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사장의 지대넓얕 8 : 개인 VS 사회> 채사장, 마케마케 / 돌핀북 (2023)
[My Review MMLXI / 돌핀북 8번째 리뷰] 정치가 어려운 까닭은 '정답'이 없기 때문이다. '정답 없는 것'이 비단 정치만의 문제는 아니지만 정치는 '실생활'과 밀접한 정도가 아니라 '실생활, 그 자체'인 까닭에 어떤 현안이 떠오르든 반드시 '옳은 정답'을 찾아야만 하겠기에 극도로 어려울 수밖에 없다. 단적인 예를 들어서, '개인의 권리'와 '사회의 이익'이 첨예하게 대립할 때에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것인지 망설이게 된다.
홍수가 나서 댐이 범람할 위기에 처했다고 치자. 이대로 10분이 지나면 오메가시티가 그대로 물속에 잠길 위험에 놓였다. 물론 범람 위기경보가 조기에 울려서 시민들은 대부분 대피에 성공해서 도시에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아서 안전하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러나 이대로 범람이 되어서 오메가시티를 덮친다면 수많은 공장과 회사들, 발전소와 군사시설, 병원, 교육시설, 박물관과 문화재들 모두가 물속에 잠겨서 복구하는데만도 엄청난 비용과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고, 당장 수도인 오메가시티가 기능을 상실한 틈을 타서 '적국'이 침공할 우려도 있으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군사시설'만큼은 지켜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 범람할 물길을 돌릴 수 있는 '조그만 댐'을 하나 폭파시키면 오메가시티로 들어갈 물을 대부분 '알파 마을'로 돌릴 수 있어서 안전을 확보하고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으니 '사회의 이익을 생각한다면 '조그만 댐'을 폭파시켜서 범람을 '알파 마을'쪽으로 유도해야 옳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조그만 댐'을 폭파해서 물을 '알파 마을'로 돌린다면 그 안에 살고 있는 백여 명의 마을 주민들은 미처 대피할 시간이 없어서 모두 죽고 말 것이다. 더구나 이제 남은 시간은 5분밖에 남지 않았고 '알파 마을'의 주민들은 대부분 노년층이라서 지금 당장 알린다고 해도 안전하게 대피할 시간도, 구조할 시간도 없다. 하지만 마을의 늙은 주민들 백여 명을 '희생'시키면 오메가시티를 구할 수 있고, 오메가시티를 복구하는 비용보다는 훨씬 적은(?) 비용을 들여서 알파 마을도 복구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범람이 지나고 나면 '알파 마을'에 사는 사람도 더는 없을테니 복구비용 자체를 아낄 수가 있을 것이다. 비록 백여 명의 알파 마을 주민들이 희생되는 것은 안타깝지만, '비용적인 측면'에서 생각해본다면 당연한 결정일 것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결정해야 할 '당신'의 부모님이 알파 마을의 주민이고 '당신'의 아이들마저 방학을 맞아 부모님댁에 놀러 가서 함께 머물고 있다. 과연 당신은 홍수라는 재난 앞에서 '사회의 이익'을 앞세워 오메가시티를 구할 것인가? '개인의 권리'를 생각해서 알파 마을을 구할 것인가? 당신의 선택은? 60초 뒤에 공개하겠다.
우리는 개인의 권리를 더 중요하다고 여기면 '개인주의'라고 부른다. 그리고 사회의 이익을 더 중시한다면 '집단주의'라고 말한다. 이 둘 가운데 무엇이 옳은지는 단정 지을 수 없다. 왜냐면 '주관적인 신념'에 따라 다른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둘 가운데 어느 쪽을 '선택'하든 사실 그리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웬만한 사안들은 '어느 쪽의 이익'이 더 크고, 더 중요한지를 따지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극단적인 경향'을 띠게 되면 나타난다. 개인주의의 극단화는 '이기주의'이고, 집단주의의 극단화는 '전체주의'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두 가지가 문제다. 하지만 '이기주의'는 어느 정도 선에서는 '통제'가 가능하다. 사회 전체가 건전하다면 '이기적인 행동'을 일삼는 소수를 처벌하거나 불이익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사회 전체가 '이기주의'에 빠져서 저들의 욕심만 채우면 그뿐이라고 여긴다면 큰 문제겠지만, 그때에도 '다수의 이익'을 생각하는 쪽으로 흐르는 경향이 있어서 제 욕심만 채우려는 '이기주의자'들을 혼내주려는 방향으로 흘러가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체주의'는 자칫 잘못 되었을 때 '사회 전체'를 불이익 줄 수 있는 주체가 없기 때문에 아주 큰 아픔을 겪게 된다. 바로 '전체'를 위한다는 명목 아래 수많은 사람들을 희생시키고, 그런 희생을 정당하게 여기는 사회는 종종 '광기 어린 폭력'을 자행하곤 했기 때문에, 우리는 '전체주의'를 경계해야만 한다. 더구나 전체가 '비윤리적인 경향'을 띠어서 개인이 어쩔 수 없이 따라야 하는 경우가 발생하기 때문에, 전체주의 사회에서는 그런 개인의 행동에 책임을 묻지도 않고, 잘못을 자행한 개인도 책임을 지지 않으려 한다. 왜냐면 책임은 '전체'에게 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의 파시즘, 독일의 나치즘, 일본의 군국주의 등이 대표적인 '전체주의'가 보여준 폐해다. 이런 전체주의는 흔히 '독재자'를 낳고 독재자는 자신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 '사회 전체의 이익'이 보장(?)된다는 사상을 강제 주입시키며 사회 전체가 '나쁜 짓'을 저지르는 것을 그저 방치하고, 그로 인해 사회가 망가지길 바란다. 그래야 자신의 '영구 독재'가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그럼 사회적인 관점에서 '좋은 일'과 '나쁜 짓'을 구분하는 잣대는 무엇일까? 그건 바로 '윤리'다. 수많은 사람들이 절체절명의 위기의 순간에도 '윤리'를 따르려는 까닭은 아무리 자신의 권리나 사회의 이익을 소중히 여겨서 그 권리와 이익이 더 많은 쪽으로 따르려 한다고 해도, 그렇게 행동하는 원칙이 '윤리'에 위반되는 것이라면 '나쁜 짓'으로 간주하고 따르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윤리'조차 주관적인 신념에 따라서 달라지긴 하지만, 그래도 두 가지로 구분하곤 한다. 하나는 '의무론'이고, 다른 하나는 '목적론'이라고 한다. 도덕 법칙이나 의무를 준수하는 행위가 윤리라고 생각하는 '의무론'과 다수의 이익을 창출하는 행위가 윤리라고 생각하는 '목적론'이다. 의무론을 따르는 대표적인 사람들이 바로 '종교인'들이다. 또한 목적론을 따르는 대표적인 사람은 '안중근'을 예로 들 수 있다. 그리고 '의무론'은 과거지향적이고, '목적론'은 미래지향적이라고 볼 수도 있다.
물론 윤리조차 '절대적인 잣대'는 아니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절대적인 도덕(정언명법)을 말하며, 이렇게 외쳤다. "나의 마음을 경외심으로 채우는 두 가지가 있다. 내 머리 위에 반짝이는 하늘의 별과 내 안의 도덕률이다."라고 말이다. 칸트는 내가 하는 '착한 일'로, 세상 사람들이 감명을 받아 '착한 일'을 따라하게 할 수 있다면, 온 세상은 착한 사람들로 가득한 선한 세상이 될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렇게 모든 상황에서도 옳은 것, 다시 말해 '절대적인 도덕'을 법칙으로 세우면 도덕이 무너지는 시대를 되살릴 수 있다고 여겼다. 하지만 이에 반론을 던진 이가 있었다. 바로 <공리주의>를 쓴 벤담이다. 절대적인 것은 없다. 많은 사람이 행복할수록 이익일 뿐이라면서 '목적론'적인 관점에서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고 주장했다. 물론 벤담의 주장은 너무 극단적인 주장이었기에 나중에 존 스튜어트 밀이 '원초적인 쾌락'만 따질 것이 아니라 '질적으로 높은 수준의 쾌락'도 고려해야 한다면서 '공리주의'를 한층 더 업그레이드 시키기도 했다. 뭐, 양적이냐 질적이냐도 주관적인 신념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기에 어려운 문제겠지만 말이다.
어떤가? 정치, 참 어렵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을 해보면 분명히 '좋은 선택'을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정치가 어렵게만 느껴진다면, 그건 '생각'을 전혀 하지 않으려 들기 때문일 것이다. 좋은 정치를 하기 위해서는 굉장히 많은 것을 '고려'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이 사람, 저 사람의 서로 다른 생각을 경청하고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는 혜안을 갖출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치인들은 기본적으로 똑똑해야 한다. 그러나 똑똑하다고만 해서 정치를 잘 한다는 착각은 금물이다. 똑똑해도 '자기 이익'만 챙기려 들고, '자기만 옳다'고 고집을 부린다면 정치가 아니라 '독재'를 할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치 좀 잘 하는 사람을 뽑고 싶다면 '실력'도 갖췄으면서 '윤리'적인 사람을 골라야 한다. 그렇다고 '도덕적 흠결'이 전혀 없는 착한 사람만 뽑으라는 얘기도 아니다. 털어서 먼지 안 나오는 사람은 없다는 속담을 고려해서 '최선'이 아닌 '차악'을 선택하는 지혜를 유용하게 써먹어야 한다. 대한민국 '검찰공화국'을 만들어서 자기편이 아닌 사람을 무턱대고 '범죄자 취급'하고 내로남불 했던 '윤석열과 아그들'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것이다. 자신들이 저지른 악행은 생각도 않고, 남들이 저지른 행동 하나하나를 '법적으로' 따져서 수사선상에 올려놓고 결국엔 '깨끗하지 않은 사람'으로 만들어서 무리하게 감옥에 쳐넣으려고 하더니, 자신들은 내란과 외환이라는 무거운 죄를 저지르고도 '모든 사법절차'를 따져서 법망을 피해가려는 '법꾸라지 행태'를 자행하고 있지 않느냔 말이다. 이런 사람들을 절대로 두 번 다시 '대한민국 정치'에 발을 들여놓지 않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한다면, 정치가 어렵게 느껴지지만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