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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있는 구석방
  • 벌거벗은 세계사 8
  • 최호정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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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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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CMXXIX / 아울북 28번째 리뷰] 서구열강의 팽창과 제국주의의 탄생은 끝내 '세계대전'을 일으키고야 말았다. 서세동점의 시대가 펼쳐지자 유럽의 각국은 저마다 '더 많은 식민지'를 차지하기 위해 혈안이 되었고, 그런 만행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문명화'라는 이름을 붙여 아름답게 포장하기 시작했다. 결국은 자신들의 배를 불리기 위해 '약자'를 미개하다 폄훼하고 약탈과 학살을 숱하게 자행했으면서 '상냥한 말과 커다란 채찍'을 들고서 겉으로는 문명이라 부르짓고 속으론 폭력을 일삼는 이율배반적인 짓을 자행했다. 그런데 유럽의 나라들 중에서도 '후발주자'에 속했던 독일 같은 나라들은 영국과 프랑스, 러시아의 팽창 정책을 부러워하면서도 저들이 다 차지하고 남은 '자기들 몫의 땅'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확인할 뿐이었다. 이런 절망감속에서 독일은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영향력 아래 놓인 '세르비아 민족주의자'의 열망을 마주하게 된다. 과연 그 열망은 어디로 폭발하게 될까?

이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독일 제국의 탄생'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세기 중반까지도 '독일'은 통일체 국가가 등장하지 못하고 프로이센, 하이에른, 작센 등의 35개 작은 나라가 동맹으로 묶인 '독일 연방'으로 존속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독일 제국'으로 통일한 주역은 프로이센의 총리, 비스마르크의 노력 덕분이었다. 그는 연방으로 뿔뿔이 흩어져 있던 작은 나라를 하나로 합치는 것으로도 모자라 주변 이웃나라와도 관계를 정상화시켜 평화적으로 나라를 안정시키는 것이 최우선 과제라고 보았다. 그러나 독일의 새 황제로 등극한 '빌헬름 2세'는 젊은이답게 독일 제국을 빠르게 강대국으로 만들기 위해 무엇보다 '식민지 확보'가 중요하다고 여기고 강력한 팽창 정책을 밀어붙이는 것이 그만 실책으로 작용하고 말았다. 첫째는 러시아와의 동맹을 끊었고, 둘째는 해군 양성에 집중하며 영국과 불편한 관계가 되었고, 셋째는 프랑스가 점찍어 둔 모로코의 독립을 지지하여 프랑스와 앙숙 관계가 된 것이다. 철혈재상이었던 비스마르크가 평생에 걸쳐 쌓은 평화적 외교력을 한 방에 날려버렸다. 그리고서 겨우 손을 잡은 것이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과의 관계였다.

그러다 1914년 6월 28일 오전 10시 사라예보에서 총성 두 발이 울렸다. 세르비아 청년 가브릴로 프린치프가 오스트리아 대공 부부를 살해한 것이다. 당시 세르비아는 발칸반도에 슬라브 민족들을 위한 나라를 건설하고자 했다. 그런데 게르만 민족에 속한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이 반대를 하자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이 움직이기 시작했고, 그 가운데 '검은 손'이란 단체의 조직원이었던 가브릴로 프린치프가 마침맞게 세르비아를 찾아온 틈을 노려 저격에 성공한 것이다. 하지만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은 섣불리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내릴 수 없었다. 왜냐면 범슬라브계 국가 가운데 러시아가 있었기 때문이다. 세르비아의 뒤를 러시아가 받쳐주고 있는 형국이었던 것이다. 이를 틈타서 독일 제국의 빌헬름 2세는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을 지원하겠다고 나섰다. 이를 믿고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은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한다. '범슬라브 vs 범게르만'의 전쟁이 발발한 셈이다.

그런데 이 선전포고가 줄줄이 이어지게 된다. 왜냐면 비스마르크와는 달리 빌헬름 2세가 주변 국가와 '앙숙 관계'로 만들어 버린 것이 전쟁의 도화선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이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하자, '러시아'는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에게 선전포고를 한다. 그러자 약속했듯이 '독일 제국'이 러시아를 향해 선전포고를 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그친 것이 아니다. 당시 프랑스는 러시아와 동맹을 맺고 있었는데, '프랑스'가 러시아를 돕겠다고 독일 제국에 군대를 보낸다. 이에 독일도 군대를 보내는데 하필 '중립국'이었던 벨기에를 통과해서 군대를 출병시킨 것이 화근이 되어 벨기에와 동맹이었던 '영국'도 독일을 향해 선전포고를 한다. 이에 '독일 제국'도 영국에 선전포고를 하게 되는데, 뜬금없이 '오스만 제국'이 독일 제국의 편을 들게 된다. 왜 그랬을까? 당시 영국이 오스만 제국에게 '군함'을 팔았는데, 돈만 받고 군함을 보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기에 세르비아와 국경분쟁을 하던 '불가리아'도 독일 제국의 편을 들어 전쟁에 참전하게 된다.

이렇게 전쟁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버렸다. '동맹국'은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 독일 제국, 오스만 제국, 불가리아이고, '연합국'은 세르비아, 러시아, 프랑스, 벨기에, 영국으로 서로를 향해 무차별적인 총공격이 펼쳐진 것이다. 그렇다면 전쟁의 빌미를 제공한 '빌헬름 2세'는 무슨 생각으로 전쟁의 판을 이렇게나 키운 것일까? 믿는 구석이 있긴 했다. 바로 '슐리펜 계획'이다. 독일군의 참모총장이 '슐리펜'이었는데, 그는 동부전선의 러시아와 서부전선의 프랑스를 동시에 상대해서 모두 승리할 수 있는 비책이 있다면서, 독일의 강점은 '철도 시설'이 잘 깔려 있다는 점을 들었다. 독일이 자랑할 만한 것이 앞선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바로 이 독일의 철도가 한 몫 단단히 했기 때문이다. 제 시간에 딱딱 맞춰서 병력과 물자를 제때에 보낸 덕분에 프로이센은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압도적으로 승리를 거뒀으니 자신할 만도 했다. 그렇게 서부전선에서 빠르게 승리를 거둔 뒤에 철도로 병력을 동부전선으로 보내면 양쪽 모두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다는 계획이었는데, 초장부터 실패했다. 슐리펜의 예상과는 달리 '서부전선'은 벨기에의 저항으로 난항을 거듭했고, '동부전선'은 독일의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독일을 압박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그 유명한 프랑스의 택시기사들이 병력과 물자를 전선으로 빠르게 실어날랐기에 독일은 양쪽에서 힘겨운 전쟁을 해야만 했다.

그래도 러시아와 맞붙은 동부전선에서 독일은 꽤 선전했다. 허나 서부전선은 '참호전'이 되면서 양쪽의 병력만 축내는 상황을 만들어 갔다. 초반에는 독일군의 '기관총'이 활약했으나, 영국군은 '탱크'로 맞대응을 했고, 다시 독일은 '독가스'를 살포해 반격을 꾀했지만, 연합군은 '방독면'을 만들어 꿋꿋하게 버텼다., 여기에 비행기에서 손으로 직접 '폭탄'을 떨어뜨리는 일까지 감행했지만, 양쪽은 어느 한쪽이 더 우세하지 못한 팽팽한 대결양상이 펼쳐졌다. 더구나 영국의 해군이 활약하며 전쟁이 벌어지는 곳곳에 병력과 물자를 실어나르자 독일은 잠수함을 내보내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펼쳐보인다. 그런데 엄청난 활약을 하던 독일의 잠수함은 뜻하지 않은 사건을 불러오게 되고, 독일을 패배로 몰아넣었다. 바로 '미국의 참전'이었다.

영국의 여객선 '루시타니아호'가 미국의 뉴욕을 출발해서 영국 리버풀로 향하고 있었는데, 독일군의 잠수함이 이 배를 침몰시켜 버린 것이었다. 이 배에는 미국의 승객 128명이 타고 있었기에 독일이 결국 미국의 심기를 건드린 셈이었다. 하지만 미국도 곧바로 참전을 선언한 것은 아니었다. 아직까지는 '외교 단절'만을 선언하며 전쟁 참전은 망설이고 있었다. 왜냐면 미국은 '유럽의 간섭'을 받지도 않고 '미국도 간섭'하지 않는다는 먼로주의를 실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잇따라서 사건이 벌어진다. 바로 '치머만 전보 사건'이다. 영국은 미국의 참전을 바라고 있었는데, 마침 독일이 미국의 참전을 우려하며 멕시코에게 독일과 동맹을 맺으면 그 대가로 멕시코가 미국에게 빼앗긴 땅을 되돌려주겠다는 내용의 전보를 보냈는데, 영국의 외무장관인 아르투어 치머만이 이 '비밀 전보'의 내용을 해독해내서 미국에 알려준 것이다. 이에 미국의 대통령 우드로 윌슨은 1917년 4월 6일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고 전쟁에 참전하게 된다.

그러나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미국의 참전으로 '연합군'의 전세가 늘어나긴 했지만, 곧이어 터진 '러시아 혁명'으로 블라디미르 레닌이 '소비에트 정부'를 수립했고, 이듬해에 독일과 '브레스트리토프스크 강화조약'을 맺고 전선을 이탈한다. 또한 길어진 전쟁에 '서부전선'에서도 연합군에 균열이 발생하기 시작한다. 병사들이 오랜 전쟁에 지쳐 명령을 따르지 않게 된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막강한 화력과 엄청난 물자보급은 독일을 밀어붙이기에 충분했다. 1500대의 항공기로 독일군 참호에 폭탄을 퍼붓기 시작하자 독일군은 견디지 못하고 후퇴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독일은 끝까지 버텼지만, 다른 동맹국은 그렇지 못했다. 불가리아, 오스만 제국,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이 차례대로 항복을 하자 독일도 더는 버티지 못하고 1918년 11월에 휴전 협정문에 서명을 하고 '제1차 세계대전'을 종식시켰다. 이듬해 '베르사유 조약'을 맺은 독일은 패전국으로 막대한 배상금을 물어야만 했다. 무려 1320억 마르크(한화 약 3천조 원)이나 되었으며, 땅도 빼앗기고, 군대 규모도 현저히 줄어야 했으며, 최신무기는 보유할 수도 없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 '베르사유 조약'은 또 다른 전쟁을 낳게 되었다. 감당하지 못할 배상금으로 독일은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 상황에 처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경제대공황'까지 밀어닥치자 독일은 '살 궁리'부터 하게 된다. 그로 인해 독일은 '히틀러'가 등장하게 된다.

히틀러는 피폐해진 독일 국민들에게 '희망'을 품게 만들었다. 전쟁배상금은 갚을 필요가 없고, 독일국민은 원래부터 위대했으며, 그럼에도 독일국민이 힘들게 살 수밖에 없는 까닭은 '유대인들 탓이다'라면서 독일국민들을 선동하기 시작했다. 1930년대 당시 독일민간은행의 절반이 '유대인 소유'라고 할 정도로 경제적 위치가 높았는데도, 그들이 '독일경제'를 위해서 내놓는 것이 별로 없는 것 같다는 '가짜뉴스'를 퍼트렸다. 그리고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나치당'을 중심으로 온 국민이 똘똘 뭉친다면 위대한 독일국민이 못할 일이 없다면서, 개인보다 국가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파시즘'을 퍼뜨리고서, '나치당'이 선거에서 최대 정당으로 올라서고 '히틀러'를 총통의 자리에 오르게 했다. 그리고 히틀러는 독일의 영광을 되찾겠다면서 '베르사유 조약'을 무시하고, '군사력'을 키워나갔다.

여기에 이탈리아와 일본도 '파시즘'에 매혹되어 파시스트 무솔리니와 군국주의 일왕을 중심으로 똘똘 뭉치기 시작했다. 이들 파시즘 국가들은 '침략 전쟁'으로 국가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국민들의 불만을 잠재우겠다면서 애국심으로 포장해서 국민들을 선동했다. 국가를 위해서라면 목숨도 아깝지 않다는 사상을 주입하며 '국익'을 위해서라면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선전선동을 끝없이 해댔다. 그리고 1939년 9월 1일,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은 시작되었고,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에 선전포고 했으며, 이탈리아와 일본은 독일과 '추축국'을 형성하며 전세계가 또다시 요동치기 시작했고, 이에 소련과 중국, 그리고 미국도 참전하면서 60여개 국의 나라가 6년간 전쟁을 이어 나간다.

한편,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기 한 해 전에 독일의 과학자들이 '핵분열 현상'을 연구하고 있었다. 영화 <오펜하이머>에도 이 상황이 잘 나타나 있지만, 우라늄 원자핵이 두 개로 조개질 때 엄청난 에너지가 방출된다는 것을 알게 되자, 과학자들은 이 '핵분열'을 이용해서 엄청난 에너지를 활용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굉장히 위험한 생각이었다. 왜냐면 지구안에서 '태양에너지'를 생성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자칫 '핵분열 실험'으로 엄청난 파괴력을 이끌어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침맞게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자 과학자들은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 물론 독일에서는 '우라늄 클럽'을 만들어 발빠르게 핵폭탄을 제조하려 했지만 말이다. 1차 세계대전의 참상을 겪었던 이들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면 끔찍한 일이 재현될 것이란 사실에 경악을 금치 못했지만, 일부는 '애국심'을 발휘해서 독일 나치에 핵폭탄을 제조하려 했고, 또 다른 일부는 이를 막기 위해 '독일 나치의 만행'을 막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 가운데 미국에서는 '히틀러'가 핵폭탄을 만든다는 소식에 우려는 나타냈고, 그럴 바에 미국이 먼저 핵폭탄을 만들겠다는 '맨해튼 프로젝트'를 서두르게 된다. 이곳의 총 책임자 '오펜하이머'는 결국 핵폭탄 실험(트리니티 실험)에 성공하고 핵폭탄을 만드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그 사이에 독일의 히틀러가 자살하고 유럽에서의 전쟁이 끝나버리고 말았다. 핵폭탄 제조까지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나버린 것이다. 그렇게 전쟁이 종식되었으니 핵폭탄은 마지막 실험을 포기하고 제조를 멈췄을까? 그건 아니었다. 미국은 일본과 '태평양 전쟁'을 수행중이었고, 핵폭탄을 가지고 있으면 미국이 최강의 무기를 손에 쥐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만으로도 '전쟁을 종식'시킬 수 있는 효과를 얻게 될 거라며 실험을 강행했고, 결국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핵폭탄을 투하시키며, 전세계에 미국이 '핵폭탄'을 보유하고 있다는 과시를 하게 된다.

일본의 항복을 받아낸 미국은 엉뚱하게도 일본이 아닌 한국을 '분단국가'로 만들어버렸다. 일본이 절대적인 열세에 놓였는데도 항복을 하지 않고 버티자, 미국은 소련의 참전을 요청했고, 소련은 히로시마에 핵폭탄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서야 뒤늦게 참전을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소련의 참전으로 소련군이 '일본 본토'로 들어간 것이 아니라 엉뚱하게도 중국의 만주와 한반도의 북부 지역으로 소련군을 보냈다. 왜 그랬을까? 1945년 당시에는 그곳도 '일본군 점령지역'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소련은 참전을 빌미로 과거 '러일전쟁' 때 빼앗지 못했던 영토를 우선적으로 점령해나가기 시작했고, 그렇게 만주와 한반도를 소련의 영향력 아래 두려고 했다. 이를 막기 위해 미국은 부랴부랴 '38도선'을 긋고 한국을 분할통치하자고 제안하게 된다. 소련군의 입장에서는 손해보는 것이 없기에 바로 승낙을 해버린다. 그렇게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의 항복으로 한국이 '분단국가'가 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진다.

그렇게 제2차 세계대전이 종식되자 전세계는 빠르게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자본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진영간의 대결 양상인 '냉전'에 돌입하게 된다. 뜨거운 화력을 쏟아내는 '열전'과 달리 '냉전'은 총소리 하나 없이 팽팽한 대결을 벌이는 차가운 전쟁이란 의미였다. 이 냉전시기에 한국만 분단된 것이 아니었다. 독일도 서독과 동독으로 분단되었다. 이에 미국은 '마셜계획'으로, 소련은 '몰로토프 계획'으로 각각 서독과 동독의 경제를 부흥시키려 경쟁을 벌이게 되었는데, 이렇게 정치적, 경제적 대결 양상은 점점 세를 불려나가는 방향으로 진행되며, 이른바 '철의 장막'이라는 것이 생겨나게 되었다. 이렇게 팽팽한 경쟁은 군사동맹기구를 만드는 것으로 확장되었는데, 미국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소련은 '바르샤바조약기구(WTO)'로 군사대립을 이어나갔다. 이 대립은 '베를린 봉쇄'로 점입가경이 되었고, 이후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아랍이스라엘전쟁'도 이 두 진영간의 '대리전' 양상으로 펼쳐보였다.

이런 군비경쟁은 '제3차 세계대전'을 촉발시키는 위기를 불러일으켰는데, 이른바 '핵전쟁 위기'로 번진 소련의 '쿠바 미사일기지' 건설은 아주 끔찍한 전쟁이 벌어질 뻔한 아찔한 순간이었다. 이런 핵전쟁 위기는 '핵개발 경쟁'으로 인해 벌어졌는데, 이때 양쪽의 '스파이'들이 대활약을 했다. 특히, 핵 개발에서 뒤쳐진 소련이 미국의 정보를 빼내는데 성공해서 불과 4년만에 '핵폭탄 보유국'이 되는 사건은 더 강한 핵폭탄 보유 경쟁으로 치닫게 된다. 결국 끔찍한 '차르 봄바'라는 수소폭탄까지 개발에 성공한 소련은 내친김에 미사일 개발(스푸트니크 1호)까지 성공하자, 미국은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차르 봄바의 폭발력을 본 소련도 놀라긴 마찬가지다. 자기들이 성공했으면 미국도 조만간에 성공할테고, 서로 핵폭탄을 발사하는 전쟁이 벌어지면 두 나라 뿐만 아니라 전세계가 공멸할 수밖에 없다는 두려움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두려움도 잠시 '쿠바 사태'가 벌어지며 두 나라는 전쟁 직전까지 가는 극한의 경험을 겪게 된다. 소련은 쿠바에 미사일기지를 만들어 핵폭탄을 실어나르려 했고, 미국은 튀르키예에 미사일기지를 만들어 맞불을 놓았기 때문이다. 천만 다행으로 소련의 흐루쇼프가 먼저 타협안을 제시했고, 미국이 쿠바를 침공하지 않는다면 소련도 쿠바에 미사일기지를 설치하지 않겠다는 라디오 방송을 발표하면서, 케네디에게 튀르키예의 미사일기지를 철수하면 소련도 쿠바에서 철수하겠다고 하면서 일단락이 되었다.

세계는 20세기 내내 전쟁을 일삼았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을 시작으로 1990년대 소련붕괴까지 열전에서 냉전으로 이어지는 숱한 군사적, 정치적, 경제적 대결 양상은 끝없이 재현되었고, 그로 인해 숱한 인명피해와 천문학적인 재산피해로 인류는 모진 고통을 겪었다. 그렇다면 21세기에는 전쟁을 종식시키고 평화와 안정을 찾았을까? 안타깝게도 그렇지 못하다. 전세계는 다시금 크고 작은 전쟁을 일삼고 있으며, 자국의 정치적, 경제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과거에 했던 못된 짓'을 다시 되풀이 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말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또다시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나쁜 놈들의 전성시대가 다시 돌아오는 것일까? 절대로 그래선 안 될 텐데, 참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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