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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서재
  • 제정신병자들
  • 오은교
  • 22,500원 (10%1,250)
  • 2026-01-24
  • : 440

「스토킹」이 낡은 '꽃뱀' 기표를 이용하여 우물에 독을 타는 전형적인 무고 논리를 반복한다면, 최근의 새로운 경향이라 할 만한 것은 가해자로 지목된 남성들이 무고를 주장하기 위해 '퀴어 정체성'을 소환한다는 점이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김경욱의 「하늘의 융단」이다. 스쿨 미투로 고발당한 중년의 고등학교 교사 '곽춘근'은 자신의 성정체성을 숨기고 살아가며 거짓된 외피에 고통받는 클로짓 게이다. 스쿨 미투로 동료 교사가 이미 날아간 가운데 곽춘근은 돌연 학내 익명게시판을 통해 "스타킹 올이 나갔다면서"(178쪽) 여학생의 다리를 만진 혐의로 고발당한다. 곽춘근은 억울하기야 했지만 남학생보다 오히려 여학생을 대할 때 성적 긴장감에서 자유로운 까닭을 밝힐 수는 없었다"(180쪽)며 오히려 "남학생이었다면 손대지 않았"(184쪽)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무고함의 근거로 성정체성을 내세우며 스쿨 미투는 '권력'의 문제가 아니라 '성적 지향'의 문제로 전환된다. 곽춘근을 향한 비판은 퀴어의 수치심과 연결된다. 그는 진상조사위원회의 심사를 받는 중 성정체성을 커밍아웃하면 오해를 풀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하지만 그러지 못하는 용기 없는 자신을 한탄하며 끝내 해명 불가능한 자리에 스스로를 위치시킨다. 퀴어는 권력형 성범죄에 연루될 수 없다는 뜻이 아니다. 위계에 의한 성폭력은 특수한 '성욕'이 제어되지 못해 발생하는 '욕구'의 문제가 아니라 성욕이 '특수한 상황'에서 제어되지 않아도 되는 '권력'의 문제라는 점을 이 소설이 은폐하고 있다는 점이 문제인 것이다.

퀴어 진실의 담지자로서 억울함을 호소하는 방식은 이기호의 「위계란 무엇인가?」에서도 나타난다. 소설가이자 문창과 교수인 화자 '나'는 야심한 시각에 학부생 '박채연'의 방문을 받는다. 민소매에 반바지를 입은 이 학생은 정신과 약물치료를 받고 있는 것으로 짐작되는데, 잠이 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새벽에 그의 연구실을 찾아오는 기행을 벌인다. 둘은 어느새 밤새 수다를 떨며 새벽녘 공원을 산책하는 "우정"(127쪽) 관계로 발전하지만, '나'는 "내 안에 채연을 향한 다른 마음이 있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132쪽)하지 않을 수 없다. 어느 날 술에 취해 '나'의 연구실에 찾아온 박채연은 학과 선배 '정현지'를 만나러 가는 길에 동행을 부탁하는데, 그곳에서 경미한 몸싸움이 일어나고 이후 '나'는 학내 익명게시판을 통해 "문에창작과 이 모 교수가 같은 과 학생과 연애를 하고 있으며, 심지어 그 연애 상대가 학과 선배를 폭행하는 현장에까지 동행했다는 것, 그 폭행을 보고도 만류하지 않았다는 내용"(134쪽)의 고발을 당한다. 박채연과 정현지의 관계는 남다른 사이로 암시되지만, '나'는 물론 이를 밝히거나 확신할 수 없다. 박채연이 잠적하고 정현지가 졸업하는 것으로 사건은 일단락되고, '나'는 정년 보장 심사를 무사통과한다. 이후 '나'는 지루한 폭력 예방 동영상 강의 속에서 '위계'가 "지위나 계층을 나타내는 등급"인 위계位階가 아닌 "속임수나 방대방에게 오인, 착각을 일으키고 상대방의 그러한 심적 상태를 이용하는 것"(137쪽)인 위계僞計라는 것을 알게 되며 채연과 나눈 마지막 전화통화를 떠올린다. 사라진 채연은 억울함을 호소하는 '나'에게 "무서운 것과 불안한 것은 정말 차원이 다른 이야기인 거 같아요. 제 말이 맞죠?"(138쪽)라는 겁박의 말을 남긴 채 전화를 끊었다. 위계의 의미가 '권력'의 행사에서 '오인'으로 인한 심리적 조종으로 전환되며 결국 '교수-학생' '작가-지망생' '중년-청년'이라는 이 소설의 모든 권력관계는 철거되고 상대에게 오해를 사게 했을 소통의 실책만이 위계 폭력의 원인이 된다. "저는 그냥 한번 무서운 게 더 나을 것 같은데…… 불안한 건 계속 이어지잖아요?"(126쪽) 이제 위력을 행사하는 주체는 을의 위치를 이용하여 '나'를 영원한 불안 속에 가둔 채연이다.

이 소설의 화자가 자신의 심리적 무고함을 내어주면서까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위계 권력의 작동이란 상대적이라는 것, 무분별한 온라인 폭로가 사태를 종합적으로 보지 못한 이들의 오해에서 비롯되었다는 것, 비밀스러운 퀴어의 진실을 지켜주기 위해서 가해자로 지목된 당사자가 해명을 온전히 할 수 없는 사정이 있다는 것 등이다. 수년간 우리 사회를 뜨겁게 달구었던 물음, '위계란 무엇인가'는 결국 정보 비대칭으로 인한 '실수'와 '착오'로 축소되고 개별화된다.

익명게시판, 인권센터, 조사위원회로부터 공격과 심판을 받아 생계의 위험에 처하는 중년의 남성 선생들을 그리는 이 문학적 작업들은 지금 한국사회에서 터져나오고 있는 여성의 성폭력 경험 고백과 미투 운동의 의의를 무력화하는 수사와 상응할 뿐 아니라 현실의 권력 구조와 남성 동성 문화의 폭력성을 괄호 안에 둔 채 여성 인권과 퀴어 인권을 경쟁시키는 허구적 구도를 적극적으로 양산한다.

- pp.26-29


작품 분석 빼고 외부의 논의들은 다 올바르고 조리에 맞는 이야기들이다. 그러나 이것이 문학비평임을 감안하고 볼 때, 단지 올바르고 조리에 맞는 것에 그쳤기에 단순하고, 그래서 안타깝다. 저자가 이 비평에서 언급한 김종옥, 김경욱, 이기호 등의 단편소설들은 퀴어를 이용한 남성 젠더의 권력관계를 "은폐"하거나 "왜곡"하는 내용이 아니고, "수년간 우리 사회를 뜨겁게 달구었던 물음"을 "'실수'와 '착오'로 축소"시키고 "개별화"시키는 목적이 아니다. 이 소설들은 그러한 권력관계로 인한 사회적 문제점들을 지적하느라 우리가 놓쳤던 우리 자신의 추악함을 돌아보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당연히 이 소설들이 갖고 있는 결함과 아쉬움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남성 젠더라서 갖게 되는 젠더 권력관계에 대한 이분법적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여성 작가들이 쓴 남성 젠더의 폭력에 대한 고발을 다룬 소설들과 마찬가지로) 점이라든지, 퀴어를 남성 젠더의 억울함을 해소하기 위한 수단적 도구로 대상화했다는 점 등이 그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소설들이 남성 젠더의 권력과 여성·퀴어에 대한 폭력을 들은 고발하는 내용을 써서 내용-주제의 일차원적 관계를 구현하는 데 급급한 그런 소설들보다는 입체적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무엇보다 이 소설들이 갖고 있는 결함과 아쉬움은 그런 사회적인 요소들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런 건 '문학평론가'보다 '문화연구'를 전공한 '사회학자'들이 유용하게 수행해낸다.


이러한 소설들에 대한 사회과학적 분석을 제외하면 할 말이 없는 비평이라면, 그것은 비평으로서 안일한 고민의 부산물이랄 수밖에 없다.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들만 이야기하려고 창작하거나 비평하는 게 문학이라면, 그것은 문학이어야 할 이유가 없다. 거리로 나가야 한다. 그럴 시간에 노동자들과, 여성들과, 약자들과 함께 싸워야 한다. 문학비평은 어떤 문학 작품에서 피해자-가해자라는 구도가 나왔을 때 피해자와 연대하거나 가해자를 두둔하는 일이 아니다. 또, 문학비평은 문학작품에서 당대 사회의 문제 제기와 쟁점에 대한 유행 어린 목소리들을 읽어냈을 때, 동시대의 요구에 부응하는 일도 아니고, 약자의 호소에 귀 기울이는 일도 아니며, 지배 계급의 유착을 공고히 하는 일도 아니다. 그럴 때 문학비평은, 사회가 연대라는 이름으로 빠뜨리거나 놓치는 것들을 톺아본 문학에 대한 오롯한 해석을 시도하는 이해의 과정이다. 이해는 옹호나 반대와 다르다. 적어도 여성으로서, 여성이기에 그렇게 배웠음을 잊지 않으려 한다.


해당 비평집이 갖고 있는 면면을 다 헤아리지는 못했다. 분명 이 비평들을 묶어놓았을 때 발하는 장점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위와 같은 비평적 감식안은 여성의 비평가적 관점을 '남성 젠더의 위계질서'에 맞춤한 이항대립으로 풀어낸 결과로 생각되어, 읽는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여성으로서 문학을 비평한다는 것에 대한 사유는 좋은 것이고 필요한 것이라 늘 마음에서 곱씹고 되돌아보는 지점이다. 하지만 문학을 비평하는 것에 대한 사유가 오로지 여성으로서의 '나'만이 아니라 다른 '나'로서의 측면도 여성으로서의 '나'와 관계한다는 점을 망각한다면, 여성으로서의 '나'를 존중하지 못하는 태도가 될 것임을, 다시 한번 새기는 기회가 되었다.


물론 아래와 같은 대목에서는 저자의 젠더 의식이 반영된 비평적 독해가 어느 정도 빛난다.


드물지 않게 양산되고 있는 고발 서사들이 피해는 반드시 명명백백 밝혀져야 하며, 그렇게 되기 위해서 고발자의 욕망은 확실해야 한다는 함정에 빠져 도리어 당사자를 동여매는 일이 얼마나 빈번한지를 떠올리면, 이 소설은 오해를 무릅쓰고라도 기어이 다른 길을 가길 택한다.

성적 관계에서 동의를 다루는 언어라고는 ‘매우 동참’ 아니면 ‘강간’뿐일 때, 우리가 지금껏 거쳐온 모든 혼란한 성적 관계들을 명명할 수 없다. 동의했다고 말하기엔 심란하고, 강간이었다고 말하면 더 심란한, 허다했던 그런 일들 말이다. 이 소설은 이러한 성적 동의의 이분법을 깨고 여성 섹슈얼리티의 복잡성을 말하고자 애를 쓰며 운다.

- pp.239-240


또한,


하지만 현대 소설은 ‘스토리’가 아니라 스토리‘텔링’이 요체인 장르다. 핵심 사건만이 전부가 아니다. 특정한 인격과 역사와 버릇을 가진 인물들이 그들이 겪게 될 사건과 조화롭게 엮여갈 때 하나의 세계는 설득력을 얻는다. 우리는 이를 내러티브라고 부르며 잘 빚어진 소설은 요약하는 순간 궁색해진다.

- p.242


라고 쓸 때, 저자는 젠더 의식만이 아니라, 소설의 근원적 존재론에 대한 적절한 질문을 던진다. 이렇듯, 저자의 시선은 문학의 존재론에 집중할 때 더더욱 빛난다. 이 시선이 지금, 여기에서 싸우고 있는 사회운동의 그것과 결이 같아질 때 진부해지듯이 말이다. 읽으면서, 이만큼 탁월한 안목이 있으니 문학에 대한 더 많은 통찰력을 보여줬으면 하는 바람이 느껴졌다. 젠더 의식을 반영하지 말자는 얘기가 아니다. 젠더 의식을 반영한다면 사회운동으로서의 문학, 진보를 위한 메시지로서의 문학이라는 도구적 대상화의 함정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자기방어적 공격성, 특정 젠더에의 혐오, 지배 이데올로기의 이분법을 그대로 받아들인 채 젠더 갈등을 답습하는 관점 등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얘기다. 그리고 무엇보다, 문학은 젠더 의식을 반영하고도 문학이어야 한다. 젠더 의식에 함몰된 방법론이 아니라. 책 제목의 표현을 빌리자면, 세상이 제정신인 이야기를 병자로 취급한다 해도, 단지 제정신인 이야기밖에 할 수 없는 게 문학이라면, 굳이 문학을 문학의 형식으로 들여다볼 이유가 없다. 사회운동의 형식이면 족하다. 거리로 나가 싸우면 된다.


같은 맥락에서 저자는 왜 자신의 배경지식들을 활용치 않는지 의아했다. 한양대와 서울대에서 독일문학을 공부한 기반이 저자의 문학적 토양에 영향을 주었을 것임은 틀림없다. 이 비평집을 읽으면서 저자에게서 명백히 충분한 문학적 내공을 느끼곤 했지만, 저자가 그것을 그리 열심히 활용하지 않고 오직 사회운동에서 하는 이야기들을 답습하는 데에 그치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사회운동에서 하는 올바른 이야기들, 맞는 말들을 그대로 복사하기-붙여넣기 하는 것에 불과하다면, 문학비평이 아니라 사회비평이 될 것이다. 문학을 비평할 때 사회운동 말고 할 얘기가 없다면, 비평가로서의 자의식보다 사회운동가로서의 자의식이 앞서고 있는 게 아닐까. 문학이 사회운동의 면모를 갖지 말아야 할 이유 따윈 없지만, 페미니즘을 다루면서, 문학을 사회운동으로만 좁히는 관점을 견지하고 그러한 페미니즘만이 주효하다고 추구한다면, 그건 페미니즘에 대한 적극적인 왜곡이자, 굴절된 자기투사이며, 의도치 않은 자기 백래시가 될 것이다.


여러모로 재작년 여름에 읽었던 이지은 비평집과 비교할 때 아쉬움이 많이 남았다. 이지은 평론가의 비평집도 문학에서의 페미니즘을, 약자와의 연대를, 올바른 사회 변혁을 바라보고 있지만 달랐다. 그것은 아마도 이지은 비평집에 대한 천희란 소설가의 추천사처럼, "미학적 윤리와 정치적 올바름 사이의 긴장을 이해"하는 데서 비롯한다고 생각한다. 정치적, 사회적으로 변화와 개혁을 부르짖지 말라는 게 아니다. 문학에서 정치적 올바름을 이야기하지 말라는 게 아니다. 올바른 이야기를 올바르지 않은 방식으로 이야기하지 말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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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담으로, 이 비평집과 별개로, 제발 남성 젠더의 문학인을 비판할 때 "그가 ~한 까닭은 그가 백인 남성이기 때문이다."로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여성으로서 그렇게 끝나버리는 비평의 문장들을 읽을 때 부끄러워진다. 문학인이 갖고 있는 사회적 외연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고, 필요불가결한 일이다. 하지만 거기서 끝나는 문장들은 비평으로서 무책임하다. 권력을 오남용하는 남성 젠더만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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