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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크로스 사이언스
  • 홍성욱
  • 17,100원 (10%950)
  • 2019-01-23
  • : 2,344

[서가명강 2] <크로스 사이언스 : 프랑켄슈타인에서 AI까지, 과학과 대중문화의 매혹적 만남>  홍성욱 / 21세기북스 (2019)

[My Review MMLXXVII / 21세기북스 41번째 리뷰] 책 제목만 보고서 짐작하기로는 '이과'의 과학과 '문과'의 인문학의 경계를 허물고 '통합교과적 지식'을 다루는 과학이야기인줄 알았다. 나 어릴 적만 해도 '문과'는 사탐을, '이과'는 과탐을 집중적으로 공부하는 것이 당연했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수능세대'가 아니라 '학력고사세대'인 탓에 사탐/과탐으로 불리는 '영역별' 분류가 아니라, '사회/과학' 등등의 '과목별' 분류로 대입시험을 치뤘던 탓에, 학과적인 분류는 더욱 그 '경계'가 뚜렷했다. 그래서 이 책에서 소개하는 '과학기술학(STS, Science and Technology Studies)'라는 학문이 꽤나 생소하게 다가왔다. 심지어 '과학기술'과 '사회'의 상호작용을 규명하는 학문이라고 소개되어 있다. 사회가 과학기술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반대로 과학기술이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분석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단다.

이렇게 생소해 하는 나에게 '융합'이라는 낱말이 눈에 들어왔다. 이건 많이 보던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나의 분야만 전문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와 다른 하나'를 접목시키거나, 또는 '여럿의 서로 다른 분야'를 접목시켜서 우리에게 당면한 중요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것이 주목적으로 삼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과학'과 '인문', '예술'을 융합시켜서 우리가 직면한 복합적인 '사회적 조건'을 충족시키거나, 거기에서 생겨난 여러가지 난제를 해결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것이다.

사실, 이렇게 설명을 해도 어렵긴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렇다면 간단히 이해할 수 있도록 예를 들어 보자. 일찍이 왓슨과 크릭에 의해서 '유전자(DNA)의 구조'가 판명되었고, 그 유전자에서 원하는 부분을 잘라내는 기술이 개발되었다. 이를 '유전자 가위'라고 하는데, 근래에는 '유전자 가위'로 특정 유전자를 잘라내기만 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잘라낸 유전자를 다른 생물의 유전자에 붙이는 기술도 '유전학'에서 연구중에 있긴 하지만, 유전자 가위만으로도 충분히 질병을 유발하는 유전자를 잘라서 제거함으로써 치료가 힘든 '난치병'이나 '불치병'을 미연에 예방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기술적으로도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라고 한다. 만약 그렇다면, 가까운 미래에는 '난치병'과 '불치병'으로 고통을 받는 환자들이 상당히 줄어 들 수 있을 것이다. 정말 장밋빛 미래가 그려지는 순간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여기서 '과학기술학'이 작용하기 시작한다. 과연 이 '유전자 가위'라는 기술을 광범위하게 쓰게 될 경우에 우리 사회에 어떤 문제가 발생하지는 않을까? 고민과 비판이 시작되고, 문제가 예측되는 순간 '비난'이 쏟아질 수도 있을 것이다. '유전자 가위'라는 것이 자연상태에서는 극히 희박하게 발생(돌연변이)되는데 반해서, 인간이 어떠한 의도를 가지고 '유전자 가위'로 특정 유전자를 잘라냈을 경우에, 그 이후, 어떤 일이 발생할지 그 누구도 장담하지 못하는 것 뿐만 아니라, 혹여 되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인 돌연변이'를 촉진시켜 '또 다른 인류'가 발생하는 일을 초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윤리도덕적 비난'으로 시작하여 '종교적인 차원'의 목소리까지 쏟아져 나와 큰 혼란이 일어날 수도 있다. 바로 이런 것을 연구하는 학문이 바로 '과학기술학'인 셈이다.

한때 우리는 '과학만능주의'라 하여 과학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었다. 근대 이후, 인류는 '신 중심 사상'에서 탈피하여 '인간의 이성'이 그것을 대신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자부했었다. 정작 인간은 다른 동물과 다르게 '신의 형상'을 본따서 만들었다는 <성경> 속에 담겨 있는 메시지에 심취해서 스스로를 '만물의 영장'이라 여기는 오만이 가득했기에 그랬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과학만능주의'도, '만물의 영장'이라는 소리도 무색할 정도로 겸손(?)을 떨고 있다. 과학이 발전하면 할수록 인간의 능력이 초라할 뿐이라는 사실도 더욱더 명백해졌으니까 말이다. 이는 '코로나19 팬데믹'을 겪으면서 더욱 절실히 깨닫게 된 사실이다. 아주 작은 '바이러스'조차 어쩌지 못하고 '인간의 생명'을 앗아가는 현장에서 속수무책으로 방관만 할 수밖에 없는 경험을 아주 강렬하게 했기 때문이다. 인간은 '백신'을 조속히 만들고 대량공급체계를 갖추면서 '엔데믹'을 맞이하긴 했지만, 또 어떤 바이러스가 창궐해서 인류의 생명을 위협할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여기서 간과할 수 없는 명백한 사실은 우리가 '코로나 바이러스'를 완벽하게 박멸해서 '엔데믹'을 맞이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면역체계가 '코로나 바이러스'를 스스로 이겨낼 수 있을 정도의 시일이 지나자 겨우 안심할 정도의 수준이 된 것이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에도 '코로나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죽어가는 환자가 나오고 있으며, 해마다 '백신'을 준비해서 전세계 사람들에게 동시다발적으로 접종을 함으로써 어느 정도 '유행'을 완화시키며 통제할 수 있는 정도로 심각성을 낮춘 것일 뿐이다.

특히나, 자연재해는 아무리 과학기술이 발전해도 완벽히 막아낼 수는 없다. 물론 아무리 큰 재앙이 닥쳤고, 큰 피해를 입었더라도 슬픔과 절망을 극복하고 '피해복구'에 뛰어들어서 빠르게 원상회복을 할 수는 있겠지만, 애초에 자연재해가 재앙을 불러오지 못하도록 완벽하게 막아낼 수는 없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한마디로 <크로스 사이언스> 해야 한다. 모든 사람들이 '과학기술'의 최신 정보를 접하고 완벽히 이해한 뒤에 적절한 대응을 할 수는 없다. 과학이 결코 쉬운 학문은 아니기 때문이다. 더구나 과학기술에 대한 최신 정보를 접했다 하더라도, 그 정보의 '사실과 가치'를 빠삭하게 이해하고 대처할 수 있는 사람도 절대로 많지 않다. 왜냐면 과학기술이 상당히 복잡하고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더 큰 어려움은 새로 나온 '과학기술'을 열심히 노력해서 겨우 이해할 수 있을 정도까지 학문의 수준을 높였다하더라도, '과학기술의 발전속도'가 훨씬 더 빠르기 때문에 그 노력이 헛수고가 되버리기 일쑤다. 그러니 언제 공부해서 얼마나 도움을 얻을 수 있겠냔 말이다. 그러므로 공부에 전념해야 할 사람은 '전문가'의 범주로 한정되어야 한다. 그럼 우리는 그 전문가가 쉽게 풀어서 전해주는 이야기를 듣고 이해할 수 있을 정도면 충분하다. 그 정도만 되어도 우리 사회가 필요로 하는 과학기술이 전하는 사회문제 해법에 대한 '사실과 가치'를 충분히 이해하고 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최선은 바로 '과학기술에 대한 관심'을 높이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크로스 사이언스'에 대한 관심이 꽤나 높은 편이다. 그리고 실제로도 찬반에 대한 의견을 적극적으로 내놓으며 참여하기도 했다. 바로 '과학소설'을 통해서 말이다. 이를 테면 메리 셀리의 <프랑켄슈타인>, 조나단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 조지 오웰의 <1984>,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같은 소설을 읽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또한 수많은 영화속에서도 관심과 참여를 할 수 있었다. <가타카>, <로보캅>, <메트릭스>, <옥자>, <AI> 등등 이 책에 거론한 소설과 영화만으로도 충분히 이해를 높일 수 있을 것이다. 전부 다는 아니어도 한두 작품은 이미 보지 않았는가? 그리고 '생각'을 해보았을 것이다. 어떤 내용이었고, 어느 점이 문제였으며, 어떤 해결책을 내놓았는데, 그로 인해서 생긴 문제점은 무엇이었고, 그 문제점을 해결했거나, 그 반대일 경우에 우리 인류가 당면한 미래는 '유토피아'였는지, '디스토피아'였는지, 우리는 이미 보았다. 그 다음에는 '당신의 생각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던지는 것이다. 그 정도의 관심만으로도 충분히 '크로스 사이언스'를 즐길 수 있게 된다.

어떤 '사실'에, 어떤 '가치'를 교차시키는 일은 서로 다른 '두 문화의 간극'을 좁혀나가는 일이라고 저자인 홍성욱 교수는 지적한다. 우리가 이해한 '과학적 사실'에, 우리가 생각하여 내린 '인문학적 가치'를 접목시키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말로 이해해도 무방하다. 뭐, 몰라도 살아가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을 수는 있겠지만, 그렇게 아무 문제도 없이 살기만 하다가는 어느 순간 싹다 바뀐 세상에서 '도태'되어 아무 것도 이해할 수 없고, 참여조차 할 수 없는 '무가치한 삶'을 연명하게 되는 순간을 맞이할 수도 있다. 햄버거 하나 '주문'하고 싶을 뿐인데, 매장 내에 '사람'은 하나도 없고, '키오스크'만 나란히 나열되어 있는 공간을 마주했을 때의 당혹감 같이 말이다. 세상은 참으로 빠르게 변해간다. AI가 가져올 변화는 더욱 극심할 것이다. 지금이라도 '과학기술학'에 관심을 두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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