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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없이 갈라진 길들이 있는 정원
  • 한가함과 지루함의 윤리학
  • 고쿠분 고이치로
  • 34,200원 (10%1,900)
  • 2025-01-22
  • : 2,518

바로 얼마 전 6월 하순은 <마법의 시간>이라고 쓴 것 같은데..

어느덧 계절은 7월로 접어들고 있다.. 


어제 <자기만의 방>에서 철수.. 본가로 내려왔다..

명불허전이라고 했던가.. 역시 대프리카라는 명성에 부끄럽지 않게.. 저녁 8시가 넘었음에도 역에서 내리자마자 후끈한 바람이 훅 들어온다.. 

여름을 나기 위해 본가로 내려온 것이긴 한데.. 문제는 이 집에는 <자기만의 방>이 없다는 것.. 집의 구조가 한국의 국민 평형이라는 3LDK니까.. 원래라면 세 명이 방 하나씩을 가질 수 있어야 하지만.. 한국의 평범한 가족의 라이프 스타일을 따르다보면.. <자기만의 방>은 2명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는 상황.. 이미 이전 점유자들이 <자기만의 방>을 하나씩 꿰차고 있는 상황에서 신입자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거실의 한 귀퉁이에 <자기만의 공간>을 만드는 것뿐이다.. 예전에 어떤 소설에서 베란다에서 살아야 했던 한 주인공의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는데(한강이었나 싶다..).. 요새 아파트는 확장형이라 베란다도 없다.. 물론 대프리카에서 한 여름 베란다의 삶을 상상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고쿠분 고이치로라는 저자의 진가는 이미 올 봄 <중동태의 세계>를 읽으면서 확인한 바 있다..

그리고나서 들뢰즈에 대한 짧은 책 한 권, 그리고 최근에 재번역되었다는 <한가함과 지루함의 윤리학>을 바로 구입했는데.. 여름방학이 되니 책을 읽을 <여유>가 생겼다. 그러고 보면 나는 <한가하지 않지만 지루함을 느끼는> 유형인가.. 누구나 <한가하지만 지루함을 느끼지 않는> 베블런의 유한계급의 삶을 꿈꾸겠지만.. 21세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런 유한계급은 존재할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실 부자들이 제일 바쁜 게 사실이니까.. 

어쨌거나 하루 종일 앉아서 이런저런 번잡한 업무들을 처리하다 보면 오후 4-5시 즈음부터 지루함이 밀려오는데(더구나 한 여름은 낮이 길다.. 7시 반까지 해가 쨍하니까..) 그 지루함의 정체에 대한 주석 달기를 하기 위해 이 책을 꺼내 들었다는.. 


무엇보다 책의 첫 부분에 파스칼을 인용한 대목이 매력적이었다..

인간의 불행은 모두 인간이 방에 가만히 있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난다. 방에 가만히 있으면 되는데 그렇게 할 수가 없다. 그래서 굳이 불행을 자초하고 있다. 


<팡세>의 한 대목을 저자가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번역한 구절인데(원문을 확인해보지 못했다..).. 순간 빠져들었다.. 방에 가만히 있을 수 없다는 것은 곧 방에 혼자 있으면 할 일이 없어서 안절부절 못한다는 것, 게다가 참을성이 없다는 것, 즉 지루해한다는 것. 이것이, 그리고 오직 그것만이 파스칼에 따르면 인간의 모든 불행의 원천이라는 것이다.. 


가끔씩 책도 읽히지 않고, 모든게 지겨워 방안에서 서성이며 빙빙 도는 경험을 해 본 적이 있지 않은가.. 울리지도 않는 핸드폰을 계속 꺼내 보면서.. 어딘지 신선한.. 정곡을 꿰뚫는 문장이라는 느낌에.. 지인들에게 공유하면서.. 그래 공유하려는 몸짓 자체가 지루함의 한 표현일 수도 있겠지만.. 

그래 방에 가만히 있으면 되는 것이지.. 방학이라는 핑계를 대고.. 전공 서적은 좀 제쳐두고..그동안 사 놓고 읽지 못한 책이나 읽으면서 시간을 보내면 되겠다.. 그런 마음을 가슴에 품고.. 본가로 내려왔던 것인데..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을 놓치고 있었다..

본가에는 <자기만의 방>이 없다는 것..

파스칼은 그래도 <자기만의 방>을 가지고 있었겠지? 사실 마담 댈러웨이를 좋아하긴 하지만.. <자기만의 방>은 읽어본 적이 없는데.. 너무나 적확한 표현이라.. 사실, 100여 페이지의 책을 읽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제목이라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어쨌거나 거실 한 구석에 자기만의 책상을 놓아두고.. 평화로운 주말 오후를 즐기고 있다.. 고쿠분 고이치로의 책을 읽으면서.. 특히 4장의 소외론과 5장의 철학이 흥미롭다.. 가벼움과 조야함에 빠지지 않으면서 하이데거의 논의를 이렇게 쉽고 재미있게 이야기해줄 수 있다니.. (이 역시 예전 사사키 아타루의 글을 읽으면서 느꼈던 것이기도 하지만, 서구의 정전들을 비교적 믿음직한 번역으로 읽을 수 있는 지식장에서 가능한 글쓰기라고.. 변명을 해보지만, 그것만은 아니겠지.. 지식장의 식민지적 기원을 운운하기에는 세월이 너무 많이 흘러버렸다)



이미 잘 정리된 논의를 다시금 요약하는 것은 커다란 의미는 없겠지만.. 복습을 위해 지루함의 세 형식에 대한 하이데거의 논의를 다시 써보면..

(1)무엇인가에 의해 지루해진다는 것. 

(2)무엇인가를 하고 있으면서 지루해한다는 것..

(3)아무튼 그냥 지루하다는 것..

특히 지루함의 궁극적 형태인 세 번째 형식, "아무튼 지루함"에 맞선 하이데거의 응답은 (역시 하이데거다운) "결단"이다.. 하지만 저자는 결단을 내리는 인간 역시 스스로가 결정한 것의 노예가 될 뿐이라며 지루함의 첫 번째 형식과 세 번째 형식이 유사하다고 지적하며, 인간다운 삶이란 결국 하이데거가 말하는 지루함의 두 번째 형식.. 즉 지루함과 공존할 수밖에 없는 삶을 현실 그대로 받아들이고 어떻게든 잘 살아보자는 다소 '황당한' 결론을 제시한다.. '황당하다'고 했지만, 사실 그게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이기도 하니까.. 가끔 동물되기(스피노자-들뢰즈로 이어지는 계보겠지만)도 해보고, 소비사회가 주는 유혹(기분전환과 지루함의 악순환)에 빠지면서도.. 또 가끔 낭비하고, 사치도 부려보면서 사물을 향유하고 즐기고, 또 생각하면서 함께 한가함의 왕국을 만들어보자는 그의 이야기가 허무맹랑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저자의 당부처럼.. 이러한 결론은 이 책을 통독하는 '과정'에서야 비로소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것!! 400여 페이지에 이르는 책을 통독해 달라니, 저자야말로 보통 배짱은 아니지만.. 지루함과 정주혁명을 연결시키는 2장의 계보학, 베블런에서 보드리야르에 이르는 소비사회론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면서 한가함과 지루함의 윤리학을 노동의 문제와 연결시키는 3장의 경제학, 루소와 맑스를 다시 읽으면서 소외로부터의 해방에 대한 새로운 사유를 제시하는(본래성 없는 소외.. 동일성 없는 차이를 연상시키는) 4장 소외론도 슬슬 읽어나가기에(통독하기에) 큰 어려움은 없다..

 


한여름의 주말 오후를 지루하지 않게 해준.. 저자에게 경의를 표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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