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알지 못한 세계에 대해 생각해본다.
가지 못한 곳에 대한 환상은 어렴풋 스무 살 이즈음의 화두였다. 베낭여행. 대학 시절 다들 알바를 해서 돈을 모아 가까운 일본이나 중국, 멀게는 방콕에 다녀온 친구들이 있었다. 그들의 까무잡잡한 얼굴 태를 볼 때마다 다녀온 그곳이 어떤 곳인지, 어떤 햇살이길래 저리 까맣게 타들어왔나 궁금했다. 사실, 그들의 얼굴이 부러운 것보다는 그들이 지나쳐 온 도시와 사람들과 풍경을 길어왔을 그 기억이 부러웠다. 그 낯선 풍경 안에서 부비고 맞댔던 그 살부빔이 부러웠달까.
그 당시 책은 유일하게 아주 오랫동안 그런 부러움을 상쇄시켜줄 유일한 짓(?)중에 하나였다. 오타쿠처럼 방에 틀어앉아 책을 보지는 않았지만, 혼자만의 상상을 확장해주면서 만족해준 건 분명하다. 좀 유치한 사실이지만 거역할 수 없는 사실이기도 하다. 그때 황석영을 만났다. 나는 책을 좀 일렬로 세워 보는 습관이 있었다. 한 작가의 책을 읽으면 그 작가의 뿌리에서 부터 끄트머리 이파리까지 일렬로 보고자 하는 것. 그건 약간의 지적 허영이 불러일으킨 습관일 것이다.
황석영 소설 속 '말'들은 넘실대는 파도랄까. 넘실거리는 그 파동에 걸터앉으면 나도 모르게 망망대해로 밀려들어가고 밀려들다가 어떤 무인도에 도착해 한없이 그 안의 삶을 구경하는 느낌이었다. 장길산이 그러했고 객지가 그러했다. 이야기를 굴리고 밀어 눈덩이가 되는 지경.
낯익은 세상을 1차 속독했다. 쓰레기세상이 삶의 공간이 되어진 사람들의 이야기가 눈덩이처럼 커져가 종래엔 그 눈덩이가 모여 품새 좋은 눈사람이 만들어져 있는 느낌이었다. 그 눈사람의 표정은 웃고 있으나 자세히 살펴보면 약간 눈꺼풀이 쳐져 똑바로 바라보지 않으면 알 수없는 희미한 슬픔을 내비치고 있었다. 땜통이 그러했고, 딱부리가 그랬다. 소설가의 숙명은 어찌보면 무성영화 속 채플린이 그러했던 것처럼 울어도 웃는 화장 때문에 어그러진 요묘한 표정을 새기는 수공업자가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여기와 지금에 대해 생각해본다. 쓰나미가 데리고간 사람들과 얼마전 나고자란 땅속에 생매장 당한 짐승들의 아우성을 교차하며 떠올려본다. 만약 누군가 위에서 시나리오에 의해 삶의 차례가 집행되고 있다면 지금 여기는 가장 갈등이 심한 위기의 부분이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지금에 대해 어느 노 소설가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새길 수 있는 방법으로 어떤 표정 하나를 새기고 있다. 낯익은 세상. 마치 과거의 어느 무심코 잊어버린 일이 다시 여기에까지 이어진다는 그런 말이 생각나게 하는 소설. 폐장을 알리는 호루라기 소리가 삐익 들려오는 것 같은 외침의 말들, 문장들. 성장이 덜 된 소년이 어른이 되고 다 된 세상에 집어넣어져 혼란스러움이 마치 자연의 어느 일부분 처럼 느끼고 숨쉬는 지금 여기의 딱부리들. 좋은 소설을 만나면 이리 뭔가 꺽정스러워 지기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