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어렸을 때를 제외하고는 어떤 형태로든 공동주택에서만 살았던 내게 이 동네에서의 생활은 여러가지 의미에서 당황스러움의 연속이었다. 이곳에서의 생활을 통해 내가 배운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산다는 행위가 관념이아니라 좀더 구체적인 것들, 물질성이랄지 육체성을 가진것들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이곳에서는 눈이 오면 허리가 아플 때까지 집 앞의 골목을 쓸어야 하고(겨울마다서울에는 눈이 얼마나 자주 오는지!) 1년에 한번씩 정기적으로 정화조 청소업체를 직접 불러 나의 배설물 냄새를 맡아야 한다. 벽의 페인트가 벗겨지면 다시 칠해야 하고, 문고리가 고장나거나 방충망에 구멍이 나면 임시방편으로라도 어떻게든 수리를 해야 하며, 외벽의 갈라진 틈을 타고제법 무성히 자라는 잡초들을 때마다 내 손으로 뽑아야 한- P13
다. 주거하는 이와 관리하는 이가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거주의 공간이 아니라 경제적 가치를 지닌 재화로 인식되는아파트와 달리, 이 동네에서 집은 삶의 공간이다. 동네에서의 하루하루는 집이든 인간이든 간에 만물이 시간과 함께서서히 마모되는 것은 자연의 섭리이며, 육체적인 노동과시간 그리고 정성을 쏟는 돌봄을 통해서만 우리가 모든 종류의 소멸을 가까스로 지연할 수 있을 뿐이라는 진실을 내게 알려준다. 그리고 어떤 공간이 누군가에게 특별한 장소가 된다면 그것은 다름 아니라 오감으로 각인되는 기억들의 중첩 때문이라는 사실도.- P14
공장식 축산업이 환경에 얼마나 악영향을 미치고 동- P71
물의 권리를 침해하는지 고발하는 책을 쓴 소설가 조너선 사프란 포어가 그의 다음 저서『우리가 날씨다』, 송은주 옮김, 민음사 2020에서, 동물을 먹는다는 것에 대하여』송은주 옮김, 민음사 2011를 출간하고 난 이후에도 꽤 여러번 공장식 축산으로생산된 고기가 들어간 글로벌 기업의 햄버거를 사 먹은 적이 있다고 고백하는 대목을 읽으며 나는 큰 위안을 얻었다. 나는 그가 환경과 동물권을 보호해야 한다는 자신의 신념에도 불구하고 댤걀이나 치즈 같은 것들에 대한 욕구를 끝내 포기할 수 없어 너무나도 부끄럽다고 고백을 하는 사람이라 그의 글을 조금 더 신뢰하게 되었다. 내 마음은 언제나, 사람들이 여러가지 면과 선으로 이루어진 존재들이고매일매일 흔들린다는 걸 아는 사람들 쪽으로 흐른다. 나는우리가 어딘가로 향해 나아갈 때, 우리의 궤적은 일정한 보폭으로 이루어진 단호한 행진의 걸음이 아니라 앞으로 갔다 멈추고 심지어 때로는 뒤로 가기도 하는 춤의 스텝을닮아 있을 수밖에 없다고 믿고 있다. 우리는 그런 방식으로만 아주 천천히 나아간다고.- P72
사람들이 그토록 서투른 말들을 건네는 이유는 죽음에 대해서 말하는 법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는 오르빌뢰르의 문장을 읽으며 사랑하는 이를 잃은 사람 앞에서 제대로 된 위로의 말을 건넬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이해하게 됐다. 죽음은 너무나도 커다란상실이자 슬픔이고, 그것을 담기에 언어라는 그릇은 언제나 너무나도 작다.- P130
사회가 어떻게 노인을 타자화해왔는가에 대해 깊이사유한 시몬 드 보부아르는 60대에 접어들어 쓴 노년에 관한 책「노년, 홍상희·박혜영 옮김, 책세상 2002에서, 일찍이 우리는 노인을 타자로 여기기 때문에 ‘노화‘, 즉 ‘나 자신‘이며 동시에스스로가 ‘타자‘가 되는 이 낯선 상태를 기꺼이 받아들이기가 매우 어렵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녀는 나이 듦이 우리에게 선물해주는 가장 가치 있는 축복은 젊은 시절 우리의눈을 가리는 허상과 숭배를 치워버리고 우리가 진정성에가닿을 수 있게 해주는 것이라고도 적었다. 몇해 전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 노화를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유는 내게명료하게 다가왔지만 그것이 축복이라는 말은 연기처럼흐릿하기만 했다. 지금 나는 늙는 것이 헐벗어가는 과정이아니라 우리를 밑바닥으로 가라앉히는 거짓 욕망들로부터자유로워지고 깃털처럼 가벼워지는 과정이라는 걸 어느정도는 이해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하지만 내가 정말로 이해하고 있는 걸까?- P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