덮고 나서도 끝나지 않는 책이 있다. 짧은 소설이 두드리는 긴긴 노크.
약속받은 번영과는 달리 쇠락의 기미를 더해가는 동네, 보텀의 기원을 설명하는 것으로 <술라>는 시작한다. 시킨 일을 끝내면 농지를 주겠다 해놓고, 왜 척박한 꼭대기 땅을 주냐는 흑인 노예의 물음에 하나님이 굽어보는 천국의 바닥이 여기 보텀이라는 백인 농부의 생색이 이 동네의 시작이었다. 노예는 그 말을 믿고 언덕에 씨를 뿌렸다. 기묘하고도 자연스럽게 그 후로 타운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면면에도 이 땅의 기운이 감돈다. 보텀이자 보텀이 절대 아닌, 억압과 기만을 품은 땅.
술라와 넬은 분명 대비되는 인물인 것처럼 등장했다. 서로 다른 집안 내력과 극명하게 대비되는 엄마들의 성격, 거기에 더해 주양육자(를 꼭 짚자면)라 할 수 있는 엄마/할머니들 각자의 굴곡진 서사. 이 조건들이 만들어낸 양육 환경 아래 아이들이 경험하는 집 안의 풍경까지 극단적으로 달랐다. 그때부터 나도 둘을 구분해가며 읽기 시작했을까. 1부 마지막을 지나 술라가 돌아오는 2부로 가면서부터는 앞으론 제각기 평행선을 갈 거라는 게 자명해지는 것처럼 보였다. 젊은 날 아무리 영혼의 단짝이었대도 말이다. 그 분기점에서 넬은 주드와 결혼을 결심하고, 술라는 그 결혼식장을 웃으며 떠나는 것을 마지막으로 10년 동안 목격되지 않는다.
돌아보면 둘의 서로에 대한 끌림은 필연적이고 남다른 데가 있었다. 소녀들이 등장하는 다른 이야기에서 으레 그런 것과 다르게 성장을 담보하지 않는다는 점이 어째 사늘한 관계. 그런데도 술라와 넬의 서로를 향한 맹목과 그게 품고 있는 위태로움을 납득할 수가 있다. 서로에게 무언가를 채워주는 동시에 비워버리는 사이도 존재한다. 이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현실에서도 오래 남아 회자되는 관계는 아니겠지만 말이다. 같은 것을 갈망한 적이 있어야 저렇게 휘말리기도, 대립하기도 할테니깐.그들은 만나면서부터 즉시 서로에게 아주 충실한 친구다. 그 뿐 아니라 우정에 이런 표현을 쓸 수 있다면, 둘은 아주 숙련되었다구 할까. 서로에게 가장 필요한 사람이 되는 데 어떤 이질감도, 부자연스러움도 없다. 교감과 동질성, 겪어본 적 없는 것에 대한 동일한 열망은 시행착오 한 번 없이 서로에게 빠져들 수 있는 충분한 이유가 되어준다. 충격적인 일련의 사건들도 그들의 결속을 은밀하고도 단단하게 해주는 기폭제가 될 뿐이고..
욕망도 삶의 형태도 추구하는 바대로 이룰 수 없을 때는 은폐하고 살아가는 것이 더 편해지는 때가 온다. 그래야만 편해진다. 술라는 그렇지 않았던 거고. 구해지고 싶어하지도 않았고 자신이 원하는 형태의 구원이 오지 않으리라는 것도 일찍이 예감했던 터였다. 보텀 사람들이 돌아온 술라를 보고 수군대면서 문을 닫아 건 것처럼 나 또한 어느 정도는, 돌아온 후의 술라의 행보를 이질적으로 느꼈다. 그들도 나도, 스스로에게조차 눈을 감기로 선택한 때문은 아니었을까. 자신이 그동안 그리워했던 것은 주드가 아니었다는 넬의 울부짖음과 함께 책을 덮고 나서야 내 생각도 거기 가닿는다. 책 초반에 내가 시도했던 어설픈 이분법이 힘을 잃는다. 술라와 넬이 마주했던 불합리와 관습적 억압, 중층으로 퇴적된 불행의 면면을 잠시나마 들여다 보고 온 것이다. 토니 모리슨은 작은 흑인 타운, 보텀에서 일어나는 일을 암암히 그려내는 것만으로 “독자를 충격”한다.(김유태, <나쁜 책>) 작가가 유지하는 거리, 인물 누구에게도 쏠리지 않은 시선, 타운 정경에 대한 담담한 묘사는 그 충격의 시차를 만들어내고 그렇게 내게 계속 돌아오는 노크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