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편독의 나래
오랜만에 편지를 써



8월의 중순이 지났어. 여름을 좋아하지 않아도 매번 여름을 기해 한해를 따져보게 된다는 게 웃겨. 엊그제 읽은 책에서는 들판에 펼쳐진 거미줄에 대한 문장이 나왔어. 우리가 아는 것처럼 닫힌 도형의 형태가 아니라 여러가닥이 끊어져 한꺼번에 들판에 드리내리운 실뭉치같은 거미줄을 묘사한 장면이었어. 실제론 그런 장면도 아니었을지 몰라. 내가 머릿속으로 지어낸 들판과 햇살일지도. 그렇다 해도 아름다웠어. 너에게 종알종알 이야기하고 싶었어. 책이 어쩌다 거기에 다다랐는지, 왜 그 장면이 좋았는지, 이 작가를 깊이 마음에 담게 된 것도. 신나는 놀거리를 막 발견한 어린아이처럼 나는 들떠서 떠들고 너는 응, 오, 와, 하며 열심히 들어줄 것을 아니까.

이제 나는 읽은 장면을 다시 이야기하는 게 쉽지 않아. 이게 알코올성 치매의 전조증상일까. 커피를 줄이기로 혼자 마음 먹어놓고는 결국 중독이 몇가지 더 늘었어. 중독이라고 이제야 인정을 해. 커피를 줄여야겠다고 너에게 말한 후, 그래 좀 줄여봐 라는 말을 기대한 나한테 너는 피식 웃으며 커피를 어떻게 줄여, 했지. 나는 그때 마음이 놓였다. 기분이 좋아졌어. 그 말을 듣고서야 진짜정말 카페인을 줄여야겠다고 생각했어. 왜 도달해야만 진심인 줄 알게 되는 걸까. 늘 그래.

어제는 아이가 독서감상문을 써야 한다며 도와달라고 그랬어. 그걸 내가 좀 배워야 하는데 어떻게 도와주지. 엄마가 유튜브 좀 찾아볼게 하고 저학년용 독서 감상문을 쓰는 법을 음성으로 알려주는 교사의 유튜브를 같이 봤어. 칠판 일러스트를 배경으로 화면의 글자만 변하는, 올린지 칠 년 된 영상이었어. 방학 숙제라서 꼭 100쪽이 넘는 긴 책을 읽고 써야 한다는 거야. 아이가 긴 책을 새로 읽어야한다는 것부터 부담스러워하는 게 보였어. 시작부터 부담스러운 숙제의 끝이 좋을 리가 없잖아. 네가 읽은 책 중에 이미 그런 책이 있어, 하니까 화색을 보였어. 쓸 책으로 최근에 본 초등학생 창작동화 시리즈 중에 고를 줄 알았는데 아이는 작은 아씨들을 골라왔어. 두꺼운 양장본을 양손에 든 아이의 얼굴에 어째서인지 벌써 뿌듯해. 자주 거르기도 했지만 지난 봄에 밤마다 열 쪽 스무 쪽씩 내가 읽어주었던 것 같아. 우리는 당연하게도 조가 등장하는 장면마다 웃음을 터트리고 화내고 환호했지. 어린 시절의 내가 신나서 입을 들쭉이는 게 느껴져. 내가 아는 여자 중에 조를 좋아하지 않는 여자는 없지만 같이 좋아한다는 것의 기쁨이 이렇게 먼길 돌아서 올 때 유독 남다르다. 선생님의 유튜브에서는 다섯 단계로 나누어 감상문 쓰기에 접근하라고 했어. 저학년용인데도 나에게 어쩜 그렇게 유용하니. 제목과 등장인물을 나열해 보는 앞단계를 지나 “()가 ()한 것이 ( )하게 느껴졌어요.” 인상 깊은 장면을 꼽아보는 단계로 가면 마지막은 생각넓히기 단계야. 그건 내가 첨언을 했지. 네가 공감했던 것, 싫었던 것, 이해 안되었던 것, 나라면 그렇게 했을 것 같은 것, 내게 내내 종알거리던 것들이 아마 ‘생각넓히기’일 거라고.

아이는 완성된 글을 나에게 읽어주었어. 평소엔 소리내서 읽는 게 싫다고 하면서, 내가 안 바쁠 때 글로 읽어보겠다고 해도 자꾸 읽어주고 싶다고 하대. 작은 아씨들의 등장인물로 자매들 이름을 하나 하나 읊더니 아빠와 엄마도 주인공이라고 하더군. 아빠는 소녀들에게 애정을 담아 “작은 아씨들”이라 불러주었고 그런 아빠가 전쟁에 나간 후로는 엄마가 작은 아씨들로 성장하게 해주었다고. 모범생 같은 글에 내 어린 시절 생각부터 나버려 지레 걱정부터 하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나는 정말 귀한 문장이다, 생각이 들었고, 그렇게 말해주었어. 아이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반짝였어. 짧은 시간 지나간 그 표정과 함께 아래 너와 나누고 싶었던 장면을 가져와 난 이 여름을 기억해볼게.


“그 순간 나는 그것을 본다. 매를 날렸던 황량한 벌판이 고사머(gosamer, 공중이나 풀에 걸린 얇은 거미줄)로 뒤덮여 있다. 수백만 개의 반짝이는 줄들이 사방 흙 위에 바람 부는 방향으로 걸려 있다. 지는 해의 빛 속에서 파르르 떨리는 거미줄이 물 위의 빛처럼 흘러 내 발까지 이어진다. 백만 마리의 작은 거미들이 새집을 찾는 일에 천상의 아름다움이 깃들어 있다. 각자 공중으로 짠 비단 실을 부화한 곳부터 당겨, 대담한 열기구 조종사처럼 위로 떠올라 퍼뜨리고 떨어진다. 나는 오래도록 들판을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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