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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 환영
  • 김이설
  • 9,000원 (10%500)
  • 2011-06-09
  • : 1,524

아이를 씻기고 온 방에 튄 물을 닦을 때마다, 조금만 더 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많이는 아니고, 조금만. 그건 욕심이 아니라 희망이라고 생각했다. 그 희망이 이뤄지려면 남편이 시험에 붙어야 했다. 시험에 붙을 때까지는 공부를 해야 했고, 공부를 하는 동안은 내가 돈을 벌어야 했다. 일이라면 이골이 난 몸이었다.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었다. 나는 남편이 허드렛일을 하는 게 아니라 그래도 상 앞에 앉아 책을 펼쳐 드는 사람이어서 좋았다. 우리에게도 희망이 있다. 희망이 있다는 사실이 희망이었다.(29쪽)

등신. 그것도 희망이라고.

자기는 써보지도 못한 돈을 빚으로 떠안고 고시원으로 쫓겨나 낮에는 공장에서 눈알이 빠질 듯 선별작업에 몰두하고 그나마 밤에도 호객 아르바이트를 해야만 먹고 살아지는 처지에 감히 사랑을 하고, 아이를 갖고, 결혼식도 올리지 않은 남편이 공무원 시험에만 합격하면 고단한 삶이 당장 달라질 것처럼 희망을 갖고, 동생들이, 엄마가, 남편이, 아이가 죽도록 희생에 희생만을 요구하는데도 말도 안되게 수동적인 삶을 살며, 그래도 희망이 있다는 사실에 희망을 거는 머저리, 맹추, 등신...

 

환영. 눈 앞에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보는 것, 그러니까 한마디로 착각. 눈 앞에 일어나지 않는, 일어날지 알 수도 없는 환영을 믿으며, 자신과 오늘과 내일까지 거는 이런 이야기는 너무 식상하다. 그렇지만 환영일지라도 희망을 갖는 것이 잘못이 아니듯, 드문 일도 아니다. 아니, 어쩌면 우리는 모두 불확실한 내일을 위해 자신과 오늘을 희생한다. 단지 내일은 다를 것이라는 기대로.

 

그러나 희망을 갖고 오늘을 희생했더니 과연 바램이 이루어졌다 라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왜냐하면 ‘희망을 이룬다’ 라는 것이 무엇인지 나는 잘 모르겠으니까. 몸뚱이를 굴리지 않아도 먹고 살아지는 것을 말하는 건지, 남보다 나은 입성을 자랑삼을 수 있을 만큼 살게 되는 걸 말하는 건지, 삼십 몇 개월 할부로 뽑은 새 차를 굴려 축제다 맛집이다 찾아다니며 블로그에 사진을 올리는 것을 말하는 건지를 적어도 나는 알지 못하니까.

아이를 씻겨도 물이 튀지 않는 욕실과 방의 구분이 명확한 집을 얻고 나면, 주방과 거실의 경계가 뚜렷한 집을 바라게 될 것이고, 그다음엔 아이와 부부가 개인적 공간을 확보할 만큼의 여유가 있는 집이 필요해 질 것이며, 그리고 그것들은 계속 욕심이 아닌 희망으로 남을 것인데, 과연 희망이 있다는 사실을 희망으로 여겨야 하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말도 안되게 불행한 이야기를 읽으며, 소소하고도 일상적인 불행을 잊고 싶었지만, 주인공처럼 이렇게 저렇게 몸을 써서 먹고 살지 않는다고 해서 다행이라 여기며 안도 할 수만은 없다는 생각이 든다. 희망이란 환영에 홀려 사실은 ‘나’를 전부 팔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각성을 하게 되었으므로.

 

이보다 더 끔찍할 수 없을만큼 신산스럽고, 그러느니 차라리 죽지 왜사느냐 묻고 싶은 주인공의 삶이지만, 김이설은 그걸 질척대지 않고 쓸 줄 아는 작가다. 늘어지는 감상을 거둬버린 건조한 문체, 꾸밈이나 더함없는 그 문체 때문에 이 구질구질한 이야기를 읽고 읽고 또 읽으려 또다른 김이설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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