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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목서님의 서재
  • 그 아이에게 물었다
  • 한상권
  • 9,000원 (10%500)
  • 2018-03-05
  • : 547
 4월이다.

 겨울을 견뎌낸 나무에 꽃잎은 피고 지고, 내가 보지 않는 그 어디선가 꽃잎들은 또 피어나서 바람에 흔들리거나 비에 젖고 있을 봄밤이다.

  나는 "57편의 시를 얻기 위해 더 많은 시를 떠나보냈다.”라고 말하는 시인의 시집을 읽는다. 시 한 편, 한 편이 오롯이 제 이름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한 그루, 한 그루 나무들이라는 생각을 거듭하며 읽는다.

 존재하지만 이 세상에 존재하는지도 몰랐을 나무들, 알고 있었다 하더라도 그냥 지나쳤을 나무들. 시인이 눈길 주지 않았다면, 이 나무들 나는 오늘도 흘낏 보고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

 이 아이나무, 저 아이나무, 그 아이나무, 선생님나무, 엄마나무, 아빠나무, 할머니나무, ……

 

  학교의 시계는 어김없이 빠르게 돌아가서 아이들은 중간고사를 코앞에 두고 “미로 같은 영어책 수학책 속에서 하루 종일 빠져나오질 못하고 「장가가고 싶네」” “매일 수학수학 하면서도 수확하지 못하고 밤낮 미적미적 하면서도 미적거리기만 하네”「수학에 대한 변명」라며 발을 동동거릴지도 모른다. 이 아이들은 때로 “셈법이 복잡한 건 싫어요 닥치고 돈 벌 게에요.”「『무소유』를 읽는 시간」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손톱이 좀 길다고”, “손톱에 고양이 장식을 좀 했다고” “이상한 눈빛으로 ”보고 “못 말리는 애 취급하는”, “그냥 손톱이 긴 것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덜 좋은 아이쯤으로 보는” 어른들의 세상을 향하여 “수능 끝나고 손톱인권 위원회를 만들어 대한민국 학생의 손톱을 보호해야겠다.”「손톱인권 위원회」라고 씩씩하게 선언하기도 한다.” “화장실에 살짝 들어가 카톡을 확인”하다가 ”보고싶다^^는 말 이거, 허공에서 날린 구름문자는 아니겠지.” “느닷없이” 붕붕 “몸이 수직 상승”하는 기분을 느끼기도 하고, 「화장실에 앉아」, 짝사랑 하는 누나에게 말도 못하고 “ 누나는 내 여자야, 라는 말풍선”을 수없이 허공에다 띄우기도 한다.

 

국화가 노랗게 학교를 뒤덮은 날

수없이 연습하고 반복한 일이지만

나는 그만 연극제에서 동선을 놓쳤다

순간적으로 당황하여 뒤로 물러서다가

이번엔 누나의 가슴과 부딪혔다.

짧은 순간 준비한 대사가 흐트러지고

연극이 끝난 뒤에도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러나 우리 동아리 냉혹 전사는

앞으로 얼마간 누나라고 부르지 말라고 했다.

누나를 누나라고 부르지 말라니,

누나를 왜 누나라 못 불러, 연습을

아무리 해도 떨리는 이유는 살피지 않고

내 마음은 연극도 아닌데, 왜 나를 몰라.

국화가 교정을 노랗게 뒤덮은 날

누나는 내 여자야, 라는 말풍선이

하늘을 수없이 수놓은 것도 모르고.

                -「연극이 끝나고」, 전문

 

  또 선생님들은 “평화롭지 않은 밤공기를 쓸어 넘기며” "공기 무거운 진학실로” 「대명동 소피스트」 향하거나, “야간 자율학습 조퇴를 하러 찾아온” 제자에게 “느닷없이 꿈이 뭐냐고 물어”보고, “가슴 속에 질문거리가 많다”는 제자에게 “그래도 질문을 많이 품고 있으면 괜찮겠다고 당장 답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아도 모든 질문 때문에 너의 길이 열리겠다고” 위로하고 계실지도 모르겠다. 어느 교실에선 짓궂은(?) 국어 선생님이 화장실에 가겠다는 아이를 붙들고 “삶은 무엇이든 간절함이 통과하는 게임”이라는 것을 체득하게 하고 있을지도.

 

수업 시간에 갑자기 화장실을 가겠단다.

처음엔 한두 번 그냥 보내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삼행시를 짓기로 했다.

기본 운자는 화장실, 가끔은 실장화로 뒤집는다.

급하다고 딴은 후두두 달려 나오는 녀석 봐라,

오늘 운자는 너의 이름 석 자를 거는 거다.

조건은 단 하나, 주변에 작은 울림을 주면 된다.

급하냐, 그렇다면 이번엔 김소월이다.

다음은 김수영, 그다음은 김춘수, 신경림,

앞 시간 다른 아이의 감성과 다를 바 없는데?

오, 그렇다면, 학교종 라일락 그리움 첫맘때!

느닷없는 운자의 변화에 당황할 때,

그렇지, 간절함이 부족하면 할 수 없지

제자리로 돌아가 승화시키는 거다.

그러면 한쪽은 환호성, 급한 쪽은 몸을 비튼다.

그러나 그 순간 정말로 이마에 송글송글

간절함이 맺힌 녀석에겐 연습장을 쥐여 준다.

너는 곧장 세상 밖 화장실로 달려 나가

지금 이 순간을 한 편의 짧은 시로 옮겨 와!

복도로 조르르 미끄러져 나가는 녀석들아

삶은 무엇이든 간절함이 있어야 통과하는 게임

오늘은 침묵이 동이다, 쏟아 내라

그러면 오늘 하루, 엉겅퀴꽃들이

엉킨 너희들 둥근 밑을 탐할지 몰라.

                    -「엉겅퀴꽃」, 전문

 

  “대학 갈 때까지 참으라는 말만 거듭”「장가가고 싶네」할 수밖에 없는 우리네 부모님들은 또 어떤가. “소주 몇 잔으로 가난했지만 가난하지 않았던 시간들을 강물처럼 꺼내”들기도 하고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나를 감싸 주는 아빠는”「능소화」 아침 일찍 “어젯밤 먹던 황태국 혼자 먼저 데워 먹고 나가시고”  “엄마는 굶거나 식빵 하나 먹고 나가시고”「정시 정식」“주먹을 쥐는” 아들에게 “엄마는 주먹 대신 자꾸 하늘을 보라고”하고, “주먹으로 남의 빈틈을 노리기보다 주먹을 펴고 세상을 어루만지라고 한다.” 그래서 아들은 “나는 대체 잘 모르겠다. 엄마는 세상에서 나를 가장 잘 알면서도 나를 가장 잘 모른다.”「주먹」 라고 툴툴대면서도 주먹이 쥐어질 때마다 엄마의 말을 떠올리며 주먹을 풀게 되는 게 아닐까.

 

  또 할머니는 어떤가. “어제 알바를 하고 돌아오는데 공원길에서 우연히 본” “셀카를 찍고” 있는 어떤 할머니의 모습 위에 아이의 할머니가 오버랩 된다. 아이의 할머니는 ”낡아가는 당신의 모습이 보기 싫다고” “사진을 좀처럼 찍지도 않는다.” 그러나 할머니는 “당신을 돌아볼 시간도 없이” “아직 혼자서 나를 돌보”시며 “어디 성한 데도 없으면서” “지난 번 알바비를 못 받고 쩔쩔맬 때 그 약한 몸으로 무사처럼 나서서 해결해 주고” “어제 아침에 할머니 어깨를 주물러 주었다고 당신 보고 환하게 웃었다고” “학교에 와서 내 자랑”을 한다. “아무것도 아닌 일 창피해 죽겠어”「할머니와 함께 춤을」라고 말하지만 “진정이 있는 말은 눈으로 듣는다.”「구개음화를 배우는 시간」 라고 했나. “그러면 오늘은 나랑 같이 공원에 나가서 꽃무늬 몸빼 입고 사진이나 같이 찍을까? 할머니와 함께라면 나는 어떤 춤도 출 수 있어.” 「할머니와 함께 춤을」 할머니도 눈으로 듣고 있지 않았을까 아이의 진정어린 말을.

 

  꽃이 봄에만 피는 것은 아닐 것이다. 나무의 일생 통틀어 꽃은 한 번만 피고 지는 것 또한 아닐 것이다. 제각기 꽃 피는 시절도, 빛깔도 향기도, 깊이도 넓이도 다를 것이다.

그러나 그 꽃잎들 피고 지는 자리에는 검붉은 생채기!

그 뜨겁고도 아픈 자리는 시간이 지나면

어떻게든 아물고 또 잎이 돋아나기도 하겠지만

그래도 한 번 돌아봐 주는 눈길 있다면

바로 ‘이것이 사랑 아닐까.’( 「그 아이에게 물었다」 중 “이것도 사랑일까.” 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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