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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벌거벗은 세계사 6
  • 최호정 그림
  • 12,600원 (10%700)
  • 2023-08-30
  • : 1,376

[My Review MCMXIX / 아울북 27번째 리뷰] 한국사에서 다루는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은 의문투성이다. 왜냐면 다른 나라끼리 전쟁을 벌이는데 왜 하필 '우리 땅'에서 전쟁터를 제공했느냔 말이다. 더 어처구니 없는 상황은 두 전쟁이 벌어진 뒤에 왜 우리 나라의 국권이 침탈되고 끝내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는지, 그 진상을 파악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저 시험에 나오니 '사건의 흐름'만 파악하고, 임오군란-갑신정변-텐진조약-동학농민운동-청일전쟁-삼국간섭-을미사변-아관파천-대한제국선포-러일전쟁-포츠머스조약-한일의정서-을사늑약-헤이그특사-군대해산-국권강탈(한일병탄)이라는 '순서'만 달달 외울 뿐이다. 하지만 이래서는 역사의 진면목을 제대로 파악하기 힘들다. 다시 말해, '한국사'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세계사의 흐름'과 같이 파악해야 한단 말이다. 왜냐면 역사는 '한 나라'에서만 벌어지는 특정하고 독립적인 사건은 거의 없다. 특히 '근대사 이후' 세계는 동시다발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된다. 그래서 그 중심에 '한국사'를 놓고 세계를 조망해야 역사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이 책을 통해서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진면목을 살펴보자.

이 두 전쟁의 공통점은 바로 '일본'이 깊이 관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두 전쟁 모두 '일본'이 일으킨 전쟁이며, 그 전쟁의 목적은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로 차지하는데 있었다. 그리고 그 목적은 성공한다. 우리에게는 실로 끔찍한 역사의 장면이지만, 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면 이런 잘못된 역사를 우리는 또다시 반복할 것이기에 두 눈 부릅 뜨고 똑똑히 지켜봐야만 한다. 그리고 일본에게도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은 뼈아픈 실책이었다. 비록 일본으로서는 '승리한 전쟁'이긴 하지만,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뜻밖의 승리'로 인해 21세기 일본에게 두고두고 화근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잘못'을 저지르고도 반성할 줄 모르는 이웃나라를 두었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도 역사를 제대로 바라볼 수 있는 안목을 길러야만 한다.

먼저 '청일전쟁'이다. 이 전쟁이 일어나기까지 일본은 혹독한 근대화의 시련을 극복해내야 했다. 그런데 그런 극복을 한 뒤의 '일본의 행보'는 전혀 바람직하지 않았다. 서구열강에게 혹독한 '신고식(?)'을 당하고 아시아 최초로 근대화에 성공했으면, '동료의식(!)'을 발휘해서라도 다른 이웃나라, 같은 아시아국가가 서구열강에게 무방비로 침탈당하지 않도록 배려하고, 이끌어가는 아량을 베풀었다면 오늘날의 '실패국가'로 전락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어처구니 없게도 일본은 서구열강에게 당한 그대로 '제국주의화'하여 서구열강과 어깨를 나란히고 아시아 각국을 '침략'하고 '식민지'로 삼는 대열에 낑기려 했다. 그 시작점이 바로 '청일전쟁'이었던 것이다.

그 시작은 '임오군란'이다. 고종이 친정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신식군대(별기군)'와 '구식군대'의 차별로 인한 구식군대의 분노로 벌어진 우발적인 사건이 '일본공사관'을 불태워버리는 만행으로 일어났기 때문이다. 구식군대가 왜 일본공사관을 공격했냐면, 그 당시 '별기군'을 훈련하던 교관이 일본인이었기 때문이다. 고종과 민왕비는 '개화의 필요성'을 깨닫고 개화파의 의견을 받아들여 일본인 교관을 통해서 신식군대를 양성하며, 조선의 근대화를 위해서 '일본의 협조'를 호의적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허나 일본은 조선의 요청에 호의적으로 보답하지 않았다. 오히려 고종과 민왕비의 '개화 의지'를 빌미로 조선을 일본의 속국으로 만들 계획을 착착 진행중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임오군란이 벌어지자 일본군은 그냥 인천(제물포)을 통해서 내빼버리고 만다. 왜냐면 아직 준비가 덜 되었기 때문이다. 병력도 소수였고. 허나 '임오군란'으로 인해 되려 반갑지 않은 '손님'이 조선에 들어오게 된다. 바로 '청나라의 군대'다. 바로 청의 개입으로 '임오군란'이 진압되었기 때문이다. 일본으로서는 전혀 반갑지 않은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하지만 일본은 멈추지 않는다. 이번엔 조선의 개화파를 이용해서 조선에 '급변사태'를 일으키고, 이를 계기로 삼아 일본이 조선을 집어 삼키는 작전이었으나, 이 또한 불발로 끝난다. 때마침 일어난 김옥균의 '갑신정변'이 일어나서 일본의 군대와 자금을 받아 조선을 개혁시키겠다는 야심찬 의지는 일본의 비협조로 인해 '삼일천하'로 끝맺게 되고, 고종의 발빠른 청 원병 요청과 청군의 신속한 개입으로 인해 조선의 개혁세력은 깔끔하게 정리가 되고 말았다. 일본은 아직 '조선'에 개입을 할 정도로 완벽히 준비가 되지 않았던 탓이 크다. 일본이 국내문제를 해결하는데 급급해 '갑신정변'을 나몰라라 하는 사이에 고종은 '청나라의 개입'을 공고히 해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일본이 '갑신정변'을 통해서 얻은 것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다. 곧이어 맺어진 '텐진조약'으로 양국의 군대를 '동시철병'하는 이득을 얻었기 때문이다. 또한 양국의 군대가 조선에 출병할 때는 서로 통보를 하기로 약조하고, 일본도 조선에 군대를 보낼 수 있는 권리(?)를 따냈기 때문이다.

이제 '동학농민운동'으로 일본은 본색을 드러낸다. 조병갑의 전횡에 분노한 전봉준을 비롯한 '동학군'은 전라도 전역을 차지하고 관군을 밀어붙이는 저력을 보여준다. 이에 고종은 어리석은 결정을 내리는데, 제 나라 백성을 진압하는데 '외국군대(청군)'를 요청해 버린 것이다. 이에 여러 신하들이 절대 반대를 외쳤는데도 '발등에 떨어진 불을 꺼야 한다'면서 청나라 군대를 요청해버린 것이다. 임오군란, 갑신정변 정도의 효과를 기대했던 고종의 판단은 '일본군의 출병'으로 깜짝 놀라지만,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못한다. 오히려 '동학군'이 외국군대를 물리라면서 자진해산을 해버리는 똑똑한 행보를 할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청군은 자신들이 할 일이 없다며 '철군'을 결정했고, 일본군에게도 똑같이 '철군요청'을 전달했지만, 그 사이에 이미 일본군은 '경복궁 점령'을 시도했고, 고종을 사로잡아 버리고 만다. 그리고 경복궁으로 통하는 '전신선'을 다 끊어버리고, 고종을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든 사이에 일본군은 고종을 협박해서 '청군의 철병'을 요구하고, 일본군의 주둔을 고종의 요청이었다는 사실을 공식화해버린다. 그리고 일본군은 아산 앞바다에서 '풍도해전'을 개시한다. 청에 선전포고도 없이 선제공격을 해버린 것이다.

이렇게 '청일전쟁'은 시작한다. 뒤이어 벌어진 '성환전투'와 '평양성전투'에서 모두 이긴 일본은 내친 김에 청나라의 요동반도를 집중 공격하고, 압록강을 넘어 '뤼순'을 점령한 뒤, 해전에서도 청나라의 북양함대를 박살내고 완벽히 청일전쟁에서 승리를 쟁취한다. 이는 서구열강을 깜짝 놀라게 만든다. 어느 누구도 '일본의 승리'를 점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군사적인 면에서 청나라는 일본을 압도했고, 청나라의 승리를 기정사실로 여겼기 때문이다. 내친김에 일본은 청나라의 북경까지 함락시켜 완전한 승리로 청나라 전부를 집어 삼키려 들었다. 하지만 이때부터 서구열강은 일본을 견제하기 시작한다. 왜냐면 당시 서구열강은 '청나라의 이권'을 서로 사이좋게(?) 노나 먹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본이 청나라의 수도 북경을 함락한다면, 자신들의 이권을 빼앗길 것 같자 일본에게 압박을 가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에 일본은 청나라가 아니라 서구열강들이 무서워서 군대를 돌려 버린다. 그렇다고 이대로 물러서면 일본의 체면이 서지 않으니, 북경이 아닌 '대만'을 이때 함락해버린다. 이렇게 완전한 승리를 거둔 일본은 요동반도와 대만까지 점령하고, 조선에서도 '청의 간섭'을 물리치고 완벽하게 장악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니 애초에 전쟁에 반대했던 일본국민들도 '개선'을 한 일본군대에 환호하며 스스로 '대일본제국 국민'으로 자랑스러워하기 시작했다. 뜻밖의 대승리로 인해 온나라가 '국뽕'을 맞아버린 셈이 되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시모노세기 조약'으로 조선은 (청의 속국이 아니라) 자주 독립국이며, 요동반도·대만 할양하고, 전쟁배상금으로 2억냥을 받아내는데 성공하였지만, 너무 많은 이득을 보았다고 생각한 서구열강은 발빠르게 움직이며 일본의 승리에 제동을 걸기 시작했다. 가장 발빠르게 움직인 나라는 '러시아'다. 왜냐면 당시 러시아는 '부동항(얼지 않는 항구)'을 얻는 것이 가장 큰 소망이었다. 그래서 겨울에도 얼지 않는 항구인 '여순(뤼순)항'과 그곳으로 진입할 수 있는 '요동(랴오허)땅'을 차지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러시아는 독일과 프랑스와 짜고서 '삼국간섭'을 벌인다. 그 결과, 일본은 '요동땅'을 포기해야만 했다. 왜냐면 아직은 서구열강과 맞짱을 뜰 정도의 실력이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허나 이 사건을 계기로 일본 국내에서도 '러시아'에 본때를 보여주어야 한다는 분위기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런 분위기는 러시아의 황태자 '니꼴라이2세'가 일본에 방문했을 때, 상해를 당하는 사건이 일어나는 것으로 짐작해볼 수 있다. 하지만 이 사건이 벌어지자 일본은 온 나라가 '러시아 황태자'를 향해 사죄를 하며 싹싹 빌고 용서를 구하는 '저자세 외교'를 벌인다. 몇몇 사람들은 미안하다며 '할복자살'까지 시도했다. 하지만 니꼴라이2세는 정신병자의 소행으로 보고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는 않는다. 그만큼 일본으로서는 러시아가 강국이라는 것을 익히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삼국간섭'을 지켜본 이는 또 있었다. 바로 고종과 민왕비였다. 청일전쟁 이후 조선이 일본의 손아귀에 놓이는 상황이 벌어지자 고종은 일본을 견제할 세력으로 '러시아'를 주목했던 것이다. 러시아의 힘을 빌릴 수만 있다면 일본이 '경복궁'을 침입해서 자신을 볼모로 삼는 수모를 다시 겪지 않을 것이라 예상했기 때문이다. 허나 이는 또다시 '외세의 힘'에 기대어 어찌 해보겠다는 어리석은 판단이었고, '언 발에 오줌누기'라는 임시방편에 불과했다. 조선에 불어닥친 한파에 마땅한 대안도 없이 '언 발에 오줌을 누어' 당장의 급한 불을 꺼보려해봤자 러시아라는 또 다른 탐욕자를 불러들이는 꼴이 되었기 때문이다. 허나 고종으로서는 달리 도리가 없다. 동학군이라는 자국의 백성조차 다스릴 능력이 없어 '청나라'에 군대를 요청한 무능한 임금인데,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을 상대로 무슨 대책이 있었겠느냔 말이다. 그나마 러시아 세력을 끌어들여 일본 세력을 견제하려는 시도는 '단기적'으로는 효과가 드러났기 때문이다. 허나 일본은 이런 고종의 행보를 좌시하지 않았다. 그리고 '을미사변(민왕비 살해사건)'을 일으키는 끔찍한 만행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일본은 스스로 '문명국'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혹독한 신고식을 치르고 '근대화'에 성공한 것에 이어 '청일전쟁'에서 대승을 거둔 직후라 더욱 그랬다. 그런데 '문명국'답지 못한 만행을 연이어 저지르고 있으니 스스로 이를 감추려고 얼마나 애를 쓰는지 안쓰러울 정도였다. 앞서 청일전쟁 당시 '여순'을 함락한 뒤에 저지른 '여순대학살'이 대표적이다. 당시 일본군은 청나라사람이라면 닥치는대로 죽이라는 명령을 받았고, 이로 인해 20만 명에 달하는 민간인이 참혹하게 무참하게 살상당했다고 전한다. 서구열강은 일본군이 이런 만행을 저지르고 다니는 것에 '야만스럽다'며 비난을 했는데, 일본정부는 자신들이 저지른 만행을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서구언론의 비판만을 두려워하며 '진실 왜곡, 혹은 부정'을 일삼으며 연일 언론플레이를 했더랬다. 이런 일본이 '을미사변'을 저지른 것은 야만국이 저지르는 당연한 일이었으나, 오직 두려워하는 것은 서구의 비난뿐이었다. 이 사건도 어찌어찌 서구열강의 비난을 받자 민왕비를 살해하고 욕보이고 시신을 불태워버린 범죄자를 일본으로 송황해서 재판을 받게 하였으나, 모두 '무죄'로 풀어줘버린다. 오히려 '정부의 요직'에 앉혀 출세의 길을 열어줘버린다. 이래 놓고도 '문명국'인냥 행세하는 것이 우습기만 하다.

한편, 자신의 거처인 '경복궁'에서 자신의 아내가 무참히 살해되는 일이 벌어지자 고종은 '아관파천'을 단행한다. 일본군의 감시속에서 언제 자신의 목숨도 잃게 될지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몰래 '궁녀의 가마'를 타고서 '아라사(러시아)공사관'으로 파천을 하는데, 무려 1년간 외국 공사관에 머물려 목숨을 부지하는데 급급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 아관파천으로 인해 고종의 목숨은 건졌지만 수많은 이권을 '러시아'에 내주어야 하는 처지에 놓인다. 특히 '압록강, 두만강, 울릉도 벌목 사업'을 모조리 러시아에게 몰아주는데, 이를 통해서 러시아는 '만주'를 차지하고 '부동항'을 차지하려는 속셈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한다. 더구나 '울릉도'에서도 이권을 챙기면서, 동시에 '일본'을 바다에서 견제하고 감시할 수 있었기에 여러 모로 톡톡히 이득을 챙긴다.

이때, 세계적인 정세는 '그레이트 게임'이 한창 벌어지고 있었다. 이 게임의 핵심포인트는 '러시아의 팽창'을 막는 것이었다. 지금도 러시아는 세계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가지고 있다. 이를 막기 위해서 '대영제국'은 러시아가 '부동항'을 갖지 못하도록 총력을 기울였다. 당시에 강국이라면 바다를 지배하는 것이고, 바다를 지배하기 위해선 '강력한 해군'을 양성하는 것이 우선이었기 때문에 러시아도 '발트함대'라는 막강한 해군력을 자랑했다. 하지만 '부동항'을 갖고 있지 못해서 이 최강의 함대를 제대로 운영할 수 없었던 것이다. 러시아가 바다로 나올 만한 지점을 '영국과 미국, 그리고 영연방에 속하는 나라들'이 모조리 막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제 러시아가 '청나라의 여순항'과 '조선반도의 항구'를 얻을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그게 '아관파천'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영국은 부랴부랴 일본을 향해 '러브콜'을 보냈다. 아직 일본 혼자서는 러시아를 상대할 여력이 없을 테니, '영일동맹'을 맺어 영국과 미국, 그리고 영연방이 러시아와 한판 붙으려는 '일본'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겠다는 것이다. 이에 일본은 그 손을 덥석 잡는다. 그리고 막대한 차관을 빌려서 '대국 러시아'와 한판 승부를 보려 한다. 이게 바로 '러일전쟁'이 벌어지기 직전의 상황이다. 한편, 조선은 '대한제국 선포'를 단행하고, 러일전쟁의 조짐을 간파하자, '중립선언'을 하지만, 이미 약소국으로 전락한 처지의 조선이 '아무런 힘'도 없는 나약한 중립을 들어줄 일본과 러시아가 아니다. 오히려 '러일전쟁'의 전초전이 조선땅에서 벌어진다. 일본군은 '여순항'에 머물고 있던 러시아군을 공격한 다음날, 인천(제물포)에 정박하고 있던 러시아 함대를 침몰시키고, 경복궁을 점령해버린 뒤에 '러시아공사관'을 철수시킨다. 러시아는 러시아대로 필요한 전쟁자원을 한반도에서 충당하며 본격적인 '러일전쟁'에 대비하고 있었다. 또다시 강대국들의 전쟁에 힘없는 우리 백성만 피해를 보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암튼, 일본군은 발빠르게 러시아군을 몰아붙였고, '여순'을 중심으로 대대적인 공방전이 벌어졌다. 초반의 기습으로 승전보를 울려 기세좋게 밀어붙였지만, 러시아도 만만치 않았다. 일본군의 총공격에 러시아는 여순에서 방어에 성공하며 일본군은 엄청난 희생을 치뤄야 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일본은 '무모한 전투'를 지시하며 30만 명이 넘는 일본군이 이곳에서 전사했다. 하지만 러시아는 이러한 대승에도 '보급로'가 막히며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 아직 '시베리아 철도'가 완공되지 않아서 전쟁물자가 제때에 보급되지 못했고, 바이칼 호수의 얼음 위에서 '보급기차'를 말이 끌어서 전달하는 처절한 전쟁이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1년이나 버텼지만, 러시아는 일본과의 '육지전'에서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 허나 러시아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바로 막강한 해군력 '발트함대'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발트함대가 일본군이 머물고 있는 태평양 서쪽 연안까지, 다시 말해, 조선의 근해까지 오기에는 너무도 멀고 험난한 길이 남았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해군은 '유럽의 북해'에 있었다. 이곳에 있는 해군이 '동해'까지 가장 빠르게 오려면 일단 '대서양 연안'으로 나간 뒤에 '지중해'를 거쳐 '홍해'와 '인도양'을 지나 '말레이해협'을 지나 '동중국해'를 거쳐 '대한해협'으로 곧장 오면 된다. 그런데 러시아 함대는 이 '최단루트'를 갈 수가 없다. 앞서 언급한 '그레이트 게임' 때문이다. 당시에는 '수에즈 운하'를 장악하고 있던 나라는 영국이었기 때문에, 러시아 발트함대는 지중해를 지나는 길이 아닌 '아프리카 대륙'을 빙빙 돌아서 '인도양'조차 단숨에 가로질러야 했다. 왜냐면 인도도 '영국령'이었기 때문에 러시아 함대가 기항을 해서 연료와 식량, 식수를 공급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프리카 대륙을 돌아가는 길도 험난한데, 당시 '영국령'인 국가를 피해서 가야만 했기 때문에 먼길을 돌아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발트함대가 동해바다에 도착하기까지 무려 1년이란 시간이 소요되었던 것이다. 그 사이 일본은 '대한해협'의 길목을 막고, '대마도'에서 일본 함대를 감춰두고, 기진맥진 겨우 도착한 발트함대를 손쉽게 박살을 내버린다. 그렇게 러시아가 자랑하는 발트함대는 제 실력을 보여주지도 못하고 '수적으로도 열세인 일본 함대'에 좌초되고 만다. 허나 러시아가 '영국령'에 기항하지 않고도 먼 바다를 돌고 돌아 '동해바다'까지 도착한 것만으로도 거의 기적에 가까운 실력을 보여준 셈이다. 더구나 1년의 항해 동안, 제대로 된 보급도 없이, 단 한 대의 손실도 없이 도착한 것만으로도 대단한 저력을 보여준 셈이라, 오히려 일본이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러시아는 발트함대를 잃고도 전혀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버티기에 들어갔다. '시베리아 철도'만 완공되고 나면 일본과의 전쟁은 2년이고, 3년이고 계속 치룰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일본은 '영일동맹'으로 받은 차관이 2년이 지난 시점에 똑 떨어져버리고 더는 전쟁을 벌일 여력이 남지 않았다. 그만큼 일본은 '총력전'을 벌였고, 러시아는 일부만 손실을 본 상황이었던 것이다. 전쟁이 길어지면 당연히 러시아의 승리가 점쳐졌다. 그런데 변수가 생겼다.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피의 일요일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오랜 전쟁에다 기근이 덮치자 러시아 군중들은 '아버지' 같은 니꼴라이2세 차르(황제)에게 빵을 달라고 시위를 한 것이다. 동방정교회의 주교가 십자가를 들고, 수많은 농민과 노동자로 구성된 군중들은 '차르의 초상화'를 들고서 행진을 했고, 차르가 머물고 있는 성 앞에 모여 목소리를 높인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모인 굶주린 군중을 향해 병사들은 발포를 명령했고, 수많은 사상자가 하얀 눈밭을 시뻘겋게 물들이자 성난 군중들은 차르를 향해 분노를 표출했던 것이다. 연일 이러지는 시위에 결국 차르도 두손을 들었고, 러시아도 더는 전쟁을 치를 수 없는 곤란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이때 미국이 '자국의 위상'을 높이고자 러일 전쟁의 중재자 역할을 자처하고 나섰으니, 두 나라는 서로의 사정에 의해 미국의 중재안을 받아들였고, 결국 '일본은 명분(승전)'을 '러시아는 실리(배상금 없는 종전)'를 챙겼다. 청일전쟁과 같은 막대한 배상금을 얻을 것으로 기대했던 일본은 아쉽지만 '배상금' 대신 '조선의 이권'을 독차지할 수 있게 되었고, 사할린 섬을 러시아로부터 할양 받는 것으로 만족했다. 반면에 러시아는 국내에서 진행되는 급한 불 때문에 '조선'에서 영향력을 더는 발휘하지 못하게 되었고, 얻고 싶었던 '부동항'도 끝내 얻지 못하고 만다. 이렇게 '러일전쟁'도 종식이 되었고, 그 결과 '대한제국'은 명실공히 일본의 손아귀에 놓이게 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이에 고종은 '헤이그 특사'를 보내 일본의 침탈이 부당하다는 것을 만국에 알리려 했으나, 이미 서구열강은 국제사회에 '일본'을 열강으로 받아들인 뒤였기에 '고종의 외침'은 아무런 영향력도 발휘할 수 없었다.


이처럼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은 한반도에서만 벌어진 사건으로 축소해서는 결과, 그 진면목을 알 수가 없다. 마땅히 '세계사의 관점'으로 넓게 보아야만 제대로 인식할 수 있게 된다. 비단 '근대사 이후의 역사'만 세계사적인 관점으로 볼 일이 아니다. 우리가 스스로 '반만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자긍심을 뽐내기 위해선 마땅히 '고대 4대 문명'에 고조선의 역사를 당당히 밝혀야 한다. 현재까지는 '중국(황하)문명'으로 퉁치고 있는 것이 사실은 '상(은)나라 갑골문자'의 기록에 근거하고 있으니, '상나라'가 한족의 나라가 아니라 동이족의 나라였다는 진실을 밝히고, '갑골문자(한자)'가 한족의 문자가 아니라 동이족의 문자였다는 진실, 또한 낱낱히 밝혀져야 마땅할 것이다. 우리가 역사의 진실을 '한국사'라는 좁은 시선으로만 관찰하게 되면, 이러한 진실 또한 그냥 묻혀야만 한다. 그리고 중국의 '동북공정', 일본의 '역사왜곡'의 탓이라고만 푸념을 늘어놓을 텐가? 우리 스스로 우리 역사를 '세계사의 반열'로 올려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역사의 혜안을 가져야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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