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전체보기

알라딘

서재
장바구니
나는...
  • 이름 없는 자들의 도시
  • 주제 사라마구
  • 13,320원 (10%740)
  • 2008-02-20
  • : 1,261

이름을 알지 못할 어느 도시의 공동 묘지에는 자살한 사람들의 무덤을 따로 모아둔 구역이 있다. 거대한 초원이 펼쳐진 것처럼 보이는 그곳은 무덤은 물론이고 비석조차도 눈에 잘 띄지 않는다. 마치 자연 초지처럼 보여 그곳이 공동묘지라는 것을 쉽게 알아볼 수 없을 정도이다. 설상가상으로 매장한지 얼마되지 않은 무덤엔 제대로 된 비석 대신 번호판을 꽂아두어 그 황량함이 더했다. 살아있는 사람이라고는 아무도 없는 이른 새벽, 양치기 노인은 양들에게 풀을 먹이러 이 구역을 찾곤 하는데, 그는 마치 장난처럼 무덤들의 번호판을 마구 뒤섞어 놓는다. 그런 행동은 죽은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항변하는 주인공에게 노인은 궤변 아닌 궤변을 늘어놓는다. "내가 생각하기엔, 물론 그렇게 믿고 있기도 하지만, 자살한 사람들이란 누구와도 만나고 싶지 않을 게 틀림없소, 선생이 말했던 내 악의에 찬 장난으로 인해서 그들은 더 이상 성가신 일을 치르지 않아도 된단 말일세."(253쪽) 라고.

 

자살하는 사람들에게는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목숨을 걸어서라도 밝히고 싶은 억울함이든, 죽을만큼의 원망이든, 또는 죽음으로써만 씻게 되는 죄책감이든 반드시 그 이유가 있을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서 한장 남기지 않은 죽음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이유를 알 수 없는 죽음에 대한 한탄은 남은자의 애도를 위한 무덤이 그렇듯 살아있는 사람들의 위안이며 호기심이고 이기일 뿐이다. 차라리 죽음을 택할 정도의 고통이었다면 그것에 대한 항변이나 핑계조차도 필요하지 않을 터, 그런 의미에서 노인의 궤변은 진리처럼 여겨진다. 자살한 사람들은 누구와도 만나고 싶지 않을 거라는 그말은 남은 사람들이 흘리는 눈물이 누구를 애도하던 모두 같지않겠냐는 의미가 아닌가.

 

그곳에서 울지 마오, 나 거기 없소, 나 그곳에 잠들지 않았다오, 그곳에서 슬퍼 마오, 나 거기 없소, 그 자리에 잠든 게 아니라오, 나는 천의 바람이 되어 찬란히 빛나는 눈빛 되어, 곡식 영그는 햇빛 되어, 하늘한 가을비 되어, 그대 아침 고요히 깨나면 새가 되어 날아올라, 밤이 되면 저 하늘 별빛 되어 부드럽게 빛난다오, 그곳에서 울지 마오, 나 거기 없소, 나 그곳에 잠들지 않았다오, 그곳에서 슬퍼 마오, 나 거기 없소, 이 세상을 떠난게 아니라오... 

김효근 역시, 양준모 노래 '내 영혼 바람되어'

주인공은 태어난 자와 죽은 자의 기록을 보관하는 중앙등기소에 말단 보조서기다. 그는 우연히 손에 들어온 '모르는 여자'의 흔적을 쫓는다. 마치 그 여자를 찾는 것이 자신의 삶에 어떤 큰 의미라도 있는 것처럼 그녀가 어린 시절 다녔던 학교를 뒤지고, 그녀가 살던 집 주위를 배회하는 모습은 지극히 변태적인 행위로 보인다. 그러나 그녀가 죽었다는 것을 알고, 여전히 모르는 여자인 그녀의 물건을 쓰다듬으며 '세상은 의미가 없다' 라고 말하는 순간의 남자는 그 누구보다 인간적이다. 알건 모르건, 유명하건 유명하지 않건, 이름이 있건 없건, 누군가 기억하건 말건, 죽음은 너무도 공평하다. 그러니 '모르는 사람을 위해 눈물을 흘린다고 해서 억울할 건 없다' 라고 한 양치기 노인의 말 역시도 진리다. 어쨌든 모두가 가는 마지막엔 죽음이 있으니까.

 

'모르는 여자'의 흔적을 쫓는 남자의 삶은 고독했다. 나이가 오십이 되었지만 등기소에서는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말단의 보조서기이고, 마치 무덤과 같은 집에는 아파도 이마에 손을 짚어주거나 스프를 끓여줄 사람 하나 없다. 힘든 일을 상의할 친구나 지인도 없다. 남자의 유일한 취미는 유명인들의 신상 명세서나 신문 기사를 모으는 것이다. 서류나 신문지 상의 그들은 살아있지만 말을 나누고 체온을 나눌 실제의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그저 거기 종이에 이름으로만 존재하는 삶과 죽음의 경계가 필요치 않은 지점의 사람들이다. 그런 그가 모르는 여자를 쫓는 일에 대한 집착을 떨치지 않는 것은 어쩌면 너무 당연해 보인다.

그렇지만 고독한 사람은 그뿐이 아니다. 그가 쫓는 '모르는 여자'의 경우 부모도 직장 동료들도 그녀가 자살한 이유를 모를 만큼 고독한 생을 살았다. '모르는 여자'의 대모인 일층에 사는 노부인이 어느날 구급차에 실려 갔지만 이웃들은 그후로 그녀의 소식을 모를뿐더러 그녀의 병세를 묻는 남자를 문전박대 할 정도로 그녀에게 관심이 없다. 모두 고독하기 때문이다. 자살한 여자도, 구급차에 실려간 노부인도, 딸이 자살한 이유를 모르는 부모들도, 구급차에 실려간 사람에 대해 관심이 없는 이웃들도 모두 각자가 살아남기에도 벅찬 인생들인 거다. 보통 이럴때는 각개 전투해야하는 현대인들은 고독하다고 표현하지만, 정말 과거의 사람들은 고독하지 않았을까? 옆집의 숟가락 갯수까지 알았다던 그 시절의 사람들은 정말 외롭지 않았을까?

 

이름없는 자들의 도시란 제목은 그저 <눈먼 자들의 도시>와 <눈뜬 자들의 도시>에 이어 시리즈로 묶기 위해서 지었던 출판사 '해냄'용 제목이었던 듯, 원제는 <All The Names>. 인간이란 존재가 고독을 사명처럼 받들고 살아갈 때, 세상 모든 이름들 만은 고독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이름은 실체와 상관없이 언제고 존재하니까.

 

작가 주제 사라마구를 이제서야 알게 되었다니, 하고 억울해 하다가 이제라도 알게되었구나 하고 안도한다.


  • 댓글쓰기
  • 좋아요
  • 공유하기
  • 찜하기
로그인 l PC버전 l 전체 메뉴 l 나의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