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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과함께님의 서재

지각

나의 슬픔은 나무 밑에 있고
나의 미안은 호숫가에 있고
나의 잘못은 비탈길에 있다

나는 나무 밑에서 미안해하고
나는 호숫가에서 뉘우치며
나는 비탈에서 슬퍼한다

이르게 찾아오는 것은
한결같이 늦은 일이 된다- P10
설령

열까지 다 세고 나면
다시 하나둘 올라야 합니다

설령 높고 험하다 해도
딛고 있는 바닥부터 살펴야 합니다

낮고 천천히 숨을 고른 뒤
걸음을 옮깁니다

다만 이후의 시간에 관해서는
얼마간 생각하지 않기로 합니다

어차피
나의 기억과 나의 망각이
사이좋게 나누어 가질 것들입니다

그러니 지금은 채 닫지 못한 틈으로
새어 나오는 것들만을 적기로 합니다- P32
"우리의 목소리는 가장 좋아하는 노래를 닮아간다" "서리고 어리는 것들과 이마를 맞대며 오후를 보냈다" "흙과 종이와 수선화를 좋아하는 사람을 좋아한 적이 있었다"

물론 당장 하나의 글로
완성할 필요는 없습니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다가오는 계절의 밤은

세상에서 가장 길며
짙으며 높으며 넓습니다- P33
일요일 일요일 밤에

일신병원 장례식장에 정차합니까 하고 물으며 버스에 탄 사람이 자리에 앉았다가 운전석으로 가서는 서울로 나가는 막차가 언제 있습니까 묻는다 자리로 돌아와 한참 창밖을 보다가 다시 운전석으로 가서 내일 첫차는 언제 있습니까하고 묻는다- P66
블랙리스트

몇해 전 아버지는 자신의 장례에 절대 부르지 말아야 할지인의 목록을 미리 적어 나에게 건넨 일이 있었다 금기형, 박상대, 박상미, 신천식, 샘말 아저씨, 이상봉, 이희창, 양상근, 전경선, 제니네 엄마, 제니네 아빠, 채정근 몇은 일가였고 다른 몇은 내가 얼굴만 알거나 성함만 들어본 분이었다 "네가 언제 아버지 뜻을 다 따르고 살았니?"라는 상미 고모 말에 용기를 얻어 지난봄 있었던 아버지의 장례 때 나는 모두에게 부고를 알렸다 빈소 입구에서부터 울음을 터뜨리며 방명록을 쓰던 이들의 이름이 대부분 그 목록에 적혀 있었다- P72
산문_생일과 기일이 너무 가깝다

제천. 이곳을 지나기 전에는 어디를 지나야 했을까. 나를지난날로 만드는 시간이 있었듯 너를 앞날로 만드는 시간도있다. 그렇다면 시간은 우리를 어디에 흘리고 온 것일까. 분명한 일은 사람에게 못할 짓을 내가 하고 있다는 것이다.

제주 도착하던 날의 바람은 어디 멀리 가지 않고 떠나는날까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진심을 마주하는 상대의손길과 그에게는 내가 진심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는 불길과좀처럼 투명해지지 않는 눈길. 산간 도로는 오늘도 열리지않았다.

벽제.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의 힘은 세다. 다시 장례를 치른다. 생일과 기일이 너무 가깝다. 그간의 일을 삼일 만에 떠나보내고 세상을 끝낸 풍경의 상가. 조등 하나 걸지 않았다. 내가 모르는 것들의 힘은 더 세다. 죽음이 이야기하는 삶은 한결같지만 삶이 이야기하는 죽음은 매번 다르다.- P83
대구. ‘빗소리가 요란하다‘라는 문장을 쓰면서 시작한다. 반쯤 걸쳐진 빛을 언제쯤 직시할 수 있을까. 비 오고 바람 부는데 나는 낯선 길에서 누군가와 눈인사나 하고 싶어한다.

서산. 저녁이 밤이 되는 일을 지켜보고 있다. 이것만으로 하루가 충분해질 때가 있다. 시간은 가기도 잘도 간다. 정해진 방향이 없어 가끔 뒷걸음을 한다. 만약 그날을 기점으로다시 살아내야 한다면 지금과 꼭 같이 하지는 못할 것이다.- P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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