서 '고전 물리학'의 결정론적인 세계관으로는 결코 해석할 수 없는 '미시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밝혀냈다. 그러자 수많은 과학자들은 설왕설래를 하며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에도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는 '고정불변의 법칙'이 존재한다고 믿는 과학자들이 그 법칙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를 하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그런데 좀처럼 그 법칙은 찾을 수 없었다. 이런 회의감이 들자 과학자들은 점점 '상대주의'적 관점으로 모든 것은 정해진 것이 없고, 오직 확률로만 예측 가능할 뿐이라는 '비결정론적인 세계관'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이런 세계관이 바로 '양자역학의 핵심'이었다. 그리고 그 예측이 매우 정확했기에 오늘날의 현대 기술은 '양자역학'을 바탕으로 큰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그렇다면 모든 것은 '정해진 것'이 없고, 관측자의 관찰만이 유일한 결정 방법이고, 관찰되지 않을 경우에는 그저 확률에 의존해야 하는 것일까? 쉽게 말해서, 우리가 달의 존재 유무도 '관측'으로만 결정할 수 있고, 관측하지 않거나 달을 떠올리지 않는다면 달은 '없다'고 말할 수도 있다는 말이 된다. 왜냐면 '결정'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뭔가 '괴리감'이 들지 않는가? 우리는 '과학'에 대한 믿음이 거의 절대적인 삶을 살고 있는데, 현대 과학은 결정된 것은 아무 것도 없다며, 확률적으로 존재할 수도 있고,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과연 '이따위 과학(!)'을 신뢰할 수 있겠는가?
이는 '고전 과학'에 길들여진 탓이 클 것이다. 갈릴레이나 뉴턴의 시대 때만해도 우리는 과학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것 같은 '과학주의'에 절대적 믿음을 부여했다. 그래서 사기꾼들의 뻔한 속임수일지라도 "과학자들의 말에 따르면..."라는 문구만 곁들였을 뿐인데도 '신뢰도'는 향상한다. 이것이 바로 '결정론적 세계관'에 길들여진 대중들의 생각이다. 그런데 현대 물리학(양자역학)에서는 이런 맹신이 위험하게 된 것이다. 왜냐면 아직까지도 많은 대중들은 '비결정론적 세계관'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세상이다. 비결정론적 세계관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이 '양자역학의 결실'인 스마트폰은 거의 모두가 손에 들고 다니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스마트폰에서 '눈으로 보는 세상'은 사실은 전부다 '허상(가상)'에 불과하다. '실제'가 아닌 디지털 세상에 구현된 이미지와 텍스트를 보여줄 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허상에는 온갖 '거짓'이 난무하고 있다. 그렇기에 스마트폰 속 세상을 절대로 '맹신'해서는 안 된다. 수많은 정보를 회의적으로 비판하고, 그 가운데 자신에게 꼭 필요한 정보, 유익한 정보, 신뢰할 수 있는 정보 등을 따로 걸러내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지금 쓰여 있는 '이 글'도 어떤 이의 주관적 생각일 뿐, 100% 사실만을 이야기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물론 나처럼 선하고 착한 사...쿨럭쿨럭
우리는 이제 '불확정성의 원리'로 가득한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 절대적으로 믿고 의지하고 싶어도 그럴 '존재'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양자역학이란 과학이 발전한 세상을 잘 헤쳐나가며 살기 위해서는 '철학'이 필요해지게 되었다. 이 책의 다음 편이 바로 '철학'인 이유다. 참 신비롭지 않은가? 과학이 첨단을 걸을 때엔 과학자도 철학을 연구해야만 한다는 사실이 말이다. 물론 절대적인 '고전 철학'이 아닌 데카르트 이후 '고정불변의 것'이 있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지만, 결국 세상은 '변화무쌍'한 것이 훨씬 더 많다고 깨우친 근현대 철학자들을 조명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러다보면 '철학의 기초'를 닦은 고전 철학자들을 살펴보지 않을 수 없게 되고 말이다. 참으로 학문의 길은 멀고도 멀다. 공부를 하면 할수록 공부할 것이 많아지는 것을 깨닫게 된 사람은 절로 고개를 숙이고 겸손해지는 법이다. 옛 어른들이 "공부해야지"라고 하신 말씀은 알고 보니 "겸손해져야지"라는 말이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