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Review MCMXXI / 돌핀북 1번째 리뷰] 지적 대화를 나눈다는 것은 정말 축복이다. 보통은 '대학교육'을 이수한 학사 수준 이상의 지식인들이 나눌 수 있는 전문적인 의사소통을 일컫는 말이 '지적 대화'겠지만, 하나의 주제로 1시간 이상 웃고 떠들 수 있을 정도의 교양을 쌓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능한 대화인 것이 일반적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 주위에 이런 '지적 대화'가 나눠지는 모습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전세계에서 가장 높은 '교육열'로 뜨겁고, 전세계에서 카페와 도서관이 가장 많아서 '담론'을 나눌 수 있는 장소가 널리고 널렸는데도 '지적 대화'를 나누는 사람을 찾아보기는 참 힘들다. 그냥 '수다'를 떠는 사람들은 많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지적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는 '말'을 많이 해야 할까? 물론, 어느 정도 수준 높은 '주제'를 강의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이 뛰어나야 '담론'을 나눌 수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말을 잘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바로 '경청'이다. 경청은 '상대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는 뜻도 있지만, '상대의 의견을 잘 듣고, 정리를 잘 해서, 완벽히 이해하는 것'을 내포하고 있기에 지적 대화를 나눌 때 절실하게 요구되는 능력이다. 다시 말해, 지적 대화는 '목소리가 큰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목소리만 크면 오히려 '상대의 의견'을 묵살하고, '자기 주장'만 옳다고 얘기할 공산이 크기 때문에 지양해야 할 자세다. 그리고 경청을 잘 하면 '동영상 강의' 내용을 들을 때도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고, 심지어 '책 읽기'를 할 때에도 핵심내용을 잘 파악하는 눈썰미도 더불어 챙길 수 있는 유용한 기술이다. 그런데 우리 주위에는 이렇게 '경청하는 자세'를 갖춘 사람이 별로 없다. 그래서 들어도 그만, 안 들어도 그만인 '수다'만 떨며 시간을 죽이는 경우가 많다.
그래도 뭘 좀 알아야 '지적 대화'를 하든, '경청'을 하든 할 것 아니냐는 볼멘소리를 할 수도 있다. 그렇기 위해서 이런 책이 필요한 것이다. 이 책은 '채사장'이 쓴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이란 책의 '어린이책' 버전이다. 이 책을 통해서 뭐라도 '지적 대화'가 흐르는 '담론의 장소'에서 '경청'할 수 있는 능력을 배우고 익힐 수 있다. 물론, 어린이라도 말이다. 사실 '지식'이라는 것이 별 것 아니다. 초중고 학창시절에 배운 모든 것이 다 '지식'이었다. 그런데 그 소중한 지식을 그저 시험성적을 위해서 벼락치기처럼 짧은 시간 안에 '외울 생각'만 했지, 그 지식을 통해서 뭘 해보려는 '큰 그림'을 세워 보질 않았던 탓에 '지적 대화'를 위해서 뭔가 대단한 교양을 새로 배우고 익혀야 한다는 부담을 갖고 있기에 '지적 대화'를 나누는 것에 부담을 느끼고, 뭔가 '자랑질'을 하는 것 같은 쑥쓰러움 때문에, 많은 사람들 앞에선 '겸손한 척', 자신이 갖고 있는 기본적인 지식을 꺼내질 않아서, 이런 수준 높은 대화가 원활히 통하지 않는 것 같아 안타까울 따름이다. 그리고 행여나 자신의 입에서 나온 '지식'이 틀릴 수도 있다는 부담감에 더욱더 '지적 대화'를 즐기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일이 왜 벌어지는 것일까? 그건 '상대방의 말'을 경청하지 않고, '옳은 것'은 나도 다 아는 평범한 지식일 뿐이고, 몇몇 '틀린 것'만 콕 짚어서 지적하려 드는 나쁜 버릇이 불쑥불쑥 나오기 때문이다. 이런 식의 대화법은 '지적 대화'는커녕 수준 떨어지는 수다, 다시 말해, 맞든 틀리든 아무 상관이 없는 덜 떨어진 대화만 즐기는(?) 어리석음을 저지르고 말게 한다. 지적 대화를 나눌 때 '절대금물'이 바로 '지적질'이다. 차라리 "나와는 의견이 다르군요~"라면서, '내 의견'을 정확하게 전달하면, 지적 수준이 높은 상대방이라면 "내 의견보다 당신의 의견이 더 수긍이 가는군요"라면서, 양보하게 된다. 그래야 '다음 주제'에서도 서로 교양 넘치는 지적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될 것이다.
지적 대화에 목이 말라서 '서론'이 길어졌지만, 암튼 이 책 <채사장의 지대넓얕>은 앞서 소개한 '채사장'의 또 다른 책의 어린이책 버전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내용적인 면에서는 '똑같은 내용'이지만, 어린이도 한 눈에 이해하기 쉽게 '라이트노블' 형식으로 펴낸 책이라서 아주 유용한 책이다. 그 첫 번째 책으로 핵심 내용은 '권력의 탄생'을 이야기하고 있다.
인간이 누리는 권력은 사실 애초에는 없었다. 권력은 '물질'적인 것이 아닌 '비물질'적인 것이라서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먼 옛날 '구석기 시대'에도 족장은 있었고, 무리를 이끄는 우두머리가 있기는 했다. 하지만 그들이 '권력자'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무언가 '독점'할 수 있을 만한 물질적인 것들이 너무도 부족한 시절이었던만큼 조금이라도 '물질'을 얻게 되면 부족구성원의 모두가 똑같이 공평하게 나눠갖는 것이 부족 모두가 살아남을 수 있는 효율적인 방법이었다. 이를 '원시공산사회'라고 일컫는데 '생산수단'과 '생산물'로 나눌만한 '물질의 풍요로움'이 발생하기 전까지 인간들은 부족원 모두가 공평하게 누리는 무리사회를 이루고 살았다.
그러다 신석기 시대가 펼쳐지면서 '도구'가 발달하기 시작했다. 흔히 '신석기'라고 불리는 도구를 소유하게 되면서 사냥과 채집 따위를 넘어 '농업'을 시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농업을 하게 되면서 부족원들은 '정착생활'을 하게 되었고, '목축'도 할 수 있었다. 그럼 '농업'을 할 수 있게 된 신석기인들은 이제 무엇을 할 수 있게 되었을까? 바로 '생산수단'을 독점하고, '생산량'을 비약적으로 늘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신석기인들도 구석기인들과 마찬가지로 '평등사회'였다. 아직까지는 말이다. 하지만 '농업의 발달'로 인해 점점 '사유재산'이 늘어나게 되었고, 더 많이 생산물을 가진 '유산계급'과 유산계급에 기대어 빌어먹게 되는 '무산계급'으로 나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청동기 시대'로 접어들면서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으로 나뉘는 결정적인 차이가 발생하게 된다. 바로 '생산수단'을 독점하는 권력자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름하여 '왕(군장 또는 군주)'이란 계급이 등장한 것이다. 이들은 '비옥한 토지'를 소유하고 거기서 나오는 '생산물'을 독차지할 수 있었다.
아니, 평등했던 사람들끼리 무슨 수로 '생산수단'과 '생산물'을 독차지할 수 있게 되었을까? 이 방법의 비결은 바로 '신'이란 존재를 만드는 것이었다. 농업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연의 힘'을 얼마나 잘 다스리고(?), 잘 이용하느냐에 달렸기 때문에, 그런 자연의 힘을 좌지우지하는 '신'과 소통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왕'이라 일컫는 사람이라고 주장할 수만 있다면, 단박에 '지배계급'의 위치에 오를 수 있었고, '피지배계급'은 왕에게 절대복종하는 일이 얼마든지 가능했던 것이다. 급기야 '왕' 스스로 자신이 '신'이라고 주장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이런 사회를 우리는 '제정일치사회'라고 학교에서 배웠다. 기억이 나실 것이다.
그렇게 청동기, 철기 시대를 거쳐 4세기 이후부터는 전세계적으로 '고등종교'가 정립되면서 왕이 신을 자처하지 않고, 신에게서 왕권을 위임받았다는 '왕권신수설'과 같은 것으로 '제정분리사회'가 이루어진다. 이는 그리스도교, 이슬람교, 불교 등등 어느 정도 '경전'을 갖춘 고등종교가 자리 잡은 지역에서 벌어진 공통적인 사건이다. 이때에도 '생산수단'은 여전히 토지였으며, 토지에서 만들어진 '생산물'은 모두 지배계급이 독차지하고서 실제로 '노동'을 한 사람들은 그 일부만 가질 수 있는 불공평한 일이 계속 이어졌다.
이러한 불공평한 일은 흔히 말하는 '중세시대'까지 계속 이어졌다. 특히 서양에서는 무려 1000년 동안(4세기~14세기)이나 지속되었는데, 이 시기를 '종교'이외의 다른 사상을 인정하지 않았기에 '사상의 암흑기'로 부르기도 한다. 그러다 15세기 이후 '르네상스'가 유럽 곳곳에 전파되면서 '신 중심사회'가 '인간 중심사회'로 점점 바뀌는 계기를 마련한다. 이를 흔히 '인본주의'라고 일컫는데, 다른 말로 '이성의 빛'이 밝게 빛나게 되었다는 것으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프랑스혁명'을 시작으로 '인본주의'는 신 중심의 사회, 다시 말해, 신이 부여한 신성한 왕권을 철저히 부수는 결과를 낳는다. 이때까지도 권력의 향방은 '생산수단'인 토지를 독점한 '국왕'에게 있었다. 그런데 새로운 '생산수단(상공업)'이 만들어지자 구시대의 생산수단(농업)은 점점 취약해지게 되었다. 그리고 새로운 생산수단을 '독점'한 새로운 세력집단, 다시 말해 '부르주아'가 등장하면서 생산물의 불공평한 분배에 성난 군중들이 혁명을 일으키자, 이들 혁명세력을 이끄는 지도자로 변신한 '부르주아'가 새로운 권력자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들이 바로 '초기 자본주의'를 이끌었던 주역들인 셈이다.
1권의 내용은 여기까지다. 생산수단과 생산물의 향방을 이해하면 '권력'을 누가 소유하게 되는지 파악할 수 있고, 만약 '소유'할 수 있는 선택권이 주어진다면 '생산수단'을 소유하는 것이 유리할까? '생산물'을 소유하는 것이 더 유리할까? 고민하지 않게 될 것이다. 정답은 바로 '생산수단'을 소유하는 것이다. 왜냐면 '생산수단'이나 '생산물'이나 모두 물질적인 것이지만, 비물질적인 '권력'을 갖기 위해선 끊임없는 소비가 가능한 '생산수단'을 독점하는 것이 훨씬 더 유리하기 때문이다. 한정된 소비밖에 할 수 없는 '생산물'을 소유하는 것은 어리석은 선택인 셈이다. 이런 지식을 이해하고 있다면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도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금방 간파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의 '생산수단'이 무엇인지 알아내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부자가 되는 지름길이니 놓칠 수 없는 지식일 것이다. 정답은 한 가지가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