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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과함께님의 서재
뮤지컬로도 만들어진 박지리 작가의 장편소설. 철저히 계급화되어 1지구부터 9지구까지 구획된 지구. 1지구 최고 학교인 프라임스쿨에 다니는 다윈과 프리메라스쿨에 다니는 루미가 30년 전 죽은 루미 삼촌 제이의 죽음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 9지구를 찾아가는데…
설국열차가 생각나는 설정이다.

"할아버지랑 아버지도 가끔은 이렇게 안아 보세요. 그러면서로를 더 잘 이해하게 될 거예요. 전 할아버지랑 아버지가 스킨십하는 모습을 본 적이 별로 없는 것 같아요."
러너는 자기 그림자 옆에 다정하게 붙은 그림자를 흐뭇하면서도 쓸쓸하게 바라보았다.
"별로가 아니라 아예 없을 거다. 나도 기억이 가물가물하니."
"육체는 영혼을 담는 그릇이라고 하죠? 그릇끼리 부딪치지않는데 어떻게 서로의 영혼을 느끼겠어요?"
러너는 웃으며 다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우리 다윈은 시인이구나."라고
"바로 이거예요. 저한테 하듯이 아버지에게도 이렇게 해보세요."
러너는 다윈의 머리를 쓰다듬었던 손으로 다시 손자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말했다.
"글쎄다, 상상이 안 되는구나. 이젠 머리를 쓰다듬어 줄 나이도 지났고."
"하지만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아버지가 할아버지의 아들이란 사실엔 변함이 없잖아요. 저보다도 더 가까운 사이인걸요."
"그게 말이다, 나도 왜 그러는지는 모르겠는데, 아주 오래전부터 아버지와 아들보다는 할아버지와 손자 사이가 더 쉬운거라는 말이 있더구나.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느끼는 모양이야."- P75
다윈은 프라임스쿨을 둘러싼 자연에서 위안을 얻었다. 자신 있게 제출한 리포트에서 기대보다 못한 결과를 얻어 낙담한 날이면 혼자기숙사 부근의 오솔길을 걷곤 했다. 흔들림 없이 한자리를 지키고 있는 나무들과 외부의 도움 없이도 나날이 무성해지는 풀, 땅에 떨어진 뭔가를 열심히 모으는 작은 곤충들을 지나치다 보면, 자연이라고 불리는 모든 존재가 자신의 운명에 맡겨진 책임을 완수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믿음에 이르게 되었다. 인간만이 힘든 운명을 떠안은 게 아니었다. 혼자 애쓰고 있는 게 아니었다. 자연의 그런 조화로움을 느끼고 나면 상심했던 마음도천천히 회복되어 갔다.
길은 걸음만이 아니라 생각도 함께 이끌었다. 걷고 걸어 길이 끝에 다다를 즈음이면 교수님이 지적한 부족함이 무엇인지 알것 같았고, "기대가 크기 때문에"라는 충고 속에 깃든 애정을 진심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산책을 통해 얻은 또 다른 의미 있는 발견은 인류가 얻은 모든 진리가 결국엔 자연에서 온 것이라는 깨달음이었다. 어느 오후, 산책을 하던 다윈은 문득 과학과 수학, 철학, 문학, 종교, 예술에서 이루어진 근본적인 성취가 모두 이렇게 하늘과 땅과 나무를 바라보는 행위에서 비롯한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과학자도 화가도 어느 날 이렇게 똑같이 자연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각자 자신이 바라본 자연을 전혀 다른 기호로 역사에 남겼다.- P87
다윈의 지적은 물론 합당했다. 그러나 이미 수없이 자문해 본 낡은 질문이었다. 질문만 하고 답을 찾지 않는다면 인간은 영원히 미궁속을 헤맬 수밖에 없을 것이다.
루미는 사진들을 게임 카드처럼 손에 쥐며 말했다.
"맞아, 이건 성공 가능성이 아주 희박한 패야. 확률만을 따진다면 당연히 실패할 확률이 높겠지. 하지만 중요한 건 그래도 게임을 할 수 있는 패가 아직 남아 있다는 거야. 존재와 비존재는 단순히 많고 적음의 차이랑은 비교할 수 없는, 아예 다른 차원의 일이잖아. 희박하지만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모든 가능성이 생길수있는거니까."
루미는 자신을 응시하는 다윈의 시선을 느끼며 말을 이었다.
"다윈 너와 나도 어쩌면 이 사진들이 가지고 있는 만큼의 가능성으로 이곳에 온 거 아니야? 생각해 봐, 얼마 전까지 너랑 내가 9지구로 가는 기차를 함께 탈거라는 상상을 해본적 있는지. 하지만 우린 지금 그러고 있잖아. 왜냐면 우리가 추도식에서 말없이 스쳐 지나갔던 순간마다 오늘 이렇게 만날 수 있는 희박한 가능성은 늘 존재했으니까."
루미는 다윈이 자신의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잘 알 수 없었다. 어떤 남자애들은 단순히 여자의 의견을 듣고 있는 것만으로도 자기가 지고 있다고 여기기도 했다. 레오처럼 자존심 강한 프라임 보이라면 더욱 그럴 가능성이 높았다. 다윈은 아무 말이 없었다.- P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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